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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살 고려탑에 띄우는 편지

일반자료실/문화재

by 빛살 2016. 4. 2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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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눌이 이 세상 내일 적에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한겨레-등록 :2016-04-22 20:25



[토요판] 르포
1000살 고려탑에 띄우는 편지

경복궁 경내 고궁박물관 뒤뜰에 자리한 지광국사탑의 전경. 1981년 경회루 동쪽 터에서 이전해온 뒤 올해 3월 해체될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경복궁 경내 고궁박물관 뒤뜰에 자리한 지광국사탑의 전경. 1981년 경회루 동쪽 터에서 이전해온 뒤 올해 3월 해체될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 나이 1000살을 바라보는 이 고려 불탑의 ‘탑생유전’은 파란만장 그 자체입니다. 서울 경복궁 뜰에서 100년 타향살이를 하다 최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해체된 채 옮겨가 대수술을 받게 된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의 일대기가 그렇습니다. 11세기 국사 해린 스님의 유골을 봉안했던 이 탑은 우리 역사상 가장 처절한 수난을 당한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일본과의 질긴 악연 탓에 이 탑이 원주의 절터를 떠나 유랑하게 된 사연들을 이야기 편지로 전해드립니다.

언제쯤 영원한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을까요. 지금 당신 몸은 수백개로 다시 산산조각나 있습니다. 앞으로 3년간 대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국보 101호)이란 이름을 지닌 당신의 운명입니다. 당신은 얼추 1000살을 바라보는 노령의 불탑이고, 게다가 몸 곳곳이 으슬으슬 떨어져나가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한달여 전 문화재청은 경복궁 경내 뜨락에서 누더기가 된 채 서 있는 당신의 몸을 다시 수백개의 부재로 잘게 해체한 뒤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로 실어 보냈습니다. 100년 사이 무려 8차례나 뜯겼던 몸을 다시 조각낸 겁니다. 앞으로 최소한 3년간 몸 안에 박힌 철심을 빼내고 부슬거리는 콘크리트 땜질을 손보는 보존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1911년 명동성당 부근에 있던 지광국사현묘탑. 원주 법천사터에서 옮긴 직후 찍은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의 사진이다.
1911년 명동성당 부근에 있던 지광국사현묘탑. 원주 법천사터에서 옮긴 직후 찍은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의 사진이다.


당신의 모습을 처음 눈여겨 살핀 건 2005년 봄 어느날 석양녘이었습니다. 용산 이전 준비로 바빴던 옛 국립중앙박물관(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장을 살펴보고 산책에 나선 길이었죠. 풀밭 위에 그림자를 끌며 고적하게 서 있는 당신의 자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박물관이 관리하던 경내 다른 석탑들은 모두 용산으로 떠난다는데, 당신만 몸상태가 나빠 남겨두고 갈 수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높이 6m를 조금 넘는 당신의 용모는 한껏 고고하지만 병환 앞에 스러져가는 노년 귀부인 같은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미술사 연구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당신은 부도탑입니다. 덕망 높은 고승의 화장 유골 사리를 봉안한 탑입니다. 연구자들은 당신을 이 땅 부도탑 가운데 최고 걸작이며 한국 불교장엄의 극치라고 표현하곤 하지요. 장엄이란 짓고 꾸미는 것을 성스럽게 부르는 말입니다.
 

 비계를 치고 해체 작업 중인 지광국사탑.
비계를 치고 해체 작업 중인 지광국사탑.


출생연도 1070~1085년으로 추정

이 땅의 부도탑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평면을 팔각형 또는 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보다 격이 높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불탑처럼 바닥 평면이 사각형입니다. 이중 기단부, 탑몸체, 옥개석(윗돌),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까지 불상과 천인, 구름무늬, 보탑, 연꽃, 초화무늬, 신선 등 극락정토의 온갖 장식들을 새겨넣었습니다. 기단과 탑몸체의 사방에도 부처의 불탑에 쓰는 기둥인 탱주와 우주를 새겼고, 커튼 치듯 장막이 내려오는 이미지도 돋을새김해 장엄한 분위기가 풍겨납니다. 승려 부도탑을 부처의 불탑 못지않게 최고 품격으로 만든 다른 예는 전무후무합니다. 땅과 맞붙은 지대석의 사방 귀퉁이엔 용머리 혹은 상서로운 구름 기운을 묘사한 길쭉한 장식돌을 늘어뜨려 더욱 격조가 넘칩니다. 
 

상륜부를 해체한 뒤 드러난 탑의 옥개석 윗부분. 여기저기 시멘트 땜질한 모습들이 보인다.
상륜부를 해체한 뒤 드러난 탑의 옥개석 윗부분. 여기저기 시멘트 땜질한 모습들이 보인다.


