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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동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73회 동아마라톤대회

취미활동/마라톤대회참가기

by 빛살 2007. 10. 3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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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풀 코스를 달리다>

 

2002년 3월 17일
촌놈 팬티 바람으로 광화문 앞에서 잠실운동장까지 42.195km를 달리다.
운 좋게 참가수기가 당선됨.


기록은 3:58:35

 

 


새로운 시작의 다짐(수기 당선작)


미쳤다

드디어 내일, 동아서울국제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날이다. 서울로 향하는 전세 버스 안에서 모처럼 여유를 맛보고 있다. 그  동안 학기초의 어수선함과 처음 도전하는 풀코스에 대한 불안감으로 지쳐 있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 편안히 미지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차창 밖으로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훈훈한 봄바람에 기지개를 켜는 듯한 나무들처럼 나도 두 팔을 뻗어 본다. 봄의 기운이 온몸에서 솟아나는 것 같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모두가 낯선 얼굴들이다. 포항마라톤클럽에 적을 올린 지 꽤 되었으나 그 동안 한 번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탓이리라. 클럽회장인 손양수님의 사회로 각자의 소개와 대회에 임하는 자세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번 동아마라톤에서 sub-3가 확실시 되는 우리 클럽의 기린아 안천수님의 아내 되시는 분의 이야기이다. 안천수님은 그 동안 아침에는 수영을, 저녁에는 달리기를 꾸준히 해왔단다. 그 엄청난 훈련량에 우리도 혀를 내두르는데 같이 사시는 분께서는 오죽했겠는가? 달리기를 하고 땀을 콩죽같이 흘리며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보면서 "미쳤다! 미쳤다!"를 연발하면서 핀잔을 준단다. 그리고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달리는 사람을 보면 "저기 미친 사람 또 있네"라고 비꼰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안천수님의 단짝 정종영님의 아내 되시는 분이 맞장구를 치신다. "저는 제 남편을 보고 미쳤다가 아니라 저~엉~말로 미쳤다라고 핀잔을 줍니다"라며.

버스 안의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들은 조금씩 미쳐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내가 언제부터 미치기 시작했을까?


 

첫발자국

가만히 눈을 감아 본다. 건들건들 병철이가 달려온다. 길군 현준이, 힘 좋은 대민이, 종손 종관이, 유도 소년 종범이, 구룡포 과메기 태광이, 흰둥이 짱구 형대, 말락이 형락이, 섭섭이 경섭이, 괴물 동권이가 무리를 지어 뛰어 온다. 저 멀리서 세민이랑 영구 규영이는 불러도 자꾸만 도망을 간다. 그들과 함께 달리기는 시작되었다. 2001년도 4월 29일. 제1회 포항 해변마라톤대회. 세명고등학교 1학년 1반 담임인 나와 학생인 그들이 10km를 함께 달린 것이다.

시작을 학생들과 함께 한 것은 축복이었다.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 교사에게 그것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가는 교사로서 최소한 밥값은 해야겠다는 것이 내 평소의 생각이다. 달리기 인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시작을 같이한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달림이가 되어야겠다.

애들아,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우리 각자의 목표를 향해 끝까지 달리는 거야.

 

광화문앞에서

처음으로 광화문 앞에 서 본다. 그것도 팬티차림으로. 서정주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라고 읊은 우리의 숭고한 문화 유산. 그 앞에 넓게 트인 세종로에는 이순신 장군이 수호신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원래 선수들 집결지가 광화문 안이었으나 우리들은 체온 유지를 위해 버스 안에 있다가 가볍게 몸을 풀고 세종로로 나오는 선수들 행렬에 끼어들었다. 오하수 선생님과 함께 네 시간 페이스 메이커 풍선을 향해 나갔다.

달리기 경력은 그 동안 10km, 하프를 각각 한 번씩 뛴 것이 전부다.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산국제마라톤대회에서 하프를 뛴 후 같은 학교, 같은 과에 근무하는 오 선생님의 권유로 함께 풀코스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꾸준히 연습했다. 물론 목표 시간은 4시간. 초보 달림이로서는 벅차다는 느낌 때문에, 때로는 목표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무리를 하기도 했다. 덕분에 설 일주일전에 무릎 부상을 당했다. 설연휴가 끝나고 치료와 연습을 병행했다. 연습을 마친 후 한 30분 동안 얼음 찜질을 하고 맨소래담을 바른 후 그 위에 다시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마지막으로 랩으로 두 번 감고 잠을 잤다. 그 동안 맨소래담과 안티푸라민을 각각 한 통 이상을 소비했다.

