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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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월 27일에 왔었다.
어렴풋이 느티나무 밑에서 사진 찍은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2018년 7월 마지막 날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다시 찾았다.
동문 입구 매점에서 산 냉장, 냉동 생수 각 1병씩을 다 마셔가며 쉬엄쉬엄 경내를 돌았다.
곳곳에 큰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어 쉴 만한 곳이 많았다.
날씨 덕분에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동선: 동문-양헌수비-윤장대-은행나무-대조루-서점-대웅보전-향로전-약사전-삼성각-정족사고지-범종-극락암-명부전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아도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했다(구미 태조산 도리사 아도화상). 372년 불교가 전래된 이후 성문사, 이불란사(375년)에 이어 창건된, 16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이다.
원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는데 1282년 전등사로 개명했다. 고려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인기(印奇) 스님으로 하여금 송나라에서 펴낸 내장경을 인간(印刊)· 봉안(奉安)하도록 한 것과 옥으로 만든 등(燈)을 절에 시주한 한 것에서 전등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전등(傳燈)이란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라는 의미로 전등사는 '불법을 전하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전등사는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근거지였으며 격동하는 근대사의 중심에서 국운을 지켜낸 호국불교의 근본도량이기도 하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동문이다.
주차비 2천원, 입장료 3천원
근처에 있는 안내문이다.
삼랑성(三郞城)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부여, 부우, 부소)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삼국시대에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 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하였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 고려시대 가궐(假闕)터, 조선시대 사고(史庫)와 선원보각(璿源譜閣)이 있다. 병인양요(1866)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는데 남문만 문루가 있다고 한다.
성의 길이는 대략 2,300m 정도.
양헌수 승전비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새겨져 있다. 양헌수 장군은 현종 14년(1848년)에 무과에 급제한 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181cm, 비신의 높이가 163gm, 너비 60cm, 두께가 27cm이다. -안내문
예전에는 별로 못 보던 불구(佛俱)이나 요즘은 자주 눈에 뜨인다.
해남 대흥사, 석모도 보문사.......
윤장대(輪藏臺)는 팔각형으로 팽이처럼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불경을 넣어둔다.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다. 글자를 모르거나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신도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불구로, 중국 양(梁)나라의 선혜대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 때문에 스님들이 고생 좀 했나 보다.
그 일면을 보여주는 이야기.
전등사 정문에 해당하는 대조루(對潮樓)의 앞과 뒤의 모습
전등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보전-보물 제178호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중건하여 조선 중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건물 보호에도 도움이 될 텐데 단청을 왜 안 하는지?"
"글쎄"
참배를 하고 나온 부부가 말을 주고 받는다.
왜일까?
대웅보전 목조 석가여래삼존불(아미타불-석가여래-약사여래)-보물 제1785호
업경대도 보인다.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표정이 제각각이다. 두 손으로 힘겹게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습, 한쪽 손을 내리고 있는 모습이 익살스럽다.
대흥사 침계루 호랑이 벽화가 떠오른다.
풋풋하다.
대웅보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마을의 주모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불사(佛事)를 마치면 주모와 결혼을 할 생각으로 그 동안 모아둔 돈을 모두 맡겼는데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주모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도편수는 여인 생각에 몇 날을 힘겨워 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완성된 건물 처마 네 군데마다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보였다. 이는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대웅전에서 들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잘못을 참회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도편수의 불교적 사랑과 염원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나부상이 아니라 사찰을 수호하는 원숭이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향로전
상임법사(常任法師)가 머무르는 공간으로 출입금지 구역이다.
불을 끄기 위한 청동수조가 앞에 있다.
약사전(보물 제179호)과 후불탱화
약사여래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하는데, 동방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거주하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화를 소멸시키며 원만행(圓滿行)을 닦게끔 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이다.
후불탱화에는 월광보살 약사여래 일광보살이 보인다.
삼성각
산신, 독성(나반존자), 칠성신을 모시고 있다.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강하다.
강화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했다. 춘추관 외에 이들 충주·성주·전주의 사고를 3대 사고라 해서 여기에 역대 실록을 분산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주의 사고만 보존되어 그곳의 실록 등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 명종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또한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도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 간행한 실록을 보관하였다.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니산 사고에 있던 전주본을 이곳에 비장하였다.
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소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했다. 그러다 구한말인 1908년, 정족·태백·오대·적상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은 규장각의 관할 하에 두었다.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아 있었다.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었다. 폐허가 되었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되었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되었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복원된 장사각과 선원보각
강화 정족산성진지(鼎足山城鎭址)
정족산사고의 보호를 목적으로 설치한 군사주둔지인 정족진이 있던 곳
무더위에도 사람들이 많다.
더위에 지쳐 모두 조용조용 걷고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한다.
매미도 지쳐는지 소리가 없다.
대웅보전의 모습이 단아하다.
극락암
출입금지 구역이다.
스님이 편한 자세로 신문을 읽고 계신다.
굴뚝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명복을 비는 듯 흰 등이 달려 있다.
명부천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 총 31구의 상이 안치되어 있다. 많은 상이 배열되어 있지만 어지럽지 않았고, 시왕의 이름을 모두 밝혀놓아 보기에도 좋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명부전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전등사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구석구석 정성이 깃든 손길이 느껴진다.
화려하지도, 어지럽지도 않게 정돈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경내 서점에서 구입한 책 세 권은 언제 다 읽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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