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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순신의 전사와 자살설에 대하여-박혜일

역사/한국사자료실

by 빛살 2007. 9. 9. 19:46

본문

李舜臣의 戰死와 自殺說에 대하여

박혜일


몽떼스키외는, 영웅과 위인에게는 자기 뜻에

따라 자살할 권리를 인정하여, 누구든지 자

신의 비극의 제5막의 막을 스스로 원하는 순

간에 내려 마땅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괴테, ‘시와 진실’Ⅲ)


1. 머리말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나라가 임진왜란(1592~1598)이라는 민족존망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바다를 제패하여 전세를 만회한 구국충정의 영웅이다. 백전백승,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왜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그의 신출귀몰한 전술과 그 높고 높은 승전기록의 이면에는 갑옷과 전대(戰帶)를 끄르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진췌(盡瘁)의 나날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바다에서 왜적을 무찌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나, 다른 한편 모여드는 피난민들을 수용, 그들을 위한 영농대책 마련에도 온갖 힘을 다했던 것이다. 또 큰 부상도 당했다. 그는 사천(泗川) 선창 싸움에서 중상을 입은 후 유성룡(柳成龍)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접전할 때에 스스로 막지 못하고 적의 철환(鐵丸)에 맞아 비록 사경(死境)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깊이 어깨뼈를 상하였습니다. 그런데다 연일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連日着甲) 상처구멍이 헐어서 궂은 물이 늘 흐르고 있어, 밤낮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으나 아직 낫지를 않아 민망스럽습니다.”


그는 한산도(閑山島)의 달 밝은 밤이면 시를 읊고 감상에 잠겨 외로운 마음을 달랬으며, 또 새삼 전란 후의 자신의 삶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것이었다. 영의정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충민사기(忠愍祠記)’에서 이순신이 평소에 하던 말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전하고 있다. 즉, “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 쓰일진대 죽기로써 진력할 것이며,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족하다. 권세에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노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다.” 또 그는 임진왜란 초반의 진중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 있다.


無題 (2)

(……)

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갑옷에 엉기고

산과 바다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말을 풀어 華陽으로 돌려보내면

幅巾 쓴 처사 되어 살아가리라.


즉 사명을 위해서는 신명을 다하며, 전란이 평정된 연후에는 복건 쓴 처사(원문은 ‘枕溪人’)로서 들에서 살겠다는 것이 그의 오래된 소망이었다. 침계인이란 세상을 피하여 은둔했던 晋나라의 손초(孫楚)를 가리킨다. 이순신이 유유자적한 삶을 그리던 심중은 정읍(井邑) 현감으로 있을 당시 정랑(正郞) 현덕승(玄德升)에게 써 보낸 해학풍자의 역설적 표현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산이 높아 하늘이 멀지 아니하고 물이 맑아 신선을 금방 만날 듯하다 하시니 참으로 느껍습니다.(……) 나와 같은 속된 관리는 그저 분주하기만 하여 함께 구경할 길이 없으니 나에게 ‘신선의 연분이 없다(我無仙分者)’고 조롱하던 그 말씀이 참으로 정확한 평론이었습니다. 과연 우습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던 침계인의 염원은 전쟁이 끝나는 날을 기다릴 여지도 없이, 이미 그 이전에, 그것도 왜군의 정유재침과 때를 같이하여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 동족의 모함과 박해, 그리고 조국에 배신당한 비극의 영웅 이순신은 그 엄청난 참변을 몰고 온 임진왜란이 종막을 내리던 마지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전사는, 그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 하는, 이른바 의(擬)자살설을 낳게 되었다. 즉, 이 설은 7년 전란의 위태로운 전투를 수없이 치르면서도 그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한번도 패함이 없었던 그가 자기 몸을 보전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뿐더러, 또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에서는 왜 구태여 갑옷을 벗고(免冑) 선봉에 나섰던가 하는 등의 의문에서 발단된 것이다. 그의 전사는 이미 동시대인들에게는 충분히 예감되었던 죽음이었다.


2. 露粱海戰과 이순신의 전사

1598년(戊戌) 8월 19일(일본력 18일), 토요또미(豊臣秀吉)가 일본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병사하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서두르게 되었다. 順天을 철수하는 왜장 코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陳璘), 그리고 조선의 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일축해버렸다. 진린과의 의견 대립이 불가피하였으나, 이순신의 상황판단과 설복에 따라 명나라 수군도 합세하게 되었다.


드디어 그는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 해남현감 유형(柳珩),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男), 군관 이언량(李彦良), 송희립(宋希立) 등 역전의 휘하 장령들과 함께 출전하였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부총병(副總兵) 등자룡(鄧子龍)과 진잠(陳蠶) 그리고 여러 유격장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이에 합세하였다.


약 500척의 조·명(朝明)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왜교(倭橋, 지금의 新城)의 봉쇄를 풀고 급히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 새벽 2시경, 사천의 시마즈 오시히로(島津義弘), 남해에 있던 무네 요시도시(宗義智), 固城의 타찌바나 토우도라(立花銃虎), 부산의 테라자와 마사시게(寺澤正成) 등 여러 왜장이 합세한 500여 척의 왜함대와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이게 되었다. 왜수군은 순천의 왜장 코니시를 구출하기 위해 이곳으로 집결했던 것이다. 해전은 춥고 달 밝은 밤의 전투였다. 각종 화포를 쉴 새 없이 발사하고, 불화살을 날리고, 잎나뭇불(薪火)을 마구 던지는 등, 치열한 야간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날은 밝기 시작하였다. 이 마지막 해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은 진두지휘 끝에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H.H. 언더우드는 이 이순신의 최후를 “승리를 완전히 감지하고 임종을 맞이하는 바이킹의 죽음”에 비유하고 있다.


