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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복이 더 낫다

불교/금강경

by 빛살 2014. 11. 3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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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 無爲福勝分

 

 

"須菩提!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於意云何? 是諸恒河沙,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但諸恒河, 尙多無數, 何況其沙?"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善女人, 以七寶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

 

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以此福德, 勝前福德."

 

 

무위의 복이 더 낫다

 

"수보리여! 만약 갠지스 강의 모든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갠지스 강이 있다면, 그대 생각은 어떤가? 이 모든 갠지스 강의 모래는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갠지스 강만 해도 무수히 많은데, 하물며 그 모래겠습니까?"

"수보리여! 내가 지금 진실하게 말하지만,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이나 많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그 얻는 복이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 중 사구게라도 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 준다면, 그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클 것이다."


* 무위 : 열반의 다른 이름

* 불교의 수행 : 복덕 + 지혜

- 육바라밀(六度) 중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은 복덕을 선정, 지혜는 智를 쌓은 일이다.

 

백거이가 항주 태수(杭州 太守)가 되어, 과원사에 주석하던 이름난 고승 도림 선사(道林禪師, 741~824)를 친견할 때의 태도를 보면 지식인으로서의 거만함을 엿볼 수 있다. 맑은 날이면 경내에 있는 오래된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하곤 해서 조과선사(鳥窠禪師)’라는 법호가 붙은 도림 선사를 찾아간 것도 순수한 구도심에서라기보다는 선지식의 무게를 달아보겠다는 불순한 동기도 있었던 것 같다.

백거이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절에 가서 조과도림 선사를 찾으니, 마침 선사는 나무 위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거사가 말했다.

선사님, 머무시는 곳이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자 선사가 대답했다.

태수가 더욱 위험하군요.”

거사가 다시 말했다.

제자는 진강산(鎭江山)에 있는데, 어찌 위험하겠습니까.”

섶나무와 불이 서로 만나듯이 식성(識性)이 멈추지 않으니, 어찌 위험하지 않으리오.”

선사가 이렇게 경책을 하자, 거사가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진중하게 여쭈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여러 선을 받들어 행하십시오.(諸惡莫作 衆善奉行)”

거사가 실망했다는 듯이 반문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것을 어찌 말하십니까?”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지요.”

선사의 말에, 거사는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예를 갖추었다.

 

경덕전등록오등회원등 공안집에 나오는 이 선문답에서는 두 가지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다.

먼저, 진실로 위태로운 것은 때와 장소라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늘 치성하는 분별식심(識心)에 있다는 것이다. 도림 선사는 높은 나무 위에 앉아서 졸고 있지만 무사태평한 반면, 백거이는 선사의 살림살이를 떠보려는 시비분별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니 늘 헐떡이며 괴로울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세간의 삶은 언제나 권력과 돈, 쾌락을 쫒는 이해타산이 바탕이 된 생존경쟁의 장이기에 자칫 방심하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곳이 아닌가. 도림 선사는 이 점을 일깨워주면서 분별심이 아닌 무심(無心)으로 살아갈 때 세간 속에서도 청정한 깨달음의 삶을 구현할 수 있음(處染常淨)을 암시하고 있다. 

선사의 두 번째 가르침은 불법의 요체가 단순한 지식이나 앎이 아닌, 수행과 실천이 일치하는 지행합일, 즉 해행상응(解行相應)에 있다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을 자부하던 백거이는 아마도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하는 칠불통게(七佛通偈: 부처님이전 과거 7불의 공통적인 게송) 정도는 지식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본래의 마음자리는 선악을 초월한 자리이지만, 모든 부처님의 가풍(家風)은 선악을 초월한 가운데 선을 행하면서 공덕과 지혜를 닦고 쓰는 것이다. 만약 세 살 배기도 아는 말이라고만 여긴다면, 그는 아마도 이것을 실천해보지 않은 자일 것이다. 달마대사가 이치를 깨달아 들어가는 문(理入)’실천으로 증득하는 문(行入)’을 나눠 법문한 것도, 실천의 어려움을 넘어서게 하는 자비심의 발로에서 나왔으리라.

-푸른 바다 김성우(도서출판 비움과소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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