마음닦기/독서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빛살 2025. 7. 1. 17:25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이브 엔슬러 작, 김은지 역/푸른숲/2024.10.15.

작가 소개를 보니 예전에 호기심을 자극했던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 monologue)'의 작가이다.('에쿠우스', 피터 쉐퍼) 요즘 '어쩌다 해피엔딩'(박천휴, 윌 애런슨)이 받아서 우리에게 친숙해진 이름 '토니상(미국 연극·뮤지컬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 수상 작가이기도 했다

지은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폭력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폭력을 묵인했다. 18세에 집을 나올 때까지 가정 폭력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환경이라면 잘못된 길로 빠지기가 십상이지만 지은이는 갈망과 글쓰기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사회운동가로 우뚝 섰다.
-갈망(내면의 욕구)+ 글쓰기-> 강한 자아

책머리에 인용된 '바요 아코몰라페'의 글이 책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 더 깊은 차원의 책임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돕는 책임. 우리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다채로운 사람임을. 우리가 누구고 무엇인지 알아가는 일이 현재진행형임을 이해하도록 돕는 책임. 용서는 단지 빛을 청산하는 일일 뿐이다. 화해는 벽을 부수는 일이다.
-> 자신의 정체성 확립, 우리들의 연대, 열린 공동체로 확장

이 책은 속도를 줄이는 것과 되돌아보고, 보고, 진정으로 다시 보는 것에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여성과 소수자를 중심으로 한 생명과 책임, 화해에 관한 글이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물신적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된 여성의 삶의 재건을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기억하기, 인식하기, 책임지기의 과정을 거치는 사유(reckoning)가 필요하다. 사유는 가짜 뉴스와 그럴듯한 거짓말, 거북한 역사를 덮으려는 우파의 간교한 시도에 대한 해독제이다. 사유는 파시즘에 대한 해독제인 것이다.

세상은 서로를 돌보기보다 법으로 금지하는 쪽으로, 피난처가 되어주기보다는 처벌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55)
-국가의 역할(리바이어던): 민주주의로 통제 필요

전 세계 여성 인구 3분의 1이 성폭행을 당했거나 폭력을 경험한 적 있다면 당신들 중에서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122)

제가 녹아들 수 있게 해주세요. 뒤섞이게 해주세요. 갑옷처럼 단단한 저의 자아를 해방시켜 주세요. 원 안에 받아들여지게 해주세요. 저를 앞세우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집 잃은 사람이,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더 많은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실망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해주세요. 저를 더 숨길 수 있게 해주세요. 익명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차례, 나의 메시지, 나의 몫, 나의 작품, 나의 순간을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주세요. 마침내 원 안에 앉을 준비가 되게 해주세요.(137)- 자아의 벽을 넘어선 원 안의 세상과 일체화

<죽음에 내몰린 여자들과 그들을 돕는 남자 138-163쪽>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콩고민주공화국 부카부에서 강간피해자들을 치료하는 판지병원과 생존자 혁신센터인 '시티 오브 조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다. 믿기지 않는 내용들이 많았다.
강간광산, 강간수용소, 강간캠프, 전시강간, 전지강간 등 흉악한 이름들. 강간으로 인한 누공. 콜탄 등 희토류 생산을 위해 극악한 강간을 무기로 해서 원주민을 쫓아내는 자본가들, 거기에는 유엔 평화유지군도 있었다.
삼성, 엘지의 전자제품에도 죽은자의 원통함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넷플릭스 다큐 '기쁨의 도시'에는 6개월 된 아기도 희생자라는 멘트가 나온다.(아기와 성기 비교)
성장과 속도, 이윤 창출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생명 중심 생태주의로 바뀌어야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력한 힘을 갖고 이익을 위해 죽이는 자도 있지만 위험 속에서도 약자를 돕고 살리는 '드니 무퀘게'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역사는 힘 있는 자들이 주인행세를 했지만 절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변화의 물꼬를 터왔다.

<성노예 부서 166-175쪽>
ISIS 성을 모병 도구로 사용. 강간신학, 강간의 종교.
성노예 부서를 운영하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와 이에 맞서는 포로 출신 여성민병대 <태양의 소녀들>이 나와 영화로도 보았다. 맞서 싸워야 한다.

<재난 가부장제>
1986년, 페미니스트 작가 거다 러너는 이렇게 썼다. "역사적 구조 안에서 대등한 가부장제는 종국에 끝을 맞이할 것이다. 가부장제는 더 이상 여성과 남성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가부장제가 군국주의, 인종 차별주의, 계급주의와 결탁해온 이 끈질긴 관계가 지구 생명체들을 위협하고 있다."(189)

만약 제가 꿈꾸는 세상이라면 폭탄과 미사일 수류탄, 총, 전쟁, 살인에 쓰는 국가 예산의 70퍼센트만이라도 트라우마를 위한 지금 조성에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302)- 풍족한 지구, 자원의 독점

<이브의 혁명 341-362>
성경의 이브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믿는 세상 때문에 사과하는 일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굶주리지 않고 보살핌받는 세상을 원해요. 기름은 이제 땅에 묻어두는 세상을요.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받고 그에 걸맞은 급여를 받는 세상을, 가장 소외되고 눈에 띄지 않는 이들에게 영감받아 그들을 위한 정책을 세우는 세상을 원해요. 생명을 중시하는 우리 상상력이 기발하고 신속한 해결책들을 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을요. 우리의 아픔을 가두고 감시하고 처벌하고 비하하지 않고 근원적 이유를 밝히고 치유하는 세상을 말이에요. 돈과 명예를 가진 일부 상류층에 환호하는 일을 멈추고 별다른 자원 없이도 묵묵히 공동체를 바꾸어나가는 사람들에게 존경심과 관심을 갖는 세상을요, 지적이고 정치적인 것에 가지는 신념만큼이나 신비롭고 감정적이고 관능적인 것들을 신뢰하고, 이 모든 것의 통합이야말로 혁명의 촉매제이자 그 자체로 혁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세상을 원합니다. 겸허한 마음이 혁명으로 가는 길이자 유일한 노래를 부르는 길임을 깨닫는 세상을 원합니다.(360-361)"

<에필로그>
나의 새로운 이름에 품는 이상, V.
우리-> 우리들(호모 카테고리쿠스-범주화하는 동물)

쉽게 읽히는 에세이지만 동성애, 성정체성, 임신중지권 등 보수적인 우리 현실에서는 민감한 주제들이 많다. 지은이가 말한 '열정적 부조리주의자', 모순과 혼돈이 기본값으로 주어진 현실에 심리적 자해를 하지 말고 보고 또 보자.

"제게 해답은 없지만 질문들이 있습니다. 저는 질문이 지닌 힘을 믿어요.(378)"
-답은 없지만 너만의 질문을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