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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22. 10. 2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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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이윤기/21세기북스/2021.10.18.

 

20세기 최고 신화해설자로 불리는 조셉 캠벨과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이다. 모이어스가 질문하고 캠벨이 답하는 형식이다.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9)-세상을 쥐려면 손부터 펴라. 아프락삭스

조셉 캠벨은 인생은 모험이라고 확신한다.(12)

그들의 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만을 위한 해탈이나 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12)- 구도자와 영웅, 안중근, 화엄경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48)-보편성, 우주적 상상력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天球의 가락이다.(15)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은유, 암시적)이다. 그러나 이 신화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각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다른 까닭은 각 문화권에 따라 마땅히 자각하여야 할 삶 자체의 양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18)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 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18)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21)

 

1.신화와 현대 세계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고통은 불완전한 존재만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요"(28-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 존재와 현실 안에서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29)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우리는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 아닙니까? (34)

 

신화는,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우리가 사는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줍니다.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도덕적인 질서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사는 실제적인 삶의 도덕적 필요성과 발이 맞아야 합니다.(43~44)

 

나는 현대의 진정한 공포의 도가니를 베이루트에서 봅니다. 거기에서는 서양의 3대 종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치고 받고 합니다. ?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 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들은 자기네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를 열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그 고리는 폐쇄회로인 것이지요. 각기 "우리야말로 선택된 백성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계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요.(58)-성경 축자 무오설(영감설), 명시적

 

범주에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61): 특수한 사회를 겨냥하는 신화학-유목민족, 자연 지향적인 신화학-경작 민족(62), 지구라는 행성의 신화학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불교입니다.(61)

 

<신화의 기능>

1.신비주의-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 살 수 있게 됩니다.

2.우주론적 차원을 연다.

3.사회적 기능-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한다. 시대착오적 도덕률.

4.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74-76)

 

신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이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76)

신화와 꿈은 같은 곳에서 옵니다. 이 양자는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내어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에서 옵니다.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여야 합니다.(77) 신화는 공적인 꿈, 꿈은 사적인 신화

 

2.내면으로의 여행

하지만 영웅은 그렇지 않아요. 시련을 극복하고, 기왕에 해석되어 있는 경험에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용기, 이게 바로 영웅의 용기입니다.(90)-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조건을 화해시키는 일, 이것은 창조신화의 기본 구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세계의 창조 신화는 서로 아주 비슷한 거지요.(92)

 

창세기 뱀의 해석(새로운 삶, 생명력)-이브의 역할(속세의 어머니 96-100), 기독교의 가부장적 세계관의 기원 예수의 위대함(영웅적 면모-그리스도, 구세주)

 

기독교는 삶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지요. 우리가 이어받은 성서문화를 보면, 할례나 세례를 받지 않은 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썩은 것, 아주 자연스러운 충동은 죄악입니다. 뱀은 이 세상에 죄악을 비롯하게 한 아주 못된 것, 여자는 사과를 남자에게 건네준 장본인이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과 죄악, 뱀과 죄악, 결국은 삶과 죄악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한 왜곡입니다. 그런데 성서적인 신화와 타락의 교리 전반에 걸쳐 이런 왜곡이 생기고 있어요.(97)

 

하느님은 남성이다. 여성이다 하는 게 참 우스꽝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신의 권능은 성별에 우선해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103)-하느님 아버지라는 말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127)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은 원래 이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133)

 

영웅이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영웅의 행동 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135)

 

3.태초의 이야기꾼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을 버티어주는군요.

의례의 중심적인 목적은 한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입니다.(145)

-블랙풋족 이야기(152-155) 의례를 통해 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다. 의례로 정화.

의례의 마당은 신화가 드러나는 마당입니다. 의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하는 것이지요.(162~163)

 

전통문화는 엘리트의 경험,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들의 귀는 우주의 노래에 열려 있어요. 이들이 민중에게 이야기하면 민중에게서 반응이 생기는데 이 작용과 반작용이 상호 작용을 하는 겁니다.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168)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 가능한) 球體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175)

 

4.희생과 천복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는 아닙니다. (189)

 

사회라는 것은 언제나 부계적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항상 모계적입니다.(193)

 

그는 근본이 하느님의 본체이시나 하느님과 동등하게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음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212)-빌립보서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217)

 

아벨라르는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요. 人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쪽으로 열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218)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 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을 열릴 것이다."(227)

 

5.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아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 하게 될 것임을…….(229)

영웅이란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229)

지구촌 전부가 우리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 마당에, 특정 국가, 혹은 특정 국민의 영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요?(234)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269~270)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273)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78~279)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279)

 

달라이 라마에게서는 원망이나 미움과 관계가 있는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그 교파의 구성원들은 무서운 격동기, 무서운 폭력의 희생자들인데도, 증오의 감정이 없어요. 나는 그들에게서 종교가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오늘날에 살아 있는 참 종교가 거기에 있었던 겁니다.(293)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열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296)

