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로 사는 즐거움
이상수
세상에서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의 반대쪽에 서라는 노자의 말을 제왕학이나 처세술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모든 '중심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으로 읽는 게 아무래도 온당할 것이다. 가령 노자는 "약함을 지키는 것을 일러 강함이라고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의 이런 발언은 '중심주의'에 대한 매우 근원적인 반성을 가능하게 한다.
중심주의
인간에게 중심주의는 공기와도 같은 존재다. 고마운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누구나 거기에 둘러싸여 있고 그것에 의존해 살아가면서도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켜켜이 쌓인 중심주의에 갇혀 있다.
다른 사람의 중심주의는 눈에 잘 띈다. 가령 지나친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기주의자)이나, 외국의 지나친 국수주의적 주장(자국중심주의)은 당장 눈에 거슬린다. 보통의 한국인은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일본의 국수주의적 행보를 감지할 수 있다. 지난날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는 일본 극우세력의 역사 교과서 왜곡은 자국중심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행태는 성토와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남의 눈에 든 티끌은 밝게 찾아내면서 자기 눈에 든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우리는 일본의 극우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 우리 자신의 똑같은 자국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한다. 가령 우리는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해 벌어진 전쟁을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교과서에서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는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난리”란 뜻이다. 이 용어를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그대로 채용할 수 있을까? 전쟁의 다른 쪽 당사국인 일본이 이 용어를 수용할 수 없다면, 그건 객관적인 명칭이 될 수 없다. 이는 일본이 1592년에 터진 그 전쟁을 '조선 정벌’이라 부르는 걸 한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자국중심주의
'동해’와 '일본해’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외국 지도를 보며 통탄을 금치 못하는 신문 기사나 독자 투고를 흔히 접한다. 이런 글에 대해 보통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공감과 공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의 자국중심주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동해’라 부르는 그 푸른 바다는 한반도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해’(East Sea)라 불린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그 바다는 서쪽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방향감각이 이상해지지 않는 한 그들은 그 바다를 결코 '동해’라 부를 수 없다. 그건 우리가 '황해’를 '동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황해를 '서해’라고도 부르지만, 중국인들은 그 바다를 '동해’라고 부른다. 이 경우는 '황해’라는 중립적인 명칭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왜 '동해’를 '일본해’라 부르느냐”는 질문이 얼마나 답답한 발상인지는 이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바다가 일본의 영해가 아니므로 '일본해’라는 명칭 또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중립적인 대안을 내놓아야지 "왜 '동해’를 '일본해’라 부르느냐”고 따지는 건, 정신병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기중심주의의 발현이라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 우리 스스로는 잘 체감하지 못하지만, 한국인의 자국중심주의는 일본을 포함해 다른 어떤 나라 못지않게 지독한 수준이다.
다투지 말라는 가르침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늘 작고 사소한 것 때문에 목숨을 건 격투를 벌이기 일쑤다. 노자는 이런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투지 말 것”을 강조한다. <노자>라는 책에는 "다투지 아니 한다”는 표현이 일곱 장에 걸쳐 여덟 번 나온다.
"잘난 사람을 높이지 말라. 백성들로 하여금 다투지 않도록.” (不尙賢, 使民不爭. 3장)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아니한다. …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 하므로 허물이 없을지니.”(水善利萬物而不爭, …夫唯不爭, 故無尤. 8장)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므로 하늘 아래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있는 이가 없을지니.”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22장)
"다투지 아니함으로써 하늘 아래 그와 더불어 다툴 수 있는 이가 없을지니.”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66장)
"장수 노릇을 잘하는 사람은 무력시위를 즐기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내지 아니하며, 적을 잘 이기는 사람은 그와 맞서지 아니하고, 남을 잘 쓰는 사람은 남의 아래에 처한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아니함의 덕이라 하고, 이를 일러 남을 쓰는 힘이라 하며, 이를 일러 하늘과 짝하는 오래된 법도라 한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古之極. 68장)
"하늘의 길은 다투지 아니하지만 잘 이긴다.”(天之道, 不爭而善勝. 73장)
"하늘의 길은 이롭게 해줄 뿐 해치지 아니하고, 참사람의 길은 남을 위해줄 뿐 다투지 아니한다.”(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81장)
자기중심주의를 버린 사람만이 세상에서 남과 다투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중심주의를 버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아마도 사람들이 저마다‘자기가 세상의 중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강박만 버리더라도 세상은 한결 여유를 찾을 것이다.