이 해전에서 이영남, 방덕룡(方德龍),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의 부장이 전사하였고, 해남현감 유형, 군관 송희립 등이 중상을 입었다. 임진년에 귀선돌격장(龜船突擊長)으로 활약하던 이언량도 이 싸움에서 최후를 맞은 것 같다. 그리고 명나라 수군의 70세 노장 등자룡도 전사하였다. 전과는 태워버린 적선이 200여 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란 이래 최대 규모의 격전이었다.


이순신의 전사 상황을 살펴보면, 이에 관련된 당시의 모든 기록이 참전자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전해진 구전(口傳) 자료에 의거하여 가필(加筆), 재구성된 것이므로 표현과 내용에 있어서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우선 “날아오는 유탄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로 관통하였다.”(‘懲毖錄’), 또는 “문득 나는 총탄이 순신의 왼쪽 겨드랑이(腋)를 뚫고 지나갔다.”(‘宣廟中興誌’) 등으로 그 사실이 확정되어 있는 부분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상황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순신은 19일 새벽(시계가 트였을 무렵) 지휘 독전(督戰) 중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적의 탄환을 왼쪽 가슴에 맞아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사람들이 급히 그를 방패로 가리었으며,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절명하였다. (심장을 다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중 '순신역전' - 이순신의 전사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시신은 급히 선실로 옮겨졌으며, 기함(旗艦)의 지휘 독전의 기능은 그대로 발휘되었다. 모두가 고인의 뜻을 받들어 일사불란하게 소임을 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통제사의 전사후 지휘 독전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여 공을 세운 사람이 누구인가를 거명함에 있어, 각 기록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회(李薈), 또는 이완(李莞)이 독전하였다는 설 : 이순신의 유언에 따라 그의 맏아들 회가, 또는 그의 조카 완이 독전했다는 주장이다. 즉, “그 때 그의 아들 회가 배에 있다가 부친의 분부를 따라 북을 울리고 기를 휘둘렀다.”(‘亂中雜錄’), 또는 “순신의 조카 완은 본래 담략과 국량이 있는지라, 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이라 이르면서 싸움을 독려하기를 급히 하므로 (……)”(‘懲毖錄’) 등의 내용이 그것이며, 특히 정랑 이분(李芬, 이순신의 조카)은 그가 쓴 ‘행록(行錄)’에서 “오직 공을 모시던 종 금이(金伊)와 회, 완 등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이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군관 송희립이 독전하였다는 설 :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 기술한 ‘露梁記事’에는 당시의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즉, “송희립이 이마에 적탄을 맞아 갑판 위에 기절했는데, 공이 이말을 듣고 크게 놀라 몸을 들다가 그도 또한 적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었다. (……) 고인의 아들 회가 곡하는지라 희립이 부하 몇 사람에게 부축케 하고 그의 입을 막아 울음소리가 나지 않도록 한 뒤에 공의 갑옷을 끄르고 시신을 홍전(紅氈)으로 싸게 하였고, (……)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면서 더욱 급하게 독전하니, 적선은 크게 패하여 (……)”라는 내용이며, 송희립이 대첩(大捷)을 이룬 뒤에 그 공으로 전라좌수사가 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隱峰野史別錄’). 이형석(李泂錫)의 ‘壬辰戰亂史’는 이 기록을 채택하고 있다.


편장(褊將) 손문욱(孫文彧)이 독전하였다는 설 : 이 설은 ‘선조실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사신이 가로되 (……)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배 위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 孫文彧의 오기)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또 “도원수 권율(權慄)이 장계하기를 (……)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에 다행히 손문욱 등이 마침 지혜 있게 처리하여 죽음으로써 싸웠사온데 문욱이 친히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살펴보며 지휘 독전하였습니다.” 등의 기술 내용이 그것이다. 같은 내용이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의 ‘자해필담(紫海筆談)’에도 수록되어 있다. - 손문욱은 이전에 왜군 진영에 있다가 후에 귀순하여 이순신의 휘하에 있었고, 종전 후에는 통역관으로 대일외교에 이바지한 인물로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논공에 민감한 세 가지 주장이 부수적인 상황의 각색으로 크게 엇갈리고 있으나, 이순신의 전사 이후 적어도 대여섯 시간이 전투가 계속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북치고 깃발 흔드는 일만 하더라도 위의 네 사람만으로는 사실상 역부족이 아니었겠는가 한다. 이 대목에 대하여, 비록 저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1618)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전말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평가되는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는 “부하 장병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이순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곡성을 내지 않고, 그대로 장수기를 가지고 독려했다. 유형과 송희립은 모두 총탄을 맞아 신음하다가 다시 일어나 상처를 싸매고 싸웠다.”라고 마무리함으로써 여타의 구전을 근거로 한 추리를 배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이순신의 전사에 얽힌 화제로서 가장 비통하고도 심상치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면주(免冑)의 전설인 것이다. 숙종 때의 문신 이민서(李敏敍)가 “이순신은 싸움에 임하여 갑옷을 벗고 스스로 탄환을 맞고 죽었으니”라고 거리낌 없이 씀으로써 면주 전설에 대한 논의도 더욱 표면화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면주의 비화는 필시 고인의 전몰 당시에 비롯된 것이겠으나, 서로 꺼리어 이 엄청난 일을 감히 문자로 수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난후(亂後)의 조정은 이순신에게 선무일등공신을 추서하는 등 사후의 영광을 베푸는 일로 체제의 명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3. 숙종대에 정착된 이순신 자살설

