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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주마간산 중국 여행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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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살 2007. 9. 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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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간산(走馬看山) 중국 여행기 :여섯째 날 (2002년 8월 18일 일요일)


서호(西湖) -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일요일이다. 한국처럼 중국에서도 일요일에는 관광지가 더 붐빈다고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인파에 밀려 구경도 제대로 못한다고 하여 일찍 서호로 갔다.

서호의 북서쪽에 고산(孤山)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그 산에서 송나라 때의 은둔 시인 ‘임포’가 홀로 숨어 살았다. 초당 주위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을 기르며, 학이 나는 것을 보고 손님이 찾아오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포를 두고,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데리고 있다(梅妻鶴子)’고 했다. 가끔씩 서호에 조각배를 띄워 놓고 그윽한 정취에 흠뻑 빠져 세상의 명리를 잊었다고 한다.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호의현상이 반공에 소소 뜨니, 서호 옛 주인을 반겨셔 넘노는 듯’이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로 붐벼 그윽한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서호는 원래 항주만을 통해 바다로 흘러나가는 전당강의 포구였던 곳을 송나라 시대에 진흙과 모래로 둑을 쌓아 인위적으로 조성한 호수이다. 지금은 중국의 10대 명승지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정경을 자랑한다. 일명 ‘서자호(西子湖’)로도 불리는데 소동파가 서호의 아름다움을 월나라의 이름난 미인이자 오나라를 망하게 했던 항주의 여인 서시에 빗대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시간과 계절, 날씨에 따라 각기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서호라고 하지만 스모그 같은 얄푸른 안개가 끼어 전망이 별로 안 좋았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시간이 있다면 백낙천이 쌓았다는 백제와 소동파가 쌓았다는 소제를 유유히 걷고 싶었다. 호수와 나무들로 꿈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일정에 쫓겨 사진 몇 장 찍고 그냥 지나치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


영은사

영은사는 동진 때인 326년 인도의 승려 혜리가 창건했으며 중국 선종 10대 고찰 중의 하나이다. 경내로 올라가면서 작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기암괴석과 수많은 석불을 품고 있는 산이 있다. 혜리가 이 산을 보고 '인도에 있는 영취산의 한 봉우리가 이리로 날아온 것 같다'고 감탄했다고 해서 비래봉(飛來峯)이라고 한단다. 석불에 예배드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경내로 들어서면 한쪽 발을 들고 있는 거대한 사천왕상을 볼 수 있다. 다른 절의 사천왕은 마귀를 짓밟고 있는 모습인데 영은사의 사천왕상은 그 모습이 특이했다. 빈농 출신으로 17살 때 중이 된 명나라 시조 주원장이 이 절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이다. 경내를 청소하다가 사천왕에게 바닥을 쓸 게 발 좀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사천왕이 보니 나중에 황제가 될 인물이라 발을 들어 주었다. 청소를 마치고도 주원장이 발을 내려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아 사천왕은 지금껏 발을 들고 있단다.

대웅보전 안에는 높이 19.6m의 거대한 금도금 석가모니상도 있다. 절의 규모와 불상의 규모에 맞게 예불 의식도 거침없었다. 우리는 작고 가는 향 한두 개를 공양드리는데  중국에서는 한 다발씩 통째로 불살라 공양드리고 있었다.

서서히 아담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일기 시작한다.


용정차

점심을 먹고 차로 유명한 용정촌으로 갔다. 단순히 쇼핑을 위한 여정이었다. 안내된 건물로 들어가니 차를 나누어 준다. 차를 따르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깜찍하게 생긴 아가씨가 차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애교가 철철 넘친다. 말만 들어도 사주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한국차는 손으로 비벼 덖기 때문에 영양소가 파괴 되지만 용정차는 120도가 넘는 온도에서 손바닥으로 눌러 덖기 때문에 영양소가 그대로 유지되고 향기도 좋다고 한다. 실제로 찻잔에 있는 녹차를 보니 순이 그대로 퍼져 있다. 그 잎은 그냥 씹어 먹어도 되고 비빔밥에 같이 넣어 비벼 먹어도 좋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이 날씬한 이유는 차를 많이 마셔서 그렇다고 한다. 눈의 피로를 푸는데도 효과가 있어서 이곳에서 안경을 낀 사람들이 없다고도 한다. 일등품으로 두 캔을 사니 덤으로 조그만 캔 하나를 더 준다. 우리 돈으로 8만원 정도했다.

쇼핑을 마친 후 육화탑으로 향했다.


육화탑(六和塔 )- 바닷물의 대역류

육화탑은 전당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세운 탑이라고 한다.

전당강은 해마다 음력 8월 18일(양력으로 대개 9월 23일경) 전후로 일어난다는 바닷물의 대역류 현상으로 유명하다. 이 현상은 전단당(錢塘江)의 모습이 나팔처럼 생겨서 일어난다고 한다. 강 입구에서는 100Km에 달하는 너비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급격히 좁아져서 육화탑 부근에서는 고작 2Km에 불과할 정도로 좁아진다. 게다가 태양과 달의 인력의 영향을 받아 만조 때가 되면 엄청난 대역류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때가 되면 시속 25㎞, 높이 3∼4m의 거친 파도가 육지를 덮쳐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이 모습을 "일만 마리의 말이 동시에 내달리는 것 같고, 산악을 늘어놓는 것 같으며 소리는 천둥치는 것과 같다."고 경외감을 나타냈다.

