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석가모니의 열반

불교/벽화

by 빛살 2015. 12. 18. 10:37

본문

 석가모니의 열반 

 

녹야원에서의 최초의 설법을 시발점으로 붓다의 45년에 걸친 설법과 전도는 붓다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막을 내리게 된다. 끊임없는 유행(遊行)의 세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붓다는 자신의 입멸을 알고 있었으므로 아난다에게 라자가하 근처에 머물고 있던 비구들을 모이게 하였다.

 

이 모임에서 붓다는 자신의 입멸 후 승단의 번영을 위한 7가지 인연(七覺支,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갈래: 念覺支, 擇法覺支, 精進覺支, 喜覺支, 輕安覺支, 定覺支, 捨覺支)을 설하였다. 붓다는 자신의 생이 곧 끝남을 알고 마지막 여정인 코살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붓다는 가는 도중 파탈리 마을에 들러 재가자들이 지켜야할 계율과 그에 따른 5가지 과업(五戒: 不殺生, 不偸盜, 不邪淫, 不忘言, 不飮酒)에 대하여 설하였다.

 

그리고 그는 비구들에게는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였다. 법을 설하며 가던 도중 베살리 근처의 벨루바 부근에서 우안거에 들 무렵 붓다는 병에 걸렸다. 이때 아난다가 붓다의 열반 후 지켜야 할 교단에 대한 지침을 듣고자 하자 붓다는 아난다야, 그대는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라. 밖에서 귀의처를 찾지 마라. 법을 등불로 삼아라. 법을 귀의처로 하라. 그대 자신 말고 다른 누구에게도 귀의하지 말아라라는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유훈을 설하였다.

 

어느 날 아침 베살리에서 탁발을 마치고 돌아온 붓다는 열반에 들 준비를 하였다. 그는 아난다와 함께 마하바나의 쿠타가라 정사로 향했다. 그리고 베살리 근처에 머물고 있던 비구들을 정사로 불러 법을 설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깨달은 법인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그리고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였으며 자신은 3개월 후 입멸할 것이라 알렸다. 붓다는 다른 곳을 다섯 곳이나 방문하고 같은 내용을 설하였다.

 

붓다는 보가나가라에 있는 아난다의 정사에서 비구들에게 네 가지 거룩한 권위에 대해 설한 후 파바로 떠났다. 파바에서 금세공업자의 아들인 춘다(Chunda)에게 버섯요리 공양을 받고 심한 병에 걸렸다. 그리하여 붓다는 쿠시나라로 떠났다. 쿠시나라로 가던 도중 붓다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카쿳타 강에서 목욕을 하고 비구 춘다카(Chundaka)를 불러 붓다가 춘다의 공양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서 춘다가 후회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또한 춘다의 공양은 그 어떤 음식보다도 공덕과 과보가 큰 음식이라는 것을 전하라고 당부하였다.

 

말라족이 사는 쿠시나라에 도착한 붓다는 사라나무 숲으로 가서 아난다에게 두 사라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도록 자리를 깔게 하였다. 붓다가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다리를 위아래로 포개고 누워 명상에 들어가자 사라쌍수는 계절에 맞지 않게 수많은 꽃을 피워 붓다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꽃잎을 떨어뜨려 흩날렸다. 이때 명상에 잠겨있는 붓다에게 아난다가 붓다의 열반 후 우안거를 끝낸 비구들이 누구에게서 설법을 들을 것인가 하고 슬퍼하자 붓다는 자신이 떠난 후 기념할 만한 성지를 참배하면서 자신을 생각하고 계속 수행하기를 당부하였다. 이 성지는 바로 붓다가 태어난 곳,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붓다가 처음으로 설법한 곳, 그리고 붓다가 열반한 곳이었다.

 

아난다는 또한 붓다의 입멸 후 그의 유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붓다는 전륜성왕의 유해를 장례하듯이 장례 지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사거리에 붓다의 탑을 세워 사람들이 거기에 경배하여 마음의 평온과 이익과 기쁨을 얻게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붓다는 탑을 세워 경배해야 할 네 사람에 대해 말하였다. 붓다는 깨달은 자이므로 탑을 세워 경배해야 하고, 홀로 깨달음을 이룬 독각불(獨覺佛), 진심으로 붓다의 설법을 들은 성문(聲門), 그리고 전륜성왕도 탑을 세워 경배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생존 유언은 오늘날까지 불교교단에서 지켜지고 있다.