이순신의 350주기를 맞던 해방 후 5년, 이병기(李秉岐)는 이순신 문학의 평가에 이어 “충무공이 노량전에서 탄환을 맞고 임종한 것은 그 후 숙종조 영의정 이여(李畬)가 이를 공이 자처한 것이라 함도 퍽 현명한 견해였다.”고 언급함으로써 자살설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震檀學會 編, ‘李忠武公’ 1950). 또 천관우(千寬宇)는 관계 자료를 두루 살펴 “충무공이 죽음은 과연 전사이런가, 전사를 빌린 자살이런가, (……) 그저 하늘이 그날 그 곳에서 충무공을 불러 갔을 따름인가.”라고 표현함으로써 새삼 자살설 논의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李舜臣論’, ‘世代’, 1963년 9월호). 또한 김경탁(金敬琢)은 그의 저서에서 “충무공은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대첩을 올릴 때부터 마땅히 죽어야 할 때와 장소를 항상 모색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맺고 있다(김경탁, ‘충무공의 연구’,1968). 그리고 석도륜(昔度輪) 교수는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유형의 ‘행장’이 전하는 자료에서 “이순신이 이락포(李落浦) - 노량해전에 있어서 적탄을 자초하여 전몰하였다.”, 또 “전신 노출로 적과 더불어 죽음을 같이 했다.” 등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순신이 선택한 죽음의 의미를 거듭 되새기고 있다.(제15차 藝集磊苴 同人展 跋文, 1992년 6월).


이상으로 면면히 전해온 이순신 자살설(이순신의 전사에 의한 자살설)이 해방 이후 최근까지도 끊임없는 관심과 공감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자살설이 숙종대에 이르러 한 가지 기록으로 정착됨에 따라 일각의 거부 반응을 초래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면 자살설의 주요 관점과 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차이는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던 것일까? 그 까닭을 여기서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숙종 때 이조·예조·호조 판서를 역임한 이민서(호는 西河, 1633~1688)는 당파싸움으로 나라를 망친 역사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당시 송강(松江, 鄭澈)과 우계(牛溪, 成渾, 1535~1598)가 모두 당쟁의 화를 입은 시초였으며, 의병을 일으킨 김덕령(金德齡) 장군도 무고를 당하여 체포되어 생사의 갈림길에 선 가운데 여러 장수들이 꺼리고 질투하는 바였고, 또한 권세 있는 사람들이 안에서 그것을 도왔기 때문에 드디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 장군(김덕령)이 죽은 이후부터는 여러 장수들이 모두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 회의를 품었고, 또 제 몸을 보전하지 못했던 바, 곽재우(郭再祐)는 드디어 군사를 해산시키고 은둔했으며, 이순신도 싸움에 임하여 갑옷을 벗고 탄환에 맞아죽었으니(李舜臣方戰免冑自中丸以死), 호남과 영남의 부자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 경계하였다.”(이민서 撰, ‘金忠壯公遺事, 권3, 14면). 이민서가 남긴 이 불후의 역사 비평은 당시의 풍토적 현실 논리를 적나라하게 집약, 평가함으로써, 이순신의 죽음의 선택(즉, 자살설)도 하나의 필연적인 사건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또 숙종조의 영의정 이여(1645~1718)는 이순신의 전몰 114년 후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죽임에서 벗어나온 뒤로는 공이 클수록 용납되기 어려움을 스스로 알고, 마침내 싸움에 임하여 자기 몸을 버렸으니, 공의 죽음은 본시 작정한 바라고들 하는데, 그 때의 경우와 처지로 본다면 아마도 그 말에 비슷한 바가 있음직하다.”-이여는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던 이순신의 투옥사건과 그 이후의 그의 심중을 깊이 헤아리는 바 있어 세간에서 이르는 이순신 자살설에 동조하고 있다.


한편, 판부사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은 이순신 장군을 조상한 글 ‘조이장군(弔李將軍)’에서 “또 의심하되 장군은 그러한 기미를 미리 알았을 것이라 하여 마침내 갑옷을 벗고 적중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하나, 나는 장군의 마음을 본시 알고 있는 바, 어찌 닥쳐올 화를 겁내어 자기 생명을 가벼이 하였겠는가.”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 또 우윤(右尹) 맹주서(孟冑瑞, 1622~?)도 노량에서 올린 ‘노량조이통제(露梁弔李統制)’에서 자살설에 대한 회의(懷疑)를 암시하고 있다. 즉, “본시부터 그 한 죽음 뜻이 있거니, 뒷사람이 그  까닭을 어이 알리오.”


위에 인용한 숙종대의 기록들은 이순신 자살설이 난 후 근 100년 가까이 이어온 뿌리 깊은 주장임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다. 한편 자살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 관해서는 그 경위를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것이 없으나, 이이명과 맹주서가 써 올린 조문(弔文) 내용만으로도 일부 자살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지니는 인식 차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이명의 글에 따르면, 본시 그가 믿는 바의 이순신은 (즉, 그 인품과 그 정신으로 미루어) 자신에게 닥칠 일신상의 불행에 구애되거나, 절망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롤 죽음을 택할 그러한 위인이 아니라는 뜻인 것으로 보여진다. 아마도 이 같은 주장이 자살설에 대한 일부 거부감에 공통된 시각이 아니었을까 한다. 즉, 그것은 이순신의 인품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 이이명 또한 이순신을 추앙함이 지극한 사람이었으나, 후일 65세에 신임사화(辛壬士禍, 경종 1~2년)로 인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인물이다.


