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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마음닦기/시

by 빛살 2019. 10. 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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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지 말고

 

더 이상

야합하는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야합하는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야합하는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속 깊이 배운 건 이 정도

내 눈 귀

내 두 다리만으로 선들

무슨 불편이 있으랴

기댄다고 한다면

그저

의자 등받이뿐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월의 바람을 타고

영어의 낭독 들려 온다

뒷집 대학생의 목소리

이어 일본어의 축자역이 뒤 따른다

어딘가에서 발표해야 하는 건가

격식 차린 위엄 있는 목소리로

영어와 일본어가 차례로 엮여 펼쳐지고

 

 

그 젊고 젊음에

손을 놓고

듣고 있으니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갑자기 뚝 침묵이 왔다.

왜 그러니? 그 다음은

 

 

실연의 아픔이 갑자기 욱씬거리기 시작했던 것인가

혹은 깊은 사색의 끝으로

돌연 질질 끌고 들어 간 것인가

스쳐가는 바람에도

다시는 그의 목소리 들리지 않고

다음은 라일락의 향기뿐

 

 

원문은 모르지만

그 다음은 내가 이어가자

그래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살아가야만 한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살아가는 이상 살아가는 것들의 편을 들며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내가 제일 예뻤을 때

거리들은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난데없는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게 보이곤 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누구도 정다운 선물을 바쳐주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엔 알지 못했고

서늘한 눈길만을 남기고 죄다 떠나버렸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딱딱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에 졌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넘쳤다

금연을 깨뜨렸을 때처럼 어찔거리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 수만 있다면 오래 살기로

나이 먹고 지독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영감님처럼 말이

 

 

6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 일을 끝낸 뒤 한 잔의 흑맥주

괭이 세워 놓고 바구니를 내려놓고

남자도 여자도 큰 맥주잔 기울이는

 

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과일을 단 가로수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노을 짙은 석양은

젊은이들 다감한 속삭임으로 차고 넘치는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과 그들의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떨쳐 일어나는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

오사카 출신으로 제국여자약전(현 토호東邦대학의 전신) 약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제국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보고 극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 희곡·동화 등을 쓰면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결혼 후, 잡지 등에 시를 투고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전후 일본인들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담아낸 내가 가장 예뻤을 때란 시로 평단과 대중을 사로잡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국내에선 공선옥 소설의 표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 문학의 번역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90년에는 한국현대시선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명시들을 일본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살해사건을 다룬 장 폴 사르트르에게, 고대 일본 이주민들의 차별대우를 고발한 칠석등 한국을 소재로 한 시를 여럿 발표했다. 대표시집으로는 자기의 감수성 정도는』『보이지 않는 배달부』『진혼가등이 있으며, 전후 여성 시인 중에서 가장 폭넓은 사회의식과 건전한 비평 정신을 보여 준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시인으로 한국의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와 풍속,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에 기고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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