 

이에 아난다가 정사 안으로 들어가 울자 붓다는 아난다를 불러 그의 훌륭한 자질인 아난다의 설법을 칭찬하며 그가 계속해서 설법을 하기를 당부하였다. 그리고 아난다에게 말라족에게 가서 붓다가 열반에 드는 때를 알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말라족 백성들이 붓다를 찾아와 그에게 마지막으로 경배를 하였다.

 

그때 쿠시나라에 있던 수밧다(Subhadda)라는 방랑 수행자가 붓다가 열반에 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사라쌍수 아래로 가서 아난다를 만나서 붓다를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아난다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붓다는 아난다와 수밧다의 대화를 듣고 수밧다를 불러 마지막 설법을 행하고 그를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로서 수밧다는 붓다가 직접 교화시킨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열반이 가까워오자 붓다는 제자들에게 삼보(三寶)와 수행방법에 대해 의심이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세 번 물었다. 모두가 삼보와 수행 방법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붓다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아 잘 들어라. 모여서 이루어진 모든 것은 반드시 흩어지게 되어 있다. 열심히 정진하라!” 이것이 붓다가 남긴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의 열반은 자신의 사촌동생인 아난다와 아누룻다가 마지막으로 지켰다.

 

붓다의 유해는 말라족에 이해 장례 치를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붓다의 유해에 경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7일 동안이나 장례가 연기되었다. 결국 7일째 되던 날 말라족은 붓다의 유해를 말라족의 마쿠타 반다나 성전으로 옮겨서 화장을 하게 되었다. 그때 붓다의 제자 마하 캇사파(Maha-kassapa 迦葉)는 붓다의 열반 소식을 듣고 500명의 비구들과 함께 쿠사나로 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붓다가 열반한 지 이미 7일째였다. 마하 캇사파가 붓다의 열반을 너무 슬퍼하자 붓다가 말없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여 붓다의 진정한 법신(法身)은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말라족에 의해 화장되고 남은 붓다의 뼈는 7일 동안 화환과 향으로 경배를 받았다. 붓다가 쿠시나라에서 열반했다는 소식이 널리 전해지자 붓다의 유골을 일부분 받아 사리탑을 세우고 거기에 공양을 올리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왕, 베살리의 릿차비족, 카필라밧투의 사카족, 랄라캅파의 불리족, 리마 마을의 콜리야족, 베타디파의 바라문, 파바의 말라족, 그리고 쿠시나라의 말라족이 그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붓다의 유골을 나눠 받기를 원하자 바라문 도나(Dona)는 붓다의 유골을 여덟 등분으로 나누어 여러 곳에 탑을 세울 것을 제안하였다. 모두가 동의하자 바라문 도나가 직접 공평하게 붓다의 유골을 여덟 등분으로 나누어 분배하고 자신은 유골을 담았던 병을 가지고 갔다. 핍팔리바나의 모리야족은 이미 유골이 배분되고 난 후 붓다의 유골을 요구했으므로 그들은 유골대신 타고 남은 재를 거두어 갔다. 이리하여 유골을 모신 사리탑이 여덟, 유골을 담았던 병을 모신 병탑이 하나, 타다 남은 재를 모신 재탑이 하나 세워졌다.

 

모든 일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붓다가 입멸한 후 교단을 이끈 캇사피는 붓다가 설한 법에 대해 제멋대로의 견해를 저마다 붓다가 설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가르칠까 염려하였다. 이 때문에 캇사피는 붓다의 제자들 중에서 500명의 정통 비구들을 선발하여, 마가다국의 라자가하 교외에서 경(sutta)과 율(vinaya)의 결집을 행하였다. 붓다를 늘 옆에서 모셨던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아난다가 암송하는 경 하나하나를 전원이 찬성함으로써 경장(經藏)이 편찬되고, 우팔리(Upali)가 암송하는 율의 조항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율장(律藏)으로 편찬되었다. 이로써 석가모니의 일반적 가르침인 경과 출가자의 교단생활을 규정한 율이 정식으로 제정되었다.

 

 출처 :매사와법진 원문보기

글쓴이 : 法眞

'불교 > 벽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업경대  (0) 2015.12.21
부모은중경  (0) 2015.12.18
석가모니와 조마사  (0) 2015.12.17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  (0) 2015.12.17
천민을 제도하는 석가모니  (0) 2015.12.17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