4. 이순신의 투옥으로 개막된 정유재침

앞 절에서 짧게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민서의 이순신 자살설은 동서분당의 망국적 과거사에 대한 역사 비평의 일환으로 천명된 것으로써, 그의 비판적 시각의 단호함을 여실히 나타내주고 있다. 이와 같은 외재적(外在的) 해석이 자살설 성립의 당위성을 설득력 있게 밑받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에 연계하여, 당사자의 처지로부터 설의 타당성을 음미하는- 즉 고인의 내적 생활의 변모 과정을 헤아려보는-이른바 내재적(內在的) 비판이 당시로서 미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쉽다. 이순신의 사후 200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간행되기 이전까지는 그의 일기(‘난중일기’)를 위시한 여타의 관계기록을 직접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탓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다음 절에 이어질 자살설의 내재적 비판에 대비하여, 정유재침 전후의 내외 상황과 옥사(獄事) 이후의 이순신이 겪는 파란만장의 정유(丁酉)년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정유재침의 전 해인 1596년(병신) 7월, 의병장 김덕령은 이몽학난(李夢鶴亂)에 무고되어 도원수 권율의 밀사 성윤문(成允文)에 의해 포박, 투옥되었다. 그는 전후 6차의 골육이 부서지는 국문 끝에 “신에게 딴 뜻이 있었다면 당초 원수가 오라고 할 때, 왜 운봉(雲峰)에 갔으리까. (……) 신은 이제 모든 일이 끝났으니 또 무엇을 말하리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외다.”란 말을 남기고 절명(絶命)하였다 한다.(‘昭代紀年’ 권지13, 宣祖朝 6 외). 판중추부사 정탁(鄭琢)과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구명에 힘썼으나, 그는 이미 죽었다.


― 정유재침의 전 해인 1596년 10월, 강화(講和)가 결렬된 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머물고 있던 통신사 황신(黃愼)의 숙소를 찾은 통사(通事, 통역) 요시라(要時羅, 要次郞, 본명은 梯七大夫)가 다음 공격은, 즉 정유재침은 전라도부터라고 귀띔해주었다 한다. 본래 요시라는 왜장 코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의 부하 간첩으로, 때로는 실전에도 참여했으며,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 등 조선 측 요인들과 친밀했으나, 후일 남원에서 체포되어 명나라에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고 한다. 또는 그 스스로가 명나라로 망명했다는 설도 있다.


― 역시 같은 해인 1596년 11월, 이순신에 대한 원균(元均)의 중상모략이 조정내의 분당적 시론으로 거세게 일고 있을 무렵, 왜장 코니시 유끼나가의 막하 간첩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을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었다. 그는 “카또오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오래지 않아 다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그날 조선 수군의 백전백승의 위력으로 이를 잡아 목을 베지 못할 바 없을 것인즉, (……)” 하며 간곡히 권유하였다. 이 요시라의 헌책(獻策)이 도원수 권율을 거쳐 조정에 보고 되자, 조정 또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그의 계책에 따를 것을 하명하였다. 이 무렵 병사 김응서는 요시라에게 의관(衣冠)을 준비하여 숙배(肅拜)케 한 후 벼슬 주는 것을 허락하고, 또 은자(銀子) 80냥을 상으로 내리는 등 조정의 후한 뜻을 전하여 그를 크게 대접하고 있다. (후일, 명량대첩으로 이순신에게 하사된 것은 은자 20냥에 불과하였다!)


― 드디어 1597년(정유) 1월 21일, 도원수 권율이 한산도로 나아가 요시라의 계책대로 하라는 명을 전하였으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것이 필경 왜군의 간교한 유인책일 것이 분명하여 함대의 출동을 자제하였다. 도원수가 육지로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웅천(熊川)에서 알려오기를 “지난 정월 15일에 왜장 카또오(加藤淸正)가 장문포에 와 닿았다” 하였고(李芬, ‘行錄’), 일본측의 기록에 따르면 정월 14일(일본력 13일) 카또오는 서생포(西生浦, 울산 남쪽)에, 나베시마(鍋島勝茂)는 죽도(竹島)에 각각 상륙한 것이 사실이었다. 즉, 왜장 카또오는 도원수 권율이 독전차 한산도에 내려오기 7일이나 이전에 이미 상륙했던 것이다.


이 같은 왜군의 반간책(反間策)은 원균이 통제사가 된 후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도되어, 거듭 적중되었던 것이다(柳成龍, ‘懲毖錄’). 즉, 왜측의 반간계가 왜장(코니시 유끼나가) - 왜간첩(요시라) - 병사(김응서) - 도원수(권율) - 조정(선조)의 순서로 전달 보고 되면, 조정은 도원수로 하여금 한산도에 내려가 통제사에게 왜측의 계책대로 하라는 명을 하달, 독전케 하는 방식이었다. 이들 기록이 그대로 사실이라면 다가올 조선 수군의 궤멸은 양국간의 합작이라 하여 마땅할 것이다! - 왜장을 놓아주어 나라를 저버렸다“는 치열한 모함으로 파직(罷職)된 이순신은 군량미 9,914석, 화약 4,000근, 재고의 총통(銃筒) 300자루 등 진중의 비품을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인계한 후, 2월 26일 함거(檻車)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이것이 이순신이 당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파직이었다. 가혹한 문초 끝에 죽이자는 주장이 분분하였으나, 이미 죄상의 규명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즉, 이 모두가 정치적 모살(謀殺)의 일종이었다.


옥중에서 어떤 이가 그를 걱정하자 그는 “죽고 사는 것이 천명인데, 죽게 되면 죽는 것(死生有命 死當死矣)”이라고 답했다 한다(이분, ‘행록’). 침계인(枕溪人)의 꿈은 죽음의 예각(豫覺)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판중추부사 정탁(당시 72세)이 올린 신구차(伸救箚, 구명탄원서)에 크게 힘입어, 백의종군(白衣從軍) 하명으로 죽음 직전에 간신히 특사되었다.


― 4월 초하루, 재옥 28일간의 옥고 끝에 석방된 이순신은 조카 외에도 여러 사람의 문안을 받았으나, 마음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즉, “옥문을 나서다. (……)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가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정유 4월 1일). 석방 후 이틀 만에 도원수의 본영이 있는 초계(草溪)로 백의종군의 길을 떠나야 했으며, 아산(牙山)을 거칠 때 어머니의 부고(訃告)를 받고 통곡하나, 죄인의 몸이므로 성빈(成殯-빈소를 만듦)하자마자 바로 떠나야 했다. 아들의 하옥으로 심병을 얻은 그의 어머니는 순천(順天)에서 아산으로 돌아오던 도중 4월 11일 배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난날 그의 어머님은 고마운 분이었다. “조반 후 어머님께 하직하니, 잘 가거라 하시며 나라의 수치를 크게 씻으라 하고 재삼 타이르시며, 이별하는데 조금도 언짢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갑오 1월 12일).