출발선에서도 무릎이 걱정이 되었다. 달리기 선배들이 무리하지 말고 완주를 목표로 하라고 했지만 자꾸 마음 속에서 오기가 생긴다. 겨우 내내 연습했던 것이 아깝다. 앞으로 달리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가지 달리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벼운 함성이 인다. 1차선 도로쪽을 보니 중앙분리대 부근에서 선수들이 오줌을 누고 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오 선생님한테 외국의 어느 마라톤대회에서는 달리는 선수들이 다리 위에서 오줌을 누는 것이 전통으로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들은터라 별 생각 없이 하나의 파격쯤으로 받아들였다. 하기야 팬티 바람으로 서울의 심장부를 달리는 것 자체도 파격이 아닌가? 모든 것이 그냥 신기하기만 했다. 무엇이든 첫경험은 사람을 들뜨게 하나 보다.


 

오버 페이스

아무 생각 없이 오 선생님이랑 어미닭을 좇는 병아리처럼 페이스 메이커 뒤를 졸졸 따라갔다. 부산대회 때처럼 잠을 한숨도 못 잤지만 10km를 지나면서 몸이 풀리고 컨디션도 괜찮아졌다. 예상했던 페이스보다는 약 5분 정도 빨랐다. 15km 지점에서 물과 바나나를 섭취하고 다시 페이스 메이커를 따라갔다. 오 선생님이 화장실에 간다기에 혼자서 달리다가 나도 주유소 화장실에 들렸다. 그러면 어지간이 시간이 맞아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은 소변기와 대변기가 각각 하나밖에 없었다.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볼 일을 보고 도로로 다시 나오니 풍선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을 달리니 풍선이 저 멀리 아득하다. 저 풍선 주위에 오 선생님이 있겠지 하는 마음에 따라잡기 위해서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풍선과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페이스 메이커를 따라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고수들의 조언이 생각났다. 한참을 달리니 하늘색 운동복의 오 선생님이 보인다. 아, 이제 따라 잡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달리는데 이런 오 선생님의 스피드가 장난이 아니다. 아마 오 선생님도 내가 페이스 메이커 대열에 합류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따라 잡기 위해서 속도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18km 쯤에서 따라 잡을 수 있었지만 이미 오버페이스 한 뒤였다.

잠실 대교를 건너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땀방울을 식혀 준다. 제법 강한 바람이다. 해변 도시라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포항. 포항에서도 언덕배기에있는 집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바람에 익숙해진 탓인지 달리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속도를 내본다.


 

갈등

26km 지점을 지나고 있다. 아침밥을 먹던 곳을 지나 어제 초청 선수들의 숙소이자 우리가 하룻밤을 묵었던 올림픽 파크텔을 지나가고 있다. 오 선생님의 숨소리가 거칠어 진다. 나의 다리도 묵직하다. 페이스를 조금 늦추고 싶다고 느껴졌다. 30km 지점에서 음료수와 음식물을 섭취하고 근육 마사지도 받으며서 잠시 쉬었다. 에어파스를 바르고 싶었지만 이미 동이 나 있었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다리는 여전히 천근만근이다. 오 선생님은 다리에 쥐가 나는지 잠시 멈춘다. 그리고 연신 허벅지를 손으로 두드린다. 페이스를 늦추었다. 하지만 오 선생님은 자꾸 멈칫멈칫한다. 뒤를 돌아보면서 망설였다. 끝까지 함께 달려야 하나, 혼자 치고 나갈까 생각하다가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겨우내 서로 격려해가면서 훈련을 같이 했는데, 더구나 포항을 떠나기 전 사모님의 정성어린 점심 대접을 받았었는데, 곤경에 처한 선생님을 그냥 놔 두고 뛰려니 가슴이 쓰렸다. 50세의 초보 달림이지만 선생님의 강단을 믿기로 했다. 결국 혼자인가?