육화탑은 달리 육합탑(六合塔)이라고도 하는데 육합이란 천지와 사방을 뜻하는 말고 곧 우주를 가리킨다. 우주의 힘을 빌려 강의 범람을 막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육화탑 앞에는 화난 표정으로 전당강을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상이 있다. 그 소년의 이름이 육화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년의 부모는 전당강가에서 살았다. 어느 날 강의 파도에 휩쓸려 죽는다. 화가 난 소년은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강에 돌을 던졌다. 떨어지는 돌 소리에 짜증이 난 용왕이 신하에게 물었다. 신하가 육화의 사정 이야기를 고했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가 된 용왕이 소년을 불러서 물었다. 어떻게 하면 더 이상 돌을 던지지 않겠느냐? 소년은 전당강의 파도를 더 이상 일으키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용왕은 자신의 생일인 8월 18일만 파도를 일으킬테니 그만 돌을 던지라고 제안하자 소년이 이를 받아들인다. 일설에는 그 소년의 이름을 따서 육화탑이라 한다고도 한다.

우리 고등학교 국어(하) 교과서에 실려 있는 용비어천가 제67장 전절에도 전당강의 파도와 관련된 고사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전당강의 파도는 옛부터 유명했나 보다. 육화탑을 떠나 우리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상해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성 중에 하나라는 절강성의 성도이자 월나라의 수도였던 항주를 떠나면서 상념에 빠져 들었다. 오자서, 손무, 합려와 부차, 범려와 구천, 서시, 서시빈목(西施矉目), 효빈(效顰), 오월동주(吳越同舟), 오월쟁패(吳越爭覇), 와신상담(臥薪嘗膽) 등등 그들의 욕망이 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도로가 일직선으로 쭉쭉 뻗어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창밖의 풍경을 보니 가이드의 말처럼 이곳은 농촌이 더 잘 사는 것 같다. 짙푸른 들녘 사이사이로 나타나는 집들이 우리 농촌의 집들보다 더 좋아 보였다. 중간 중간에 양어장도 많이 보이고 특히 오리떼가 많았다. 중국 사람들은 오리고기를 무척 좋아하나 보다.

중간에 가이드가 북한의 나진 · 선봉 지구에서 느꼈던 비참한 심정을 이야기할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려왔다.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주의의 해독이 얼마나 강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상해

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드디어 중국 제1의 도시 상해에 도착했다.

중국의 들녘이 시원시원한 느낌을 준다면 도시는 고층 건물들로 어쩐지 답답한 느낌을 준다. 소수 민족 태족이 경영하는 태가촌이라는 곳에서 민속 공연을 보며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서커스 관람을 갔다. 어른들이 하는 교예라 힘이 있어 보였다. 특히 둥근 철망 안에서 세 명이 벌이는 오토바이 묘기는 정말 아찔했다.

관람 후 외탄 관광을 나섰다. 상해시는 같은 양식의 건물은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외탄은 다양한 형식의 건물이 모여 있어서 ‘세계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황포강을 따라 긴 제방이 있고 그 옆의 도로를 끼고 각기 다른 양식의 건물이 죽 늘어서 있다. 황포강 건너(포동 지역)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동방명주탑이 찬란한 조명 속에 우뚝 솟아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황포 공원에는 중국 제1대 상해시장인 진의(陳毅)의 동상이 있었다. 대장정과 제2차 국공내전의 영웅이었으나 문화대혁명 때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공산주의 혁명가. 상해가 외국의 조계로 있었을 때 황포 공원에는 ‘중국인과 개는 출입을 금함’이라는 푯말이 있었다고 한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는 굶어 죽은 중국인의 시체가 항상 떠 있었다고 한다. 중국인의 미래를 지켜주겠다는 듯 이제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있는 진의. 상당히 무게감이 있어 보였다.

외탄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틀 전에 묵었던 호텔이지만 새벽 세 시에 비몽사몽간에 들렸던 호텔이라 낯이 설었다. 프런트에서 방 열쇠를 받고 잠시 내일 일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피곤하기도 하고 거기 가야 볼 것도 없으니 홍구 공원을 빼고, 졸정원을 보았으니 예원도 빼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야할 곳은 반드시 볼 것 많은 화려한 장소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라한 모습에서도 숨겨진 의미를 찾고 정신적 기백을 느껴야 한다며 홍구 공원만큼은 꼭 가자는 의견이 있었다. 가이드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 결국 원래 일정에 따르기로 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

다른 곳 같았으면 밖으로 나가 환락의 시간을 보냈겠지만 사회주의 국가인 이곳에서는 밤 문화에 대한 정보가 없어 얌전히 방안에서 술이나 홀짝거리며 보냈다. 이국의 밤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괜히 쓸데없는 술판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