― 6월 초4일, 초계의 도원수 진영에 이르렀으나 도원수와 만난 것이 6월 초8일이었다. 오래간만의 대면이었다. 이순신의 초췌한 모습을 대하는 권율의 표정이 과연 어떠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조정의 중앙 세력이 보장하는 체제측 인사로서 이순신의 백의종군을 공적으로 받아들이는 덤덤한 표정으로 족했을 것이다(권율은 선조 초기의 영의정 權轍의 아들이며, 임진왜란 이래 병조판서로서 활약, 후일 영의정에 오른 李恒福의 장인이었다). 이순신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기구한 신분으로 병든 전마(戰馬)를 보살피고, 대전(大箭)을 다듬고, 무밭을 돌보는 등의 담담한 나날을 보냈으나, 달 밝은 밤이면 울음으로 지새우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吾何造罪至於此極耶).”(7월 10일)


― 7월 16일 야반,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는 칠천량(漆川梁)에서 왜함대의 기습을 받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패망하였다.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몸을 피했으나 추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한다. 전사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번에도 코니시·요시라의 계책이 똑같은 방식으로 적중한 것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었다면, 명색이 통제사인 원균을 곤장을 쳐서 출동케 한 도원수의 체통 잃은 독전이라 할 것이다. 수군의 참패로 전국에 치명적인 파탄이 초래되었으나, 조정도 도원수도 속수무책이었다. 책임을 묻는 사람도 없었고, 책임을 뉘우칠 양심은 더욱 없었다. 도원수 권율이 처음으로 이순신의 거처에 찾아왔다. 즉, “16일 새벽 수군이 밤 기습을 당하여 통제사 원균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많이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 하니 통곡이 터져 나옴을 이길 길 없다. 이윽고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할 바가 없다 하면서 10시 넘어까지 이야기하였으나, 어떻게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직접 해안 지역을 가서 듣고 본 뒤에 방책을 정하겠노라고 말했더니, 원수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정유 7월 18일). 이순신은 몇몇 사람을 데리고 그날로 지체 없이 출발, 가는 곳마다 고을의 관리들과 밤을 지새우며 대책을 논의, 안질(眼疾)에 걸리기도 했다. 그는 또다시 사명감에 묶이는 몸이 되었다. 일본 침략군은 바다의 승리에 힘입어 남부 일대를 거침없이 유린하고 있었다.


― 8월 3일, 이순신은 진주(晋州)땅 운곡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의 교서를 받았으나, 그는 배도 군사도 없는 매우 기이한 통제사였다. “성문들이 다시 열려, 새로운 이른바 재침의 일본군은 제멋대로 쳐들어왔다. (……) 참변을 당하자 모든 사람의 눈길은 이순신에게로 쏠렸다. 그는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지휘한단 말인가? 그가 모은 배는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H.H.언더우드)


― 8월 18일, 드디어 회령포(會寧浦)에 이르렀다. 즉, 칠천량에서 패해 온 숙명의 전선(戰船) 10척은 또다시 지난날의 영광을 다짐하며 낯익은 재임 통제사를 맞이하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군사들도 소식을 듣고 모여 들었다. 이순신은 곧 전선들을 살피고 서둘러 해남군 이진(梨津) 밑에 있는 창사(倉舍)로 이진(移陣)하여, 지체 없이 왜수군의 진로 전방으로 이동, 대치하던 첫날 밤, 식사도 못하고 앓아 눕게 되었다(8월 20일). 그는 일기에, 곽란상태와 인사불성에 이르기를 여러 번, 구토가 10여 차례, 몸이 냉한 탓인가 하여 소주를 마셔보기도 했다고, 또 뒤를 볼 수 없었다고 쓰고 있다.(이것은 내과 전문의의 소견에 따르면, 극심한 신체적 과로와 극도의 정신적 긴장에서 비롯된 일종의 신경성 위장 반응이며 ‘급성 위염’의 증상군에 속하는 병상이다.)


― 8월 24일, 병에 차도가 있자, 그는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맑음. 아침 괘도포(掛刀浦)에 이르러  밥을 먹고 낮에 어란(於蘭) 앞바다로 나왔다. 곳곳이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8월 24일). 배는 2척이 더 회수되었다. 즉, ‘상유십이(尙有十二)’! 비록 12척이나, 비로소 막강한 왜수군과 맞싸울 결의가 마련된 것이다. 이들 12척의 함대는 이미 지난날의 패기와 군율을 되찾아, 남해 서쪽 바다를 힘차게 누비고 있었다! 이순신은 산발적인 접전으로 차례로 후퇴하여 왜함대의 진로를 명량(鳴梁, 별칭 ‘울둘목’) 쪽으로 유인, 8월 29일 아침에는 명량의 문턱인 벽파진(碧波津)으로 이진하였다. 야습이 있었으나 격퇴하였을 뿐, 추격하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사명감뿐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음산하고 비가 뿌리는 날이면, 거듭 한스럽고 비통함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았다. 홀로 배위에 앉았더니 회포에 사무쳐 눈물이 흘렀다. 천지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자식놈(장자 薈)이 내 마음을 짐작하는지 몹시 언짢아했다.”(9월 12일). 싸움이 박두하였음을 가늠하여 “곧 전령선(傳令船)을 보내서 피란민들을 타일러 육지로 올라가게 하였다.”(9월 14일).