이런 미감들이 요란스럽지 않게 엄숙한 조화를 이루면서 당신은 몸 자체로 극락정토의 화폭이 됩니다. 당시 고려의 장인과 귀족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과 애착을 쏟았는지 느껴집니다. 왜 그들은 부처의 불탑에 버금가는 공력을 들였을까요. 그건 당신이 위대한 고승 대덕의 영혼을 간직한 당대 가장 성스러운 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고려 국사였던 해린 큰스님(984~1070)의 아바타(분신)입니다. 해린이 입적한 뒤 나라에서 지광국사란 시호를 내렸고 원주 법천사에 1085년 그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는 탑비를 당신 바로 옆에 세웠으니, 후대 학자들은 1070년과 1085년 사이 당신이 태어난 것으로 봅니다. 해린은 원래 원수몽이란 속명을 가진 원주 이씨 가문 사람입니다. 18살에 개경의 큰 사찰 숭교사의 운영을 맡을 정도로 법력이 뛰어났고, 이후 덕종, 문종의 법회에 초청받아 법문을 펴면서 문종이 “아무렇게 말을 해도 곧 도(道)와 훌륭한 문장을 이룬다”고 찬사를 보낼 만큼 생불로 추앙받았습니다. 당시 고려의 주요 불교 유파였던 법상종을 대표하는 고승으로 75살인 1058년 5월 국사로 추대되고 9년간 재임하다가 1067년 고향 원주 법천사로 내려가 3년 뒤 세상을 떠납니다. 나라의 큰 스승이 떠나자 문종은 불사를 일으켜 파격적인 사각형 구도의 부도탑을 짓고, 조정 대신들이 빼어난 명문으로 글을 새기고 생동하는 용 새김무늬를 넣은 탑비를 함께 모셨습니다. 
 

진리가 샘솟는 절이란 뜻의 법천사는 법상종파의 본거지로 해린이 입적한 뒤에도 조선초까지 거찰로 흥성합니다. 남한강 근교인 원주에는 개경과 한양으로 세곡을 싣고 가는 조운선의 거점 흥원창이 있어 숱한 물자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곳을 본거지 삼아 해린은 왕실 외척인 인주(인천) 이씨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국정에도 관여했다고 전해집니다. 학자들은 문종의 처남인 이소현(당시 외척 세도가 이자연의 다섯째 아들)이 해린의 문하로 출가한 탓에 이소현이 탑 건립을 주도했을 것으로 봅니다. 특히 당신의 몸체에 깃든 페르시아풍의 창문, 장막 같은 서역풍 양식과 아래 대각선으로 뻗은 용머리 장식 등은 이슬람 영향을 받은 송대 불탑 창과 요나라에서 선물한 최고급 가마 보여의 장식과 흡사해 동서 문화교류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해린과 밀접했던 인주 이씨 일가가 대외 교역을 주도한 상업세력으로서 대외문화에 개방적이었기에 가능했던 성취일 것입니다. 탑 표면에 새겨진 보여를 멘 가마꾼의 관모와 폭이 좁은 바지, 단령 등은 고려복식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지요. 
 

바닥 평면 사각형의 격 높은 부도탑
고려 국사 해린 큰스님의 아바타
동서교류 흔적 남은 서역풍 양식
거란 침입에도 꿋꿋이 살아남았던
법상종파 본거지 법천사가 고향


1911년 일본 모리배 서울로 뜯어가고
상인 손 거치며 오사카까지 팔려갔다
경복궁 조선총독부 앞마당으로 귀국
한국전쟁 때 상부 잃는 참화 겪은 뒤
1957년 콘크리트 땜질 복구로 연명

땜질 복구 때 몸에 박은 철심 녹슬어

조선초 탑이 있던 법천사는 숱한 선비들의 공부 장소이자 휴양처였습니다. 당대 큰 학자 유방선이 한명회, 서거정 등과 청운의 꿈을 갈고닦으며 당신을 살피고 어루만졌던 광경을 지켜봤을 겁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당신은 일본과의 질긴 악연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보다 300여년 전 거란의 침입 때도 불타지 않았던 법천사는 왜군의 방화로 전각들이 불타버렸고, 당신은 폐허가 된 절터에서 탑비와 단둘이 남아 회한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은 전란 뒤 이곳을 찾아와 탑과 탑비를 살피면서 ‘유원주법천사기’란 글로 감회를 읊었습니다. “난리에 불타서 무너진 주춧돌만이 토끼가 놀고 사슴이 뛰노는 길 사이에 흩어져 있다. 비석 하나가 절반이 동강난 채 풀더미에 묻혀 있었다.”