그러니까 니르바나는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바로 그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안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에서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를 벗어납니다. 욕망, 공포, 의무 같은, 우리를 붙잡는 것에서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성취한 사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통치자입니다.(300)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生起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299)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303)

영웅의 여정

 

파인딩 조 - 조셉 캠벨(조지프 캠벨)을 찾아서   https://youtu.be/t-tP0kqgl30

 

6.조화여신의 은혜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305)

 

살인하지 말되, 이방에서가 아니거든 남의 아내를 꾀지도 말라는 겁니다. 정 꾀어야겠거든 남자는 모두 칼로 죽이고 여자를 전리품으로 데리고 오라는 겁니다.<신명기>---히브리인은 이방인에 관한 한 사정이 없지요,---말하자면 사랑과 자비는 무리 내적으로, 무력과 비방은 무리 외적으로 투사하라는 것입니다---성서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로서, 우리 서구인들의 여성 경시 풍조는 다분히 성서적 사고의 산물일 것입니다.(315-6)

 

영적인 권능과 세속적인 권능의 통합을 상징하는, 가부장제적이고 유일신적인 히브리의 구세주 관념과, 처녀신의 몸에서 태어나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하는 위대한 여신의 아들이라는 그리스의 고전적인 관념이 만나는 겁니다. 그리스는 부활하는 구세주 모티프가 굉장히 많은 곳이랍니다.---실제로 카톨릭 교회에서는 마리아가 '공동 구세주(co-savior)로 불리는 것으로 압니다.(330)

<신약성서>에는, "예수님 안에서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는 참으로 멋진 말이 있습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는 뜻이겠지요.(333)

하느님을 '절대 타자'로 보는 관념이 엉터리인 까닭이 여기에 있어요. '절대 타자'와 나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을 수 없지요.(333)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면서 야훼는 남성을 창조하되 먼저 형상을 빚고 여기에다 생명을 부여합니다. 결국 야훼 자신은 그 형상 안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신은 다릅니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336)

 

7.사랑과 결혼 이야기

에로스-성적 욕망, 충동

아가페-영적인 사랑, 자비, 종교적 -①② 둘 다 비개인적 사랑

아모르(AMOR)-개인 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개인주의 대두

크레도(信經, 믿습니다로 시작해 믿습니다로 끝난다)에 대한 리비도(삶의 충동)의 승리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350)- 사랑의 파이오니아

그럼요. 그게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서구 선진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350)

 

passion은 곧 고통인데 이걸 함께(com-)하는 것이 곧 자비(compassion)인 것이지요. 독일어가 자비의 의미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합니다. 독일어로 자비는 미틀라이트(mitleid)라고 하는데 미트(mit)는 함께라는 뜻이고, 라이트(leid)는 고통, 혹은 슬픔이라는 뜻입니다.(353)

 

8.영원의 가면

신화의 이미지는 우리 모두의 영적 잠재력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로 이 신화 이미지를 명상함은 우리 내부에 있는 이 잠재력을 촉발하는 겁니다.(375)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375) <우파니샤드> 중에서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고, 우리 마음의 중심이 의식되기 시작하고, 다름 사람, 혹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자비에 눈뜨게 되면 문득 '''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한 생명을 나누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완벽하게 새로운 영적인 삶의 단계가 열립니다. 세계를 향한 마음의 열림, 이것이 바로 상징적신화적 의미의 처녀 수태랍니다. 이 처녀 수태는, 건강, 자손, 권력, 향락 같은 물리적인 것만을 겨냥하던 인간적동물적 삶이 영적인 삶을 잉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380)

우리는 하느님이기는 하느님이되, 자아에 집착한 상태로의 하느님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이원적 초월자와 하나가 되는 깊디깊은 존재의 차원에서만 하느님인 겁니다.(382)

 

특정한 대상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들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공격을 정당화시키자면, 증오와 오해와 멸시의 공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공작의 메아리가 지금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들리고 있군요.(383)

 

선생님께서는, 예수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느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심이니라"라는 말을 인용하시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고상하고, 대담한 가르침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의 생각도 그때와 같습니까?/ 나는 자비를 근본적인 종교체험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지요.(383-4)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386)-도마복음

 

예수는, "내 입으로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될 것이고 나 또한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지요? 이때 예수는 그 자리에 있는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가 실재한다는 관점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 다른 존재는 그리스도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의 존재일 수도 있어요. 누구든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살면 그리스도 같을 수 있다는 겁니다. 누구든 말씀의 메시지를 삶 속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면 곧 그리스도와 동등해질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구절의 의미인 겁니다.(386)

자기 삶을 가슴으로 사는 삶의 단계에 올려놓은 사람에게는 다 그렇습니다.(387)-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어버리는 인생

 

종교라는 말은 렐리기오(religio)', '뒤로 연결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둘이서 나누어 사는 하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삶이 있다면 내가 사는 조각난 삶은 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렐리기오'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종교의 이미지에 상징으로 나타나 있어요. 상호 연결되는 상태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곧 종교인 것입니다.(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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