탈레스의 인생 삼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나는 다음의 세 가지 일에 대해 운명에 감사드린다. 첫째는 내가 동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점, 둘째는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났다는 점, 셋째는 내가 오랑캐가 아니라 그리스인으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는 서기 3세기의 철학사 저술가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전기>에 실려 있다. 탈레스가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발언은 인간중심주의와 남근중심주의, 그리고 자민족중심주의에 젖어 있는 의식상태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물론 오랑캐보다 그리스인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더 누릴 수 있고, 남성이 여성보다 사회적인 권리를 더 많이 행사하며, 인간이 짐승을 부리는 지위에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한몸이 짐승, 여성, 오랑캐가 되는 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운명에 감사드리는” 건 너무도 단세포적인 발상이 아닐까. 도대체 오랑캐로 살면 어떻고, 소수자로 사는 게 또 어떻단 말인가.
동쪽 오랑캐, 중화주의를 내면화하다
최근 역사학자들 가운데 조선후기 노론 집권기를 조선의 황금기라 평하는 사람들이 몇 있다. 당시 명나라는 이미 멸망했고 중원은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때 중원의 문물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바로 조선이었으며, 조선이야말로 '작은 중화’(小中華)라는 '자의식’이 싹텄다고 한다. 이를 연구자들은 '조선중화사상’이라며 높이 평가한다.
한 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조선이 '소중화’라는 발상은 동쪽 오랑캐인 조선이 중국의 중화주의 논리(중국만이 중화이고 사방은 오랑캐의 지역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여 내면화한 결과다. 그 발상의 밑바탕에는 '중화’(중국의 문화)만이 진정한 문화이고 오랑캐의 삶과 문화는 다 내다버려야 할 야만의 습속이란 이분법이 지배하고 있다.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중국인들은 조선을 '동쪽 오랑캐’로 여겼을 것이고, 이른바 '조선중화사상’을 창안한 조선의 선비들도 조선옷에 조선음식 먹으며 조선말로 떠들다 갔을 것이다. '조선중화사상’이란 자기가 오랑캐이면서도 중화라고 여긴, '자신을 비둘기라고 믿은 까마귀’의 놀라운 자기 최면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중화사상’을 주창한 이들은 명나라가 망한 지 수십,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자기 나라를 칭할 때 "아대명”(我大明: 우리 대명제국)이라 칭했던 사람들이다. 이 또한 정신병리학적 연구가 필요한 사례가 아닐까?
오랑캐의 또 다른 인생 삼락
탈레스의 인생삼락이 중심주의에 대한 강박의 전형이라면, 우리처럼 오랑캐로 태어난 이들은 다른 인생삼락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렇게 말이다.
"나는 부강한 나라에 태어난 대신 분단된 약소국 오랑캐 나라 코리아에 태어나 행복하다. 평생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부유하고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대신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행복하다. 평생 성실히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기 때 문이다.”
이 글을 쓰는 이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이 두 가지만 누리고 있다. 이 땅의 절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세 번째 행복은 이런 것이다.
"나는 남자로 태어난 대신 여자로 태어나 행복하다. 평생 차별과 불합리한 관습에 시달리면서 인간과 인생에 대해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를 읽어야 한다 --; 이것이 오랑캐의 비애인걸까 즐거움인걸까
중용보다 한걸음 더 왼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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