후대 사람들은 당신과 법천사터의 가치를 거의 몰랐습니다. 4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조선왕조가 망한 직후인 1911년 갑자기 나타난 일본인 모리배 모리 무라타로에 의해 당신은 서울로 뜯겨져 갑니다. 크지 않으면서 아름답고 기품있는 탑이 정원 석물에 어울릴 것이라고 짐작한 그가 품삯을 주고 주민을 동원해 탑을 해체한 뒤 와다 쓰네이치란 상인에게 팔아버린 겁니다. 원주시 학예사 박종수씨에 따르면 주민들 사이에는 당시 힘센 마을 장정 하나가 탑을 옮기면서 ‘영차영차’라는 말을 외쳐 ‘영차 할아범’이란 별명이 붙었다는 구전이 전해진다고 하더군요. 와다는 이 탑을 1911년 9월 경성 메이지마치(명동)로 옮겼다가 다시 남창동 저택으로 옮깁니다. 당시 일본 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촬영한 명동의 당신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서울 남촌 일대에는 법천사 부근의 동료 탑들인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등 정원석으로 쓰려고 가져온 석조유산들이 즐비했다고 전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찍은 탑의 모습. 폭격으로 상부가 날아가고 주위에 파편이 흩어진 처참한 몰골이다.
한국전쟁 당시 찍은 탑의 모습. 폭격으로 상부가 날아가고 주위에 파편이 흩어진 처참한 몰골이다.


1912년 5월 와다는 일본 오사카의 후지타 남작에게 당신을 다시 팔아넘겨 당신은 바다 건너 오사카로 끌려갑니다. 이후 무분별한 석물 반출에 대해 일본 학계의 자성론이 일었고, 조선총독부에서 반출을 문제 삼자 와다가 재구입해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리던 경복궁 경내 건춘문 부근으로 황당한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 뒤 이 자리에 들어선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정면 앞마당에 대표 유물로 들어서게 된 당신은 무슨 영문인지 1932년 경회루 앞으로 다시 옮겨져 해방을 맞습니다만, 1950년 한국전쟁 때 포격으로 상부가 날아가버리는 참화를 입었습니다. 전쟁 직후 궁 안을 산책하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보기 흉하니 빨리 복구하라는 지시를 내려 탑은 1957년 콘트리트로 땜질된 채 복원됩니다. 그렇게 20여년을 보냈다가 1981년 다시 해체돼 지금 고궁박물관 뒤뜰로 옮겨졌습니다. 정원석으로 쓰려는 일본인들의 탐욕과 정교한 보존 기술이 없었던 해방 직후 상황에서 당신은 곳곳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며 유랑하는 환자로 전락했습니다. 더욱이 심장과도 같은 사리기가 이전 와중에 사라졌고, 비천상과 불좌상이 수놓아졌던 상륜부 원형을 포격에 잃은 것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습니다.

이번에 당신을 해체한 것도 1957년의 땜질식 복구 뒤 콘크리트 보존연한 40년을 넘었고 몸 곳곳에 박은 철심들이 녹이 슬어 더이상 두면 탑체를 부지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본디 모습을 되찾아줄 근거 자료가 부실한 탓에 여전히 상당 부분 논쟁과 추론을 통해 원형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수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이 당신의 몸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소문이 돌았던 기단부의 사자상 4개를 수장고에서 찾아냈지만, 이 사자상 또한 원래 당신과 한몸이었는지, 이후 외부에서 갖다 붙였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실정입니다. 
 

보존시설·상주인력 확보 급선무

당신이 원래 있던 법천사터는 2000년대 이래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 탑자리가 확인됐습니다. 탑비와 더불어 고려시대 유일한 탑원 실물들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원주시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은 이번 해체보수를 계기로 제자리로 탑을 옮기자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탑자리가 명확하고, 일제가 탑터라고 표시한 표석도 확인돼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나름 명분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현지에서 당신을 제대로 관리할 역량이 되는지 의아심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발굴중인 절터는 정비가 거의 안 되어 있고, 상주 관리 인력도 없습니다. 발굴로 땅이 시유지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이 대부분 떠나 무방비 상태에서 유물·유적들의 도난·유실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습니다. 원주시 쪽은 내년 정비에 필요한 예산 40억원을 책정해 문화재청과 협의를 할 계획입니다. 비바람을 막을 석조유구 보존 시설과 상주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문화재 예산이 빈약한 현 상황에서 얼마나 정비계획이 실현될지는 미지수입니다. 문화재청은 수리가 끝난 뒤 문화재위원회 논의를 통해 당신의 거처를 정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더욱 중요한 건 이 탑과 절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 어떻게 후대에 잘 살려 전할 것인가라는 진심과 성의의 문제가 아닐는지요.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은 당신의 외롭고 쓸쓸한 처지에 맞춤한 시 한편이 생각납니다. 백석 시인이 1941년 발표한 ‘흰 바람벽이 있어’란 시의 구절 중 일부를 적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고려의 드높은 정신과 고승 해린의 영혼을 품었던 당신, 부디 언제까지나 이 땅의 우리와 함께 영생하소서.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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