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 백범의 '나의 소원'을 배운 적이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민족 국가' 부분만이었지만.
근거 없는 신화가 지배하던 시대였던 만큼 백범도 나에게는 신화처럼 모호했다.
백범이 가장 바라던 바가 민족의 독립이었다는 것은 선생님이 문답법이니 점층법이니 하는 것들을 강조하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백범이 독립을 위해 어떤 일들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교과서 이상의 내용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이전에 내가 백범에 대해 알고 있었던 내용은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교 1학년 때쯤 읽은 조흔파의 '대한제국'이라는 책에 나오는 치하포 사건이 전부였다.
그때는 사건이 너무 극적이라 글쓴이가 윤색한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 참, 또 하나.
중학교 때 국어책이었던 것 같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 관한 글을 배웠다.
생일 잔치할 돈으로 권총을 사서 청년에게 주었다는 내용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몇 년이 흘러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되었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나의 소원'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지도서와 참고서, 그리고 나의 기억에 의존해 주로 자구 해석에 의존하는 고리타분한 수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지만 백범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범일지'를 샀다.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해 보니 지금은 없어진 시민극장 앞에 있었던 '종로서적'에서 1,500원을 주고 산 1986년 인쇄한 일신서적공사의 문고판 이다.
그때까지도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던지 책에 푹 빠져 읽지 못했다.
그렇지만 '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撤手丈夫兒 -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라는 구절을 가슴 속에 새길 수 있었다.
아마 작년(2002년)이었던 것 같다.
한겨레 신문의 '영혼을 울린 한 마디'라는 글에서 소설가 성석제(확실하지는 않지만)가 이 구절을 언급한 것을 읽고 무척이나 반가웠던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칠판에 이 글을 적어 가면서 나름대로 설명도 하고 입으로는 청소년 시절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백범일지'를 소개하고 했지만 부끄러울 따름이다.
건성으로 한번 읽을 책을 세상의 평만 믿고 떠벌리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작년 여름방학 때 중국을 다녀왔다.
마지막 날 루쉰 공원과 임시정부청사에 들렸다.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유명한 홍구공원이 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20대 초반의 나이로 민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윤의사를 생각하며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만일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래도 일본의 앞잡이 노릇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독립운동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일본놈들 눈치나 보며 불평불만이나 하지 않았을까?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꼴을 보면 딱 들어맞을 것 같다.
부끄러운 일이다.
윤의사에게 진정으로 머리 숙이며 조금이나마 그 뜻을 따르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중국 제1의 도시 상해는 생각보다 훨씬 화려했다.
하지만 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가는 길은 옛시가지라 그런지 초라하기만 했다.
특히 정부청사로 쓰던 건물은 내 생각에 그 당시로 치더라도 우리나라 동사무소 건물 정도도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입구에는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의 사인(sign)과 기념사진이 수 없이 많았다.
과연 그들은 여기에 와서 무슨 생각을 하고 갔을까?
백범이 기거했던 조그만 방을 보았다.
바로 저기서 백범일지 상권을 썼으리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여기서도 물러나 파촉이라는 중경까지 가던 길은 또 얼마나 지난했을까?
동그란 안경테에 항상 웃는 얼굴로 기억되지만 가슴 속에 품은 한은 그 얼마나 되었을까?
대학입학원서도 다 쓰고 면접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학생들도 등교하지 않아 제법 여유가 있다.
그 동안 미뤄 두었던 일을 하면서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백범일지를 다시 읽게 되었다.
학기 중에는 그렇게 더럽고 시끄럽던 교실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깨끗이 정리된 교실에서 혼자 상념에 빠져 있다가 문득 백범이 떠올랐다.
백범에 대한 부채의식 아니면 조금더 아이들에게 성실히 다가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사 둔 지 제법 되는 백범일지를 다시 폈다.
창원대 교수인 도진순이 주해한 MBC ! 느낌표 선정도서로 400쪽이 넘었다.
양도 부담이 되고 지루했던 첫 번째 독서 경험 때문에 은근히 겁도 났지만 주해자 덕분인지 읽어가면서 차차 책에 빠져 들어갔다.
