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를 연찬하다 - 이남곡의 진보 이야기
이남곡 지음 / 초록호미 /
진보라는 말만 꺼내도 '좌빨'로 매도되는 반동의 시대에 진보를 제목으로 달고 나온 책이라 눈길이 갔다. 우리 사회에서 급진, 과격, 독선 같은 단어와 동격으로 여겨지는 '진보'라는 단어가 차분한 느낌을 주는 '연찬'이라는 말과 어울려 묘한 느낌을 주었다. 먼저 책 앞 날개에 풀이해 놓은 연찬이라는 뜻부터 살펴보았다.
글쓴이 이남곡님은 1945년에 함평 시골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다.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부귀와 공명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출세의 사다리에 제대로 올랐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회 변혁을 꿈꾸며 농촌 지역에서 교사활동을 하고, 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4년의 옥고를 치른다. 이후 불교를 통한 사회 활동, 무아집, 무소유, 일체의 이념으로 집약되는 야마기시(山岸) 사상과의 만남, 그리고 야마기시 실현지에서의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전북 장수에서 좋은 마을 운동을 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한 없이 낮은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손만 뻗으면 부귀와 명예를 쉽게 잡을 수 있었던 자리에서 내려와 평생을 진보를 위해 살아왔다면 자기 주장도 뚜렷하고 목소리도 우렁찰텐데 조곤조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작가의 포용력을 말해 주는 듯해 좋았다. 말하는 내용도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몸소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믿음이 갔다. 글쓴이의 생각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인간은 누구나 숭고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각자의 취향에 맞는 또는 자신의 종교에 따라 명상 · 기도 · 참선이나 예술 활동을 통해 다양한 영성을 계발해야 한다. 자기 중심의 가치 체계와 이기주의를 넘어서 인간의 숭고 품성(영성, 불성, 양심....)을 사회 운영의 구체적 원리로 체현하는 것을 진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이기주의와 아집으로 대표되는 물신주의에서 벗어나 인간 해방을 이루는 것(인간화)을 진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지은이가 추구하는 세계는 마을과 같은 공동체이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람들간의 소통이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부터 인정해야 한다. 내 생각이 절대로 옳다는 아집(종교)을 버리고 네가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네가 있다는 상생 혹은 조화의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보의 실천은 현실을 인정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전 인류가 쓰고도 남을 물질을 생산해 낸 자본주의의 위력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물신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이 내가 파악한 글쓴이의 진보에 대한 생각이다.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소통의 방법으로 연찬이 있다. 연찬을 통해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사고의 유연성을 연습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는 철저함을 추구하여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글쓴이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작자에게서 구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간난신고 끝에 도달한 평화가 느껴지기도 했다. 동양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무렇게나 살아온 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준 글쓴이에게 감사드린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_유용주 (0) | 2009.12.09 |
---|---|
아함경 이야기 (0) | 2009.11.29 |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 (0) | 2009.07.02 |
다이고로야, 고마워 (0) | 2007.11.06 |
[독후감]딱지꽃 (0) | 2007.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