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의 탈출!
모든 이들이 일터로 떠난 토요일 오전 9시경. 한여름의 햇살 속에서 오어사는 한껏 고즈넉했다. 이따금씩 햇살을 흔들어 놓는 새소리가 한가롭다. 퍼져 나가는 소리의 파장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가 닿는다.
햇살에서도 그리움이 배어 나온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팠던 어린 시절, 가족들이 모두 일터로 떠난 뒤 햇살 때문에 늦잠에서 깨어나던 그 어느 날 아침의 울고 싶을 정도로 텅빈 외로움이 그리움으로 되살아 난다. 그때의 허기짐으로 무엇을 찾아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는지. 생각해 보면 어리석음뿐이었다. 나직이 읖조려 본다.
쫓기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 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 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 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틈에서 피어난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 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기도/정채봉
처음 이 절과 인연을 맺은 것이 대학 4학년 때이니까, 제법 오래 되었다. 그 때는 절보다 오히려 연못이 더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오어사는 내 기억 속에 '괜찮은 연못가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만 절' 정도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1년전 여름, 자장암을 한 번 올라가 보고는 생각을 바꾸어야만 했다. 본사에서 2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자장암에서 바라본 풍경은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내 가슴을 활짝 열어 주었다. 등뒤로 보이는 포항시내의 모습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으로 펼쳐진 본사의 아늑한 자태, 그리고 연못, 산, 산, 산,........ 참으로 조화로운 모습이었다. 내친김에 딸아이의 손을 잡고 원효암까지 갔다 왔을 때 오어사는 내 가슴속에 오롯이 들어와 앉아 있었다.
여러 번 오어사를 찾아 왔었지만 그때마다 내가 본 것은 그것의 극히 일부분뿐이었다. 그 작은 부분을 보고 전체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온 나의 무지가, 불과 200여 미터 거리에 새로운 세상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친 나의 무딘 감각이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내 삶 전부가 그러했다. 나의 제한된 시각에 비친 세상이 전부인 줄만 알고 살아왔다. 내 시각의 형편 없음을, 내 사고의 저급함을 자장암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마음만은 한없이 뿌듯했다.
그 때의 느낌이 이 글귀를 대하니 다시 살아 난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성급한 마음으로 헛되이 보내 버린, 이제 그 끝자락이 보이는 내 젊음의 나날들. 오어사 대웅전 마당 한 구석의 게시판에 걸려 있는 이 글귀를 읽으면서 위안을 받는다.
"그 동안 너무 급하게만 달려 왔다구. 이젠 주위에 눈도 좀 줘봐. 먼 길 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는 법이야. 먼 길 가는 사람은 길 자체를 사랑해야 해. 먼 길 가는 사람은 꿈 꾸면서 걷거든."
1996년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