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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블라디와 관련된 시

마음닦기/시

by 빛살 2019. 11. 17.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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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고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모것두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대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우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오늘 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츨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조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풀벌레소리 가득 차 있었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벌레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 러시아 영토

*아무을만: 러시아 지명. 아무르강 하류 지역.

-아무르강: 중국에서는 헤이룽(黒龍)강 또는 헤이허강(黑河),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Amur), 몽골인과 퉁구스인은 하라무렌(검은 강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유역은 러시아·중국·몽골[蒙古]에 걸친다.

*니코리스크: 현재의 우수리스크. 한자로는 蘇王領(소왕령)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삽살개 짖는 소리

눈포래에 얼어붙는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어머닌

서투른 마우재말도 들려주셨지

졸음졸음 귀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박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어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텁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 오도 못할 우라지오

 

*우라지오: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어로 우라지오스토쿠(ウラジオストク)이며 줄임말이 우라지오. 한자어로는 해삼위(海參崴).

*마우재: 러시아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말. 중국어 毛子(máozi 털보)’에서 온 말

*귀성스럽다: 수수하면서도 마음을 끄는 맛이 있다.

 

 

 

우리의 거리

이용악

 

 

아버지도 어머니도

젊어서 한창땐

우라지오로 다니는 밀수꾼

 

눈보라에 숨어 국경을 넘나들 때

어머니의 등골에 파묻힌 나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젖먹이와 다름없이

얼마나 성가스런 짐짝이었을까

 

오늘도 행길을 동무들의 행렬이 지나는데

뒤이어 뒤를 이어 물결치는

어깨와 어깨에 빛 빛 찬란한데

 

여러 해 만에 서울로 떠나가는 이 아들이

길에서 요기할 호박떡을 빚으며

어머니는 얼어붙은 우라지오의 바다를

채찍 쳐 달리는 이즈보즈의 마차며 트로이카

좋은 하늘 못 보고

타향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길 하시고

 

피로 물든 우리의 거리가

폐허에서 새로이 부르짖는

우라아

우라아 ××××

<1945>

 

*이즈보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까운 지명

*트로이카: 삼두마차

*우라아: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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