고독

왼쪽 무릎을 보호하려고 길가 쪽으로 달려왔다. 오른쪽 다리가 뻣뻣해지고 왼쪽 다리는 근육이 뭉쳐 뭉쿨뭉쿨 제멋대로 움직인다. 허리도 저려온다. 하지만 허리 위쪽으로는 이상이 없다. 호흡도 괜찮고 정신도 말짱하다. 다리를 옮기기가 점점더 어려워진다. 걷는 사람도 늘어나고 인도에 큰대자로 누워있는 사람도 있다. 아! 걷고 싶다. 39km 표지가 보인다. 달리기를 멈추고 걷는다. 편안하다. 시계를 보니 4시간 안에는 들어갈 것도 같다. 다시 힘을 내서 달려 본다. 다시 걷는다. 40km지점에서 물을 마시고 이제 2km, 굴러가도 가겠다는 마음으로 달려보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갑자기 아버지의 영상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이상을 고향집에서 홀로 지내시고 있는 아버지. 주무시다가 한밤중에 깨어나서 느끼실 고독감, 그 고독의 무게가 느껴진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고독을 이기시려고 불경 테이프를 구해 달라고 하신 것은 아닐까?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힘을 내 본다.


 

아쉬움과 환호

잠실주경기장이 보인다. 입구에 선수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달려야 한다고 마음먹었지만 마찬가지. 또 다시 걷는다. 우레탄이 깔린 트랙에 들어와서야 마지막 힘을 내서 전력 질주를 했다. 이때 다른 이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이 핑 돌고 기쁨의 환호성이 저절로 튀어 나온다고 하는데 나는 어서 빨리 결승점을 통과하여 이 경기를 끝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 마디로 고통스러웠다.

드디어 결승점 통과. 전광판 시계는 커다란 숫자로 4시간 20여 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1분만 더 당겼어도 3시간대를 기록하는 건데 하는 아쉬움으로 고개가 푹 숙여졌다. 3시간 58분을 목표로 연습을 했고, 또 그렇게 달렸는데 불과 2분여 차이로 목표를 이루지 못하다니. 못내 안타까웠다.

칩을 반납하러 보조 경기장으로 갔다. 건타임(gun time)으로 4시간을 끊었으니까 넷타임(net time)으로는 3시간 58분쯤의 기록이 나올 것이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번쩍 뜨였다. 그 사람들에게 물었다. "4시간 30초쯤 들어왔는데 실제 기록은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 왈 "출발을 10시 2분쯤 했으니까 그 시간에서 2분 정도를 빼면 됩니다." 속으로 외쳤다.

"야호!" 남들이 보기엔 대수롭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나에게는 내 자신에게 다지고 다진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것도 내 생일날.


 

아, 어머니 당신의 아들

2002년 3월 17일 일요일. 나의 43번째 생일이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는 고향의 양지바른 언덕에서 햇볕이나 쬐고 계실 어머니. 살아생전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시더니 들꽃이 좋아 산으로 가셨는지. 저번 설에 처음으로 꽂아드린 꽃들은 혹시 바람에 날려가지는 않았는지. 월말에 꽃을 들고 원주 고향으로 가서 다시 한번 인사드려야겠다.

아, 어머니 당신의 아들! 당신이 주신 몸 잘 건사하여 당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겠습다. 그리고 저 한 몸 당신의 귀한 자식이듯 이 세상에 부모 있는 사람들 모두 귀한 사람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다짐

걱정하던 오 선생님도 나와 별차이 없이 4시간 1분대에 들어왔다.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신다. 39km 이상을 달릴 때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하지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었으나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인가 보다. 이제 달리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양학동 뒷산을 달릴 때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언덕배기를 오르고 난 뒤의 그 마음. 무엇인가를 잃어 버린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얻기도 한 것 같은 묘한 마음. 지금의 내 마음이 그렇다. 그런 마음이 좋아서 나는 달린다.

살짝 미치면 세상이 즐겁다고 어떤 이가 말했다. 그래 나도 살짝 미쳐 보는 것이다. 달리기뿐만 아니라 내가 해야만 할 일들에 대해서 살짝살짝 미쳐 보자.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교사로서의 길. 달리기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에 겹지만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나가자. 힘들 때 달리기를 같이 시작했던 10여 명의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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