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충무공 이순신(1545~98)은 전라 좌수사로 임명된 임진년(1592) 1월1일부터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기 전날인 무술년(1598) 11월17일까지 벌어진 일들을 일기로 기록했다. 이순신은 그날의 몸 상태와 바다 날씨, 베어 죽인 부하들과 자고 간 여자들의 이름까지 모두 글로 써 남겼다. <난중일기>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李忠武公 亂中日記 附書簡帖 任辰狀草·국보 76호)는 매일 되풀이된 시시콜콜한 일들로 길고 자세하다. 모두 9책으로 구성된 일기의 전체 분량은 모두 15만여 자(해독 가능 13만 자)나 된다.
갑옷 벗고 자살했다는 설은 오해
△ 노승석씨는 한학자인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그는 <난중일기> 탈초를 위해 전공이었던 퇴계학 연구를 잠시 접었다. (사진/ 박승화 기자) |
소설가 김훈은 2003년 펴낸 <자전거 여행> 첫째 권에서 “우리는 이퇴계(1501~70)의 삶의 미세한 무늬들과 마음의 결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이순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백의종군을 시작하던 1597년 5월16일의 일기는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고 시작한다. 충무공은 그래도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는지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는 “취하여 땀이 옷을 적셨다”고 적었다. <로마인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전기를 쓰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 ‘사료가 풍부한 사람’을 꼽았다. 이순신은 전기를 쓰려 할 때 사료가 없어 후세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취하여 흘린 땀이 겨냥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끝내 침묵으로 일관한다.
<칼의 노래>에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까지 이어진 이순신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우린 충무공이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잘 알 수 없다. 그것은 충무공이 우리에게 강요한 의식적인 거리일 수도, 후세 사람들의 게으름 탓일 수도 있다. 초서 연구가 노승석(36)씨는 “충무공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가장 큰 장애물은 알아보기 힘들게 흘려 쓴 그의 초서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초서로 휘갈겨 쓴 <난중일기> 13만 자를 완전 해독해 다음달 초 번역서를 내놓는다. 노씨는 “그 과정에서 기존의 번역본에 빠져 있는 8500여 자를 새로 추가했고, 100여 곳, 150여 자의 오류를 발견해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그에게, 우리가 충무공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을 물어봤다.
이순신이 전투 중에 갑옷을 벗어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한국방송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그렇게 나오는데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드라마는 40% 정도만 사실이라고 보면 맞다. 드라마를 보면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벌이던 와중에 갑옷을 벗고 전쟁을 독려하고, 이를 지켜보던 장수들은 “저건 자살행위”라며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런 오해가 가능했던 것은 숙종 때 편찬된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때문이다. 이 책은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전기와 시문을 기록한 책으로 원문을 보면 ‘이순신방전면주’(李舜臣方戰免胄), 즉 “이순신이 전쟁을 맞아 투구를 벗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투구를 벗었다는 표현은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싸우는 장면을 표현할 때 썼던 관용적인 표현으로 봐야할 듯 싶다. <춘추좌씨전> 희공 33년 4월 기록을 보면, 진(晉)나라 장수 선진(先軫)이 ‘투구를 벗고 오랑캐의 군사 속으로 쳐들어가 전사했다’(免胄入狄師死焉)는 고사가 나온다. 조선 전기 사람 이륙의 문집 <청파집>에도 비슷한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이순신이 전쟁 와중에 갑옷을 벗어 자살하는 방식으로 전쟁이 끝난 뒤 벌어질 당쟁을 피했다는 해석은 그동안 꾸준히 주목을 받아왔다. 오해가 시작된 것은 박혜일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가 1993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쓴 ‘이순신의 전사와 자살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였다. 박 교수는 투구를 벗다라는 뜻의 ‘면주’를 “갑옷을 벗다”라고 해석해 자살설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었다. 그렇지만 이순신이 벗은 것이 “투구였냐, 갑옷이었냐”는 자구 해석과 별도로 이순신 자살설은 당대와 요즘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주제임은 틀림없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여는 “(충무)공이 죽음에서 벗어나온 뒤로는 공이 클수록 용납되기 어려움을 스스로 알고 마침내 싸움에 임해 자기 몸을 버렸다”고 썼고, 맹주서(1622~?)는 “본시부터 그 한 죽음 뜻이 있으니, 뒷사람이 그 까닭을 어이 알리오”라며 애통해했다.
여진과 하룻밤에 스무번을 잤다?
드라마와 소설에서는 이순신과 선조가 크게 갈등한 것으로 나온다. 둘 사이는 어땠나.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나타나는 충무공의 모습과 <난중일기> 속의 충무공은 큰 차이를 보인다. 노승석씨는 "드라마 내용의 40%정도만 사실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박승화 기자) |
=<난중일기>에서는 선조에 대한 이순신의 정치적인 고뇌를 전혀 읽을 수 없다. 이순신이 마음속으로 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왕에 대해 일언반구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왕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다. 물론, 왕의 출정 명령을 어겼다고 그를 기소한 권율이나, 사사건건 마찰을 빚은 원균에 대한 갈등은 읽을 수 있다. 특히 원균에 대해서는 ‘흉’(兇)자를 써가면서 맹렬히 비난하는 구절도 있다.