― 드디어 9월 16일, 이순신은 13척(해전 당일에는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지형이 험난하고 협소한 명량해협으로 200여 척의 왜함대를 유인, 격멸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살고, 살고자 하면 오히려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의 결의를 각 전선의 장령들에게 엄히 촉구하였고, 역조(逆潮, 배와 반대 방향의 조류)에서 사력을 다하여 왜수군의 해협 통과를 저지하였으며, 순조(順潮)를 맞이하자 일제히 진격함으로써 적선 31척을 깨뜨렸다. “적선들은 퇴각하여 다시는 우리 수군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정유 9월 16일). 은자(銀子) 20냥이 하사되었다.(왜간첩 요시라에게 내렸던 것이 은자 80냥).


명량대첩은 일본군의 서진북상(西進北上)의 전략을 결정적으로 좌절시킴으로써 7년 전란의 역사적 전기(轉機)를 마련한 임진년의 한산대첩(閑山大捷)과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하고 있으나, 명량해전은 동족의 박해와 역경을 이겨낸 이순신의 초인적 실존(實存)으로 치러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비극에는 틈이 없었다. 명량해전에 이어 수군의 재건에 여념이 없었을 때, 또다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왔다. 그의 막내아들 면(葂)이 아산을 습격한 왜적들과 싸워 전사한 것이다. 즉, “겉봉을 대강 뜯고 열(悅, 둘째아들)의 편지를 보니 외면에 ‘痛哭’ 두 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 놓아 통곡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쳤단 말이냐.”(10월 14일). 통제사는 전사한 아들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곡하였다.


― 10월 30일, 보화도(寶花島, 高下島)에 진지를 선정하고 수영(水營)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상으로 정유년의 약사를 줄인다.)



5. 이순신의 자살설에 대한 내재적 비판

앞 절에서는, 연극으로 꾸미기조차도 쉽지 않았을 이순신의 길고 긴 고난의 정유년을, 그리고 어찌하여 이순신이 비극의 영웅이 되었는가를 - 카타르시스적 감동이란 추호도 찾을 바 없는 망국적 비극 속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어 본 절에서는, 이순신 자살설을 전제로 한 내재적 비판의 보완으로서, 특히 정유년 이후의 1차 사료에 대한 재평가와 이해를 통하여 그 자신의 심적 변용(變容)의 자취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이순신의 사인(死因)은 엄연한 전사이며, 전사한 곳은 노량 남쪽의 관음포(觀音浦, 통칭 李落浦) 앞바다가 된다. - 그러나 그 전사는 이순신 스스로가 ‘미리부터 바라던 바의 죽음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다하는 자살설을 낳기에 충분하였다. 유형 장군과 명나라 수군의 진린 도독 등 가까이 지냈던 동시대인의 증언과, 이순신 자신이 적은 일기(‘丁酉日記’)의 글귀들이 그의 생전의 심중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다. 정유년 일기, 유형 및 진린의 증언을 차례로 각각 살펴보기로 한다.


이순신의 정유년 일기: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 없는 사실의 기록, 당일의 간지(干支)와 날씨, 꿈자리의 음미, 어머니 그리는 회포와 달빛의 감상(感傷), 병을 얻어 인사불성으로 신음하는 내용,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 그리고 끝으로는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일기로서, 그 기록 내용이 지니는 사료적(史料的) 가치는 물론이려니와, 그 시대와 더불어 살며 그 역사에 순직한, 하나의 내적 생명의 세계와 역사를 기록한 일기 문학의 극치이다.


특히 정유년의 일기는, 백의종군, 객지 노변에서 당하는 모친상, 명량해전의 극복과 셋째 아들 면의 전사 등, 옥사 이후 연거푸 닥치는 고난과 불행의 시련 속에서 누를 길 없는 한과 울분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늘을 원망하며 울부짖고 통곡하였다. 이미 그의 일기에는 절망과 죽음의 자각이 서슴없이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결벽(潔癖)에는 변함이 없었다. 정유년 일기에서 몇 구절을 살펴본다.


― 백의종군의 첫길에서 청천벽력같이 당하는 모친상. 그러나 여정을 재촉하는 금부(禁府)의 명이 급박하여 성빈(成殯) 후 바로 떠나야 했다. 즉, “궂은비. 배를 끌어 중방포(中方浦)에 옮겨 대어 영구(靈柩)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4월 16일). 그리고 “어머님 영연(靈筵)에 하직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으랴.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4월 19일). 또, “(……)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5월 5일). 또 이어 “(……)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만 아득한 저 하늘은 어찌하여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빨리 죽지 않는가(淚凝成血 天胡漠漠不我燭兮 何不速死也).”(5월 6일).


― 주위의 팽배한 부정부패에 대하여 “안팎이 모두 바치는 뇌물의 다소로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돈만 있다면 죽은 사람의 넋이라도 찾아온다는 말인가.”(5월 21일) 하고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또, “아침에 종들이 고을 사람들에게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기에, 종을 매 때리고 밥쌀을 도로 갚아주었다.”(6월 3일). 不正에 대한 분노가 이 같은 지나친, 병적인 결벽을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 막내아들 면이 아산을 습격한 왜적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10월 14일). 그리고 “(……) 새벽에 흰 띠를 띠고 향을 피우고 곡하였다.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10월 17일). 또, “(……) 어둘 무렵에 코피를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에 잠겨 눈물지었다. (……)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듯하여 누를 길이 없다.”(10월 19일).


즉, 피눈물로 얼룩진 정유년의 일기는, 자기 운명에 대한 한탄, 우울, 불면, 상처받은 자존심, 통곡,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비통한 심정과 울분의 기록인 것이다. - 즉, “(……)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心死形存 號慟而已 號慟而已). 하룻밤 지내기가 한 해 같구나(度夜如年 度夜如年 ).”(10월 14일). 극심한 과로와 정신적 긴장, 그리고 절망과 죽음의 강박관념 속에서 통제사의 심신은 나날이 침식되고 있었다.