읽으면 읽을수록 백범이 진솔한 모습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읽고 난 후 마치 풀코스 마라톤을 뛰고 난 뒤 맛보는 느낌- 몸이 비워져 가면서 무엇인가 새로움으로 가득차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앞으로의 삶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본다.
민족의 영원한 스승 백범
칼을 찬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맨손으로 때려 죽인 치하포 사건.
이봉창, 윤봉길로 대표되는 의거.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신탁의 정확한 시대적 의미를 간과한 채 적극적 반탁운동을 전개한 점 등으로 미루어 백범은 지적 능력을 동반하지 않은 주로 실천적인 행동가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백범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한평생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분이라 굉장히 고집이 세고 일면 독단적인 모습도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너무나 순수한 마음으로 배움에 임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통해 백범이라는 인물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과거를 위한 공부에서 관상 공부 그리고 마음 공부, 동학, 불교, 기독교로 이어지는 백범의 배움의 길은 어찌 보면 서로 모순되고 일관성 없는 행로 같지만 모두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과 민족을 위한 한 방편이었기에 오히려 백범의 사상의 폭을 넓히고 깊게 하는 과정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백범의 순수한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서당에서 신식학교까지 백범은 유능한 교사이기도 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 신학문에 대해 뛰어난 학식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항상 배우고자 했고 배운 것은 다시 조국에 돌려주고자 했던 백범.
이 글을 읽으면서 교사로서의 내 자신을 떠올리며 불쑥 불쑥 부끄러운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언제 한번 정말로 성심성의껏 학생을 지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백범은 이상주의자이며 원칙주의자다.
현실주의자들은 현실과 타협하기 마련이다.
현실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결국 현실에 끌려 갈 수밖에 없다.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백범은 일제 강점기를 굳건히 견뎌낼 수 있었고,
백범의 이상은 영원히 우리 민족의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해방 정국에서 백범의 정세 분석은 치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범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범의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마다 생각했던 글 '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인 판단보다는 원칙과 신념으로 일생을 산 사람이기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민족이라는 원칙과 이상은 영원히 우리에게 살아 남을 것이다.
해방 이후 원칙 없이 오직 이익만을 추구해온 우리의 역사를 생각할 때 백범은 그 존재로서 하나의 위대한 스승이다.
백범과 친일파
백범은 1896년 21세의 나이로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죽이고도 동포들의 비호로 활발한 교육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일제가 60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하고자 했으나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38년 중국에서 이운환의 저격으로 의식 불명 상태까지 간 적이 있었지만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므로 논외로 하더라도 민족의 영웅을 죽인 것은 백범의 죽음을 그렇게도 원했던 일본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인이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경우와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을 죽음으로 이끈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당파싸움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택한 측면이 강하지만 왜적의 유탄에 쓰러진 이순신의 죽음도 통탄할 일인데 동포의 손에 의해 자행된 백범의 죽음은 말 해 무었하겠는가?
1949년 74세의 나이로 경교장에서 백범을 죽인 육군 소위 안두희.
그는 벌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의 비호로 호화롭게 살았다.
1955년에는 뻔뻔하게도 백범 암살에 대해 '시역의 고민'이라는 자서전까지 쓴다.
그러다가 1996년 10월 23일 버스 운전기사인 박기서(朴琦緖)에게 살해되었다.
암살의 직접적 배후로 알려진 김창룡은 독립군 잡던 일본 관동군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헌병대 출신이다.
김창룡 그 뒤에는 누가 있었을까?
1956년 김창룡이 암살된 뒤 이승만의 1계급 특진 추서와 98년 대전국립묘지로의 이장한 사실을 볼 때 김창룡의 배후 세력을 한국을 뛰어넘는 강력한 세력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세력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들이 있기에 매국노 이완용의 손자가, 송병준의 일가가 할아버지의 땅을 찾겠다고 나대고 있는 것이다.
안두희가 백범을 쏜 순간 민족 정기도 함께 죽은 것이다.
그 이후 원칙도 이상도 없이 오직 현실적 이익만 좇는 세태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우리 민족의 저력을.
그 힘은 배우고 가진 사람보다 백범처럼 순수하고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2004-05-12 16: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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