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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나를 일깨워 준 아이들

마음닦기/붓 가는 대로

by 빛살 2007. 9. 5.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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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깨워 준 아이들

우리 학교는 정원이 아름답다.
잘 다듬어진 잔디,  귀한 정원수, 수석(壽石)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런데 교무실 앞에 정원의 조화를 깨는 볼썽사나운 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자라며 잎이 무성하여 해마다 무자비하게 가지치기를 당하는 이름도 모르는 나무다.
누가 일부러 심은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자라났단다.
아마 교정의 풍경과 어울리려면 해마다 가지치기의 아픔을 견뎌내야 할 것 같다.
그 고통 때문인지 항상 몸을 뒤틀고 있다.

교직에 발을 들여 놓은 지 벌써 16년째 접어들고 있다.
그 동안 자랑할 일들보다는 저 나무처럼 가지치기를 해서 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들이 더 많다.
하지만 볼썽사나운 모습으로나마 교직에 버티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려울 때마다 나를 일깨워준 학생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의욕만 앞세우며 무수한 시행착오를 했던 초임 교사 시절.
처음에는 총각이라는 이유와 조퇴 · 외출증을 잘 끊어주는 마음씨 좋은 교사라는 점 때문에 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은 제멋대로 행동하더니 한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다.
행복 끝,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거의 매일 술로 불행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교직은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그만둘 거 빨리 끝내자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출근을 했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처음으로 학생들에게 자습을 시키고 창밖만 바라보다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안타까운 듯,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온몸으로 학생의 눈물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3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되어 있을, 당시 2학년 8반 정미영 학생.
자그마한 키에 잔잔한 미소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했던 아이.
그 학생의 눈물이 나를 정화시켜 주지 않았다면 아마 교사로서 나의 삶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 기억 속에서 뭉떵 떼어버리고 싶은 부분이 있다.
1995년 한 해는 무기력과 실의 속에서 보낸 나날들이었다.
건강도 좋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공황에 가까운 상태였다.
학교에 와서는 시간 나는 대로 소파에 드러누워 지냈다.
수업은 수업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겉돌았다.
학교 오기가 무척이나 힘에 겨웠고 학생들 대하기가 겁나던 그런 때였다.
걸핏하면 학생들에게 화를 내고 신상필벌을 철칙처럼 여기며 작은 실수도 엄하게 다스렸다.
착하고 모범적이라고 생각되는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보상이라는 듯 잘 대해주었다.
그럴수록 학생들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외톨이가 되어갔다.
수업도 학교생활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 만신창이에서 나를 구원해 준 한 마디 말.
조용하면서도 야무진 모습으로 할 이야기는 할 줄 아는 학생으로 기억되는 김득희라는 학생.

‘착하고 공부 잘 하는 학생만 좋아하고, 말썽부리고 공부 못하는 학생은 미워한다면 선생님이 무슨 필요가 있어요’
라는 말이 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관심도 애정도 없이 타성에 젖어 있던 나의 삶이 균열을 일으키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지금도 학생들을 꾸짖을 때면 득희의 말을 떠올리며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심하게 가지치기를 당한 채 몇 안 되는 잎을 바람에 하늘거리며 서 있는 두 그루의 나무.

하늘을 향한 열망을 뿌리와 줄기로 돌리며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좌절과 절망을 가지치기하여 신뢰와 사랑의 싹이 돋도록 나를 일깨워 준 두 명의 학생들.
남은 교직 생활은 신뢰와 사랑 속에서 꾸려 나가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해 본다.

-2003년 도전 골든벨을 앞두고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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