이순신이 유형에게 남긴 말 : 정승 이덕형(李德馨)이 이순신에게 그의 부하로서 능히 그를 대신할 만한 사람이 누구겠느냐고 물었을 때, 유형 오른편에 나설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다 하며, 후에 다시 물었으나 이순신의 대답은 같았다고 한다. 유형(1566~1615) 장군은 후일 제5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다음 내용은 유형이 이순신의 막하 장수로 있을 때 직접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즉, “통제사 이공(李公)은 일찍이 마음 속을 토로하면서 말하기를, 자고로 대장이 만일 조금이라도 공을 이룰 마음을 갖는다면 대개는 몸을 보전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가는 그 날에 죽는다면 아무런 유감도 없을 것이다(吾死於敵退之日 則可無憾矣).” (柳珩, ‘行狀’)


진린이 이통제를 제사하는 글(祭李統制文) :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은 사납고 오만한 인물로만 알려져 있으나, 그는 4개월 동안 진(陣)을 같이함으로써 이순신이 천재와 인품을 가장 잘 알고 지냈던 유일한 타국인이다. 후일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李舜臣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하여 고사에서 인용한 최고의 찬사를 이순신에게 바치고 있다. 그는 이순신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슬퍼하였고, 장례에도 남다른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으며, 고인의 자제들을 친히 위로하는 예를 잊지 않았다. 또 이순신의 첫 장이였던 아산 금성산(錦城山)의 묏자리 선정에도 명나라 지관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독 진린은 이통제를 제사하는 글 ‘祭李統制文’ 속에서 “평시에 사람을 대하면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辱國之夫 只欠一死)’ 하시더니 이제 와선 강토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마저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시던고. 어허 통제여!”라 하여,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집착을, 따라서 그의 전사가 이미 예감된 죽음이었음을 서슴지 않고 애절하게 전해주고 있다.


또 다음과 같은 매우 인상적인 대화 내용이 남아 있다. 즉 도독 진린이 출전을 앞두고 “내가 밤에 천문을 보매 동방의 장수별이 희미해 가오. 옛날에도 기도한 사람(제갈공명)이 있었으니 당신도 부디 해보시오.” 하였더니 이순신은 “정성과 재간이 모두 옛사람만 못하거늘 기도하는 것이나 본뜬다 하여 무엇 하겠소.” 하였다 한다. 진 도독의 소박한 염려와 이에 대한 이순신 특유의 빗댄 답변이 재미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답변 형식이 삶에 대한 거부이자 죽음의 암시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이순신과 크게 다투기도 했으나, 함께 출동하면 언제나 이순신이 고마웠고, 술도 같이 마시며 (필담 또는 통역을 통하여) 한담을 나누던 도독 진린. 그는 이순신의 죽음의 암시를 읽으면서도 설마하고 지냈을 터이나, 마지막 출전 때는 하늘에 기도할 것을 권유했던 것이 아닌가. 그는 해전이 끝나자 통제사가 전사한 것을 알고, 배 위에 넘어지기를 세 번, 큰소리로 통곡하였다 한다.(이분, ‘행록’)


이상, 이순신의 정유년 일기, 유형의 행장, 그리고 진린의 제문 등, 이른바 1차 사료의 발췌와 그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하여 이순신의 전사의 의미를 - 그와 같은 죽음, 즉 사명을 마치는 마지막 해전에서의 죽음이 되기를 본시부터 소망하고 있었던 바의 그러한 죽음임을 - 관조(觀照)하는 자살설적(自殺說的) 시각의 공정함과 지당함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것으로 이순신 자살설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줄인다.


바. 맺음말

1592년(임진) 4월 13일 부산포 앞바다에 왜선단 출현, 14일에는 부산성이 함락되었고, 순변사 이일(李鎰)은 4월 25일 상주(尙州)에서, 도순변사 신립(申砬)은 28일 충주(忠州)에서 차례로 패배하였으므로 당황한 왕(宣祖)과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백성의 소리를 외면한 채 도성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도망길을 재촉하였다. 이어 5월 3일에는 서울이, 6월 17일에는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는 등, 불과 2개월 만에 조선의 강토는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피난 중인 왕은 수군의 승전보가 속속 올라 오고 있었으나, 그래도 불안을 견디지 못하여 명나라로 망명할 궁리에만 급급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명나라의 회답은 망명은 허락하되, 인원은 100명 이내로, 장소는 압록강 건너 관전보(寬奠堡)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국난극복의 묘안이란 재조번방(再造藩邦), 즉 제후(諸侯)의 나라가 멸망하려 함을 도와 구해줄 것을 종주국인 명나라에 애걸하여 원병을 청하는 길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모셔온 천병(天兵), 즉 명나라 군사들은 살인, 강간, 약탈 등의 범행을 왜적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자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평시에는 초야에서 글을 벗삼았던 낯선 이름의 의병장들이 민족의 정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과시하듯, 사재를 털어 곳곳에서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용감히 왜적에게 복수하였다.


또 한편 1593년(계사) 2월 12일, 전라순찰사 권율(權慄)이 거둔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육군으로서는 매우 희귀한 고무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전쟁은 '행주치마'와 같은 열성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남 장성(長城)의 변이중(邊以中, 召募使, 호는 望菴)은 사재를 써서 화차(火車) 300량(輛)을 만들어, 권율에게도 나누어 보내 행주산성의 전투를 도왔다. ('月沙集' 券之四十六, 墓碣銘), 그후 변이중은 화차 제작에 관련, 성경현전(聖經賢傳)에도 없는 기교와 재주를 부려 고약한 짓을 하였다 하여 조정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를 도울 사람은 없었다.