일기에서 이순신이 격한 감정을 토할 때는 주로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순간이다. 충무공은 매우 효심이 깊었던 아들이었던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은 <난중일기>에 대해 “전편을 읽어보니 어머니에 대해 애통하고 정성으로 슬퍼했던 것을 후세에 본받을 만하다”고 적었다. 아마도 그의 충을 가능하게 했던 뿌리는 효가 아니었나 싶다.
신하는 왕에 대해 글로 쓰지 않았지만, 왕은 신하를 자주 입에 담는 편이었다.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격한 감정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1597년 1월23일), “이순신을 용서할 수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가”(같은 해 1월27일), “이순신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사형에 처할 것으로 돼 이제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한다”(같은 해 3월13일 승정원 비망기). 결국 선조는 이순신의 죄상을 증명할 수 없었고, 한 차례 고문을 가한 뒤에 그를 석방했다.
“낮 이순신과 밤 이순신이 달랐다”는 얘기도 있다. 여자 관계는 어땠나.
=<칼의 노래>를 보면 ‘여진’(女眞)이라는 여인과 관계를 맺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작가의 상상의 결과다. 실제 <난중일기>를 보면 “여진이 와서 자고 갔다”는 정도밖에 언급이 안된다. 재미있는 것은 “‘여진과 잠자리를 했다”에 나오는 ‘공’(共)자다. ‘공’의 초서가 스물 입(卄)자와 비슷해 지금까지 충무공이 여진과 하루 밤에 20번 잠자리를 한 것으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스무 번 잔 게 아니라, 같이 잔 것이다. 충무공이 아무리 꼼꼼해도 몇 번 잤느냐까지 기록했겠는가. (웃음)
△ <난중일기>는 급박한 전쟁 상황을 반영하듯 알아보기 힘든 초서로 쓰여 있다. 군데군데 마멸된 글자가 많아 전체 15만 자를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왼쪽). <정유일기>는 글자가 잘려나간 부분이 많다.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 정유년의 전황을 적고 있다(오른쪽). |
또 1596년 9월11일(양력)치 일기를 보면 충무공이 전남 영광에서 ‘세산월’(歲山月) 또는 ‘산월’(山月)과 술 마시며 얘기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동안에는 이 세산월이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초서의 ‘세’ 자와 ‘내’ 자가 비슷하다. 세를 내로 읽으면 그 여인은 내산월(萊山月)이 된다. 내산월은 선조 때 문신 이춘원(1571∼1634)이 내산월을 위해 남긴 시가 전해져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전쟁통에 한양 기생이 전남 영광까지 내려와 충무공과 만난 것으로 봐 충무공에 대한 연모의 정이 깊었거나, 남다른 의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수정’을 ‘소정’으로 잘못 읽어
왕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아랫도리 사정에 대해서는 간혹 적는 편이었다. 여진은 1596년 9월12일에서 같은 달 15일까지 4일 동안 세 번 등장한다. 1594년 9월15일 일기에서는 이순신의 첩으로 보이는 ‘부안 사람’이 “꿈속에 아이를 낳았는데 달수를 헤아려보니 낳을 달이 아니어서 꿈속이지만 내쫓았다”고 적었다. 광주 목사 최철견의 서출 딸인 최귀지도 1596년 11월8일 충무공에게 와서 잤다.
이순신이 죽지 않고 잠적했다는 설이 있다.
=그동안 번역되지 않았던 <난중일기> 8책 ‘서간첩’에 잠적설을 잠재울 만한 구절이 나온다. 이순신의 큰아들 회가 현 감역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뒤에 현씨가 친히 와서 곡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차려준 일과 부의와 약물품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적혀 있다. 편지는 또 사람들의 돌봐주심에 힘입어 상여도 빠르게 옮겨온 것도 언급한다. 편지를 부친 날이 1598년 12월13일로, 장군이 숨을 거둔 날(1598년 11월19일)로부터 한 달쯤 뒤의 일이다. 이는 이순신이 전사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 참고로 현 감역의 이름은 현즙으로 충무공이 ‘서간첩’에 나오는 편지 10통 가운데 7통을 이 사람에게 보낸다. 현즙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그밖에 새로 발견한 오류는.
=1593년 5월10일에 “늦게 수정악(水頂岳) 위로 올라가 앉다”라는 글이 있는데, 그동안 ‘수정’을 ‘소정’(小頂)으로 잘못 읽어왔다. 수정은 수정악의 준말이고 이는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현에 있는 산마루 이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정현 읍지 산천조에서 확인되는데 “수정악은 현의 서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그 꼭대기에 있는 큰 연못은 깊어서 바닥이 안 보인다”고 적혀 있다. 또 1598년 9월20일치를 보면 “그날 아침 8시께 이순신이 묘도(猫島)에 이르자, 명나라 육군 유제독이 벌써 진군했고 수륙으로 협공하였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묘도는 전남 여수시 묘도동을 이루는 섬인데, 묘자를 유자로 잘못 읽어 ‘유도’(柚島)가 됐다.
<난중일기> 완역자로서 남기고 싶은 말은.
=이순신은 영웅이긴 하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그는 슬픈 일이 있을 때 많이 울었고,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 많이 걱정했다. 위인을 존경할 때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번역본이 사람들이 이순신을 좀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출처 : 한겨레21 2005.11.11(금) 제58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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