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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남편의 일기

마음닦기/좋은 글

by 빛살 2013. 2. 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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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남편의 일기

 

저는 결혼 8년차에 접어드는 남자입니다.

3년 전쯤에 이혼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었습니다.

그 심적 고통이야 경험하지 않으면 말로 표현 못하죠.

결혼 생활에 저는 딱히 큰 불만이 없었는데

주로 아내 입에서 이혼하자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더군요.

저도 회사 생활과 집안의 크고 작은 일로 지쳐있었던 때라 맞받아쳤구요.

순식간에 각방 쓰고 말도 안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화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갈수록 커져 갔구요.

사소한 일에도 서로가 밉게만 보이기 시작했죠.

그래서 암묵적으로 이혼할 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놈도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언제부턴가 시무룩해지고 짜증도 잘 내고 잘 울고 그러더군요.

그런 아이를 보면 아내는 더욱더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 부부 때문에 아이가 그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요.

가끔 외박도 했네요.

하지만 바가지 긁을 때가 좋은 거라고 저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아내는 외박하고 들어가도 신경도 안 쓰더군요.

뱀이 자기 꼬리를 먹어 들어가는 듯한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이었답니다.

 

 

그러기를 몇 달,

하루는 퇴근길에 길거리 과일 장수 아주머니가 떨이라며

귤을 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에 몽땅 사서 집으로 들어갔답니다.

귤 봉지를 주방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오는데,

아내가 귤을 까먹고 있더군요.

몇 개를 까먹더니 "귤이 참 맛 있네"하며 방으로 쏙 들어가더군요.

순간 어두운 방에 전깃불이 환하게 켜지듯 잊고 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귤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하고,

결혼 후 8년 동안 내 손으로 귤을 한 번도 사서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 거죠.

연애할 때, 길 가다가 아내는 귤 장수가 보이면 꼭 천 원어치 사서

핸드백에 넣어 두고 하나씩 사이좋게 까먹던 기억이 나더군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컥해져서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답니다.

시골집에 갈 때는 귤을 박스채로 사들고 가면서도

아내에게는 8년간이나 몇 백 원도 하지 않는 귤 하나를 사주지 않았다니.....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올라 목구멍이 막히면서 코끝이 맹맹해지더군요.

결혼 후 아내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걸 알았죠.

아이 문제와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말이죠.

반면 아내는 나를 위해 철마다 보약에,

반찬 한 가지를 만들어도 신경 많이 써 줬는데 말이죠.

 

며칠 후,

늦은 퇴근길에 보니 그 과일장수 아주머니가 보이더군요.

나도 모르게 또 샀습니다.

오다가 하나 까먹어 보았구요.

며칠 전 아내 말대로 정말 맛있더군요.

살짝 주방 탁자 위에 올려놓고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데

아내는 이미 몇 개 까먹었나 봅니다.

내가 묻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않던 아내가

"이 귤 어디서 샀어요?"

"응 전철 입구 근처 좌판에서"

"귤이 참 맛 있네"

몇 달만에 아내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몇 알 입에 넣어주구요.

아이 시켜서 저한테도 건네주는 아내를 보면서

식탁 위에 무심히 귤을 던져놓은 내 모습과 또 한번 비교하며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뭔가 잃어버린 걸 찾은 듯 집 안에 온기가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더군요.

사이가 안 좋아진 후로는 아침을 해준 적이 없었는데.

그냥 가려고 하는데, 아내가 날 붙잡더군요.

한 술만 뜨고 가라구요.

마지못해 첫 술을 뜨는데,

목이 메여 밥이 도저히 안 넘어 가더군요.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도 같이 울구요.

그 동안 미안했다는 말을 하고 집을 나왔습니다.

아내는 그렇게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지만

그보다 더 작은 일에도 감동받는 다는 걸 몰랐던 나는

정말 바보 중에도 상바보며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간 아내에게 냉정하게 굴었던 내 자신이 후회스러워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후, 우리 부부의 위기는 시간은 좀 걸렸지만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가끔은 싸우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귤이든 뭐든 우리 사이에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주위를 둘러보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남편의 일기 -

 

 

* 인터넷에 떠도는 것을 퍼왔습니다.

   아주 약간 고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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