전란 발발 1년 6개월 만에 (계사 10월), 도망갔던 임금의 행차는 환도하였으나, "안팎이 모두 기근에 허덕이고, (…) 노약자는 병들어 누웠고, 장정들은 모두 도둑이 되고, (…)  더욱이 질병이 심하여 쓰러져 죽은 자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부자와 부부가 서로 뜯어먹기까지 이르렀다. 노천에 뒹구는 뼈만 짚단같이 늘어져 있었다."(懲毖錄) - 향후 전국의 소강기를 맞으며 자행된 의병에 대한 박해와 모살(謀殺) 등, 졸렬예악(拙劣穢惡)의 망국적 역사는 정유재침의 조짐에도 아랑곳없이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H.B. 헐버트는 한산대첩(閑山大捷, 임진 7월 8일)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대목에서 "일본 육군의 전력 보충과 보급을 차단, 무력화시킨 성과는 세계의 위대한 영웅 그 어느 이름도 미치지 못할 이순신의 충절과 천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특기하고 있으며, 또 "이 해전(閑山島 前洋海戰)은 실로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며, 중국정벌의 야욕을 분쇄시켰던 것이다. 그 후, 비록 수년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지만, 그것은 오직 히데요시의 실망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특히 한산대첩을 올린 이른바 학익진(鶴翼陣) 전법, 견내량(見乃梁)의 왜선단을 착실히 유인,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러 결정적인 순간에 180도 급선회함으로써 일제히 적을 덮치는, 그 일사불란한 함대운동(艦隊運動)은 이순신 함대의 연도(練度) 높은 훈련을 입증해줌으로써 해전사 연구가의 큰 평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이순신의 인격과 전술에 크게 매료되었을 일본의 제독 토오고(東鄕平八郞, 1905년 러시아 함대를 동해에서 요격하여 승리함)는 자신을 넬슨에 필적할 군신(軍神)이라 하는 하객의 축사에 대하여, "넬슨이라는 사람은 그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군신의 이름으로 불리울 참된 제독(提督)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순신만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순신에 비한다면 내 자신은 하사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답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토오고는 훈련에는 진력하였으나, 소위 T자 전법은 유명무실하였다 하는 최근의 분석도 있다.


끝으로, 통제사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흔히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이 있으나, 그것이 이순신의 경우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형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이전이나 이후거나 이순신임에 다름없는 존재이다. 즉, 시대는 그것이 요구하는 천재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여하히 많은 시대가 위대한 인간의 출현을 갈망하는가. 또, 그 희귀한 천재는 동시대와 동족의 박해를 무릅쓰고 스스로 과한 자기 사명을 여하히 완수하는가. 즉, 천재의 심적(心的) 생활의 보편성 내지는 초시대성(超時代性)은 그의 전생애 또는 각 시기를 통하여 나타나는 그의 일관괸 개성적 특징으로 잘 입증되는 것이다.


이순신 그 자신이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 짝이 없을 것이니, (…)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정유 5월 5일)라고 통탄하고 있는 것이 마음 아프나, 그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우함이기 이전에 한 불멸의 사람이 겪도록 타고난 보다 보편적인 불우함이 아니었겠는가 한다. 즉, "불멸(不滅)의 사람은 모든 시대의 고뇌(苦惱)를 경험한다."(K. 크라우스, '애퍼리즘')라고 한 표현은 과연 정확한 것인가. - 이순신, 그는 그의 충성과 그 청렴강직함이 죄의 시초가 됨으로써 거듭된 세 번의 파직, 두 번의 투옥 또 두 번의 백의종군 등, 이미 초사시절(初仕時節)에서부터 겪어야 했던 박해와 역경 속에서 변함없는 윤리적(倫理的) 자기 의식의 형성과, 자기 사명(使命)의 인식으로 자신을 지탱하였던 것이다. 그가 겪은 정유년의 수난 또한 그의 선택한 숙명이며, 그의 존재 자체였던 것이다.


그가 평소에 "나라에 쓰일진대 신명을 다할 것이며,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족하다. 권세에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를 노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다."(李恒福, '忠愍祠記')라고 한 내용이나, 그의 임진년의 작시(作詩)에서 "말을 풀어 화양으로 돌려보내면, 복건(幅巾) 쓴 처사가 되어 살아가리라(待得華陽歸馬後 幅巾還作枕溪人)."라고 읊은 내용은 모두 그의 솔직한 심정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 마땅할 것이다. 즉, 전란만 평정되면 관직을 떠나, 즉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난 연후에는 사명과 완벽(한결같이 지탱했던 그 완벽주의의 정신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들에서 "돌을 베고 시냇물로 양치하리라(枕石漱流)" 하는 침계인의 염원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침계인의 꿈은, 그가 그리던 자화상은, "적이 물러가는 그날에 (…) "(柳珩, '行狀'), 또는 "오직 한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只欠一死)"(陳璘, '祭李統制文') 하는 죽음의 암시로 변용(變容)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유년 일기는 석달 동안이나 간지(干支)의 기입이 틀려 있으며(이은상 역주), 별세한 무술년(1598)의 기록 일수는(남아 있는 것으로) 1,9,10,11월을 합하여 40여 일에 불과하며, 마지막 달인 무술년 11월은 간지의 기입이 없다. 그리고 11월 17일로 절필(絶筆), 이틀 후인 19일 새벽 옥포(玉浦)에서 노량(露梁)에 이르는 7년간의 사명을 다하고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미 동시대인에 의하여 그 당시에 연유된 이순신 자살설(李舜臣自殺說)은 그의 비극적 최후를 애도하는 만가(輓歌)가 되어, 그 여운을 길이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朴惠一 :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A Short Note on the Iron-clad Turtle-boats of Admiral Yi Sun-Sin', '이순신귀선의 철장갑에 대한 보유적 주석' 등 거북선에 관한 수편의 논문이 있음.


*출전: '창작과 비평' 1993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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