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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없는 '지옥 그림'

마음닦기/좋은 글

by 빛살 2020. 11. 1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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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멀라 해리스/ 브리아 괼러

카멀라 해리스에게 부통령 당선 이상의 기대를 거는 사람이 많다. 해리스의 이미지가 담긴 작품도 벌써 나왔다. 브리아 괼러라는 사람이 디자인해 인터넷에 퍼졌다. 당당하게 걸어가는 해리스의 그림자가 여자 어린이의 실루엣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Norman Rockwell

어린이의 실루엣은 노먼 록웰이 1964년에 그린 우리가 함께 사는 문제라는 작품에서 따왔다. 미국에서는 유명한 그림이다. 오바마가 이 그림을 백악관에 걸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마침 나는 3년 전에 <불편한 미술관>이라는 책을 쓰며 이 그림을 소개한 바 있다. “1960, 미국 뉴올리언스. 백인만 다니던 초등학교에 흑인 소녀 루비 브리지스가 입학했다. 그 지역 인종주의자들이 성을 냈다. ‘백인 학교에 흑인이 다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험악했다. 보안관들이 브리지스의 통학길을 지켜야 했다. 이 장면을 (4년 후에) 노먼 록웰이 그렸다.”

 

Christ carrying the Cross, Hieronymus Bosch(1450-1516)

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놀란다. 노먼 록웰이 화폭에 그린 것 때문이 아니라, 그리지 않은 것 때문에 놀란다. 록웰은 나쁜 사람을 그리지 않았다. “브리지스에게 해코지하려고 하는 비열한 백인 어른들은 그림에 나오지 않는다.” 브리지스를 경호하는 연방요원도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오롯이 눈길을 사로잡는 사람은 여섯살 어린이 루비 브리지스 한명뿐이다.

나라면 어떻게 그렸을까 자주 생각한다. 나쁜 사람을 화면 가득 그리지 않았을까. 내가 좋아하는 옛날 그림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라는 작품이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그렸다고도 하고, 다른 사람이 보쉬를 흉내내 그렸다고도 한다. 사람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가운데 수난받는 예수가 있고 예수를 괴롭히는 사람들(화가가 보기에 악당들)이 둘레를 빼곡히 채웠다. 지옥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험악하고 못난 얼굴의 박람회랄까. 브리지스를 둘러싼 백인 어른들을 이렇게 그려보면 어떨까.

 

리틀록 나인(nine, 등교투쟁을 벌였던 9명의 흑인 학생들) 사건

비슷한 사진이 있다. 1957년에는 리틀록 나인사건이 있었다. 마침 이 사건도 칼럼에 다룬 적이 있다. “백인들만 다니던 아칸소주 리틀록 고등학교에 흑인 학생들이 다니게 되었다.” 이 가운데 엘리자베스 엑퍼드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봉변을 당했다. “혼자 나타난 열다섯살 어린 학생을 두고 성난 백인들 수백명이 몰려들어 침을 뱉고 욕을 하고 고함을 쳤다. 이 악몽 같은 장면을 기자 조니 젱킨스가 사진에 담았다.” 엑퍼드의 뒤통수에 대고 고함을 빽 지르는 백인 학생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표정이 또렷해 지옥의 풍경처럼 무섭다. 이 사진은 지금 봐도 섬뜩하다.

 

노먼 록웰은 그림으로 사람을 단죄하지 않았다. 1965년에는 미시시피의 살인’(또는 남부의 정의’)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미국 남부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이 1964년에 인권운동가 세 사람을 납치해 목숨을 빼앗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분노한 록웰은 이 일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때도 살인자는 그리지 않았다.(습작에는 넣었다가 완성작에서 뺐다.) 록웰은 잡지 일러스트레이션을 60년을 그린 사람이다. 대공황도 세계대전도 민권운동을 향한 백인우월주의의 테러도 목격했다. 지옥과 같은 현실을 그리면서도 록웰은 지옥을 그리지 않았다. 지옥 그림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화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나도 요즘은 이런 록웰을 닮고 싶다. 잘 안될 것 같지만.

한겨레신문/2020/11/12/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의 글에 사진을 보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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