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활자와 민족주의
금속활자가 세계에 자랑할 민족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 우리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누가 부인하겠는가. 매스컴에서는 행여 그 각인이 마모될까 끊임없이 덧새겨준다. 금속활자는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신성한 표징이 되었다.
나는 이 표징을 오랜 세월 믿어왔다. 그런데 최근 그 표징에 약간의 의문을 표하게 되었다. 문득 세계 최초라는 점 외에 고려의 금속활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뭇 놀랐다. 따지고 보면 미심쩍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금속활자가 세계적 문화유산이라는 근거는 단 하나다. 실물이 남아 있는 '직지심경(直指心經)'<1377>을 증거로 삼더라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보다 88년을 앞서 발명되었다는 사실이다(1455년 인쇄된 구텐베르크의 42행 라틴어 성경을 기준으로 삼았다). 한국 금속활자의 중요성은 구텐베르크의 활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 활자의 중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금속은 마모되지 않는다. 마모되지 않는 활자에 부가된 가동성(可動性), 이것으로 인해 책의 대량인쇄, 곧 지식의 무한 복제가 가능해짐으로써 소수에 의한 지식 독점이 해체되고 지식의 보편화가 시작된 것이다. 영국 BBC 방송국에서 지난 밀레니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역사 인물 1백 명을 선정했을 때 구텐베르크가 1위를 차지한 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 한국 금속활자는 어떠한가,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은 불과 28부를 찍었을 뿐이다. 세종 때 만들어진 금속활자 인쇄물은 보통 수십 부, 많이 찍으면 2,3백 부였다. 대량 인쇄가 필요한 경우, 금속 활자 인쇄가 아닌 목판 인쇄를 선택하였다. 조선조의 금속활자는 쿠텐베르크 활자와는 달리 애시당초 대량인쇄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조의 금속활자 인쇄는 속도가 빠르지도 않았다. 세종 때 한 번 개량되었다고는 하지만, 조판` 인쇄는 여전히 수작업에 의지하였다. 활자판에 먹을 칠하고 그 위에 종이를 얹어 솜망치로 두드린 뒤 한 장씩 떼어내는 방식은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에 반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포도주 압착기를 이용한 반기계식이었다. 어느 쪽이 인쇄 속도가 빠르며, 대량인쇄에 유리한가는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우리의 금속활자는 13세기 초 발명된 이후 조선조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 민간의 주된 인쇄수단이 되지 못했다. 방대한 연구를 통해 현재 조선 시대 만들어진 금속활자의 종수가 거의 대부분 밝혀졌는데, 그 중 민간에서 상업용 인쇄를 위해 금속활자를 제작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의 금속활자는 지식의 대중적`보편적 확산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물론 어떤 변화도 초래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한다. 변화가 있었다면 있었다. 세종조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사대부 계급의 지적 수준을 높여 중세적 질서의 완성에 기여했다.
구텐베르크와 한국의 금속활자는 금속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구텐베르크와 한국의 금속활자는 각각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를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길이 달랐다. 알파벳 자모를 쓰는 쿠텐베르크 활자는 1면을 인쇄할수 있을 정도의 활자만 있으면 책 한권을 인쇄할 수 있었으나 한국의 금속활자는 한번 주조할 때 적어도10만, 보통 20~30만자를 주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가에서만 금속활자를 제작, 사용했던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표준문자인 한글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한글 창제와 금속활자의 상용화는 모두 세종조에 이루어졌으나, 기묘하게도 세종은 한글 금속활자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한글활자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문서적의 언해(諺解)에 필요한 소수에 불과했다. 애초 국문서적 인쇄를 위한 대량의 한글활자는 만들어진 적이 없었다. 위정자들은 대중을 위한 지식이 보급이란 문제 자체를 생각하지도 못했다. 금속활자는 한자(漢字) 활자였고, 오로지 소수를 위한 책만을 찍었으니, 지식의 보편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금속활자의 최초성에만 주목했지, 어떤 현실적인 압력이 금속활자를 탄생시켰는지, 금속활자가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했는지, 궁극적으로 금속활자가 사회변화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로지 세계에 자랑할 위대한 민족의 업적이라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사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금속활자의 의미를 규명해야 할 것인데, 세계 최초라는 허울 아래 서양의 금속활자와 견주어 가당치도 않은 자랑만 늘어놓고 있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
금속활자를 꼬투리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민족'이란 이름이다. '민족의 세계적 문화유산'이란 명제에서 민족이란 어휘가 모든 것을 은폐해 버리고 말았다. 금속활자가 민족이란 언어의 광휘를 빌어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우리가 금속활자 출현에서 정말 심각하게 따져야 할 모든 문제들은 어둠 속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민족'이란 단어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사를 민족이란 코드로 읽고 그에 맞추어 얼개를 짠다면, 민족이란 코드에 걸려들지 않는 무한한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장구한 시간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추상화시켜버린다면, 양반/남성의 목소리에 가려 있는 상놈과 노비와 여성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줄 것이며, 서북 사람의 억울한 사연은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 실제 우리 역사를 만들어간 대다수의 상놈, 개똥이, 종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들은 과연 나날을 살면서 한국 민족임을 의식하고 살았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상놈으로 종놈으로 여성으로 살았을 뿐이다. 이렇듯 민족이란 이름으로 모두를 뭉뚱그리는 순간 개똥이, 말똥이, 소똥이는 사라진다. 존재했던 모든 것들의 구체성과 다양성이 증발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족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던, 혹은 '민족'과 공존했던 '근대'와 '민중'이라는 코드 역시 마찬가지다. 근대와 민중 역시 민족과 동일한 왜곡과 배제의 폭력을 휘둘렀음은 여기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존재했던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단일한 중심만을 내세워 대상을 왜곡시킴으로써 애써 중심을 닮게 하는 권력이야말로 중심적 담론의 독재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정치독재보다 더 근원적인, 정치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독재의 기원이 아닐까? 민족이나 근대, 민중 등 거대하고 중심적인 코드를 보면서 늘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서설> 중에서
1372년(공민왕 21) 승려 경한(景閑)이 부처와 조사(祖師)의 게송(偈頌)·법어(法語)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으로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며, 간략 서명은 ‘불조직지심체’이다. 판심제(版心題)는 직지 또는 심요(心要)이다. 간단히 '직지심체요절', '직지'로 불리며, 영어권에도 'Jikji'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직지심경(直指心經)으로도 불렀는데, 불서(佛書) 중 직지는 경(經)이 아니라 요절(要節)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은 고금, 곧 예로부터 고려 때까지의 예문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50권으로 되어 있었다.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가 지은 것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동국이상국집》에 이 책을 고종 21년(1234년) 활자로 찍었다고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한국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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