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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역사/한국사자료실

by 빛살 2007. 9. 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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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진도 대교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다.


 

자전거는 해남 우수영에서 출발해서 진도대교를 넘는다. 진도는 올망졸망한 작은 산을 수없이 품고 있다. 그 산들의 능선을 자전거로 오르고 내릴 때 산하는 음악으로 변한다. 나는 아직도 그 음악을 해독하지 못한다.


진도대교 밑에서 바다는 겨울 들판을 건너가는 눈보라 소리를 낸다. 흰 갈기를 휘날리는 물살은 출정하는 군마(群馬)처럼 우우 함성을 지르며 명량(鳴粱) 해협을 빠져나가 목포 쪽으로 달려간다.


이 해협의 폭은 가장 좁은 거리가 293미터이고 최고 유속은 10노트이다. 여기가 한반도 전 해역에서 가장 사나운 물길이다. 이 물길은 하루에 네 번 역류한다. 해남반도에서 목포 쪽으로 달려가던 북서해류는 돌연 거꾸로 방향을 바꾸어 남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는데, 명량해협은 하루에 네 차례 이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한다. 물길이 거꾸로 돌아서는 사이마다 바다는 문득 잔물결 한 점 없이 거울처럼 고요해지고, 질풍노도를 예비하는 이 적막의 순간에 바다는 더욱 무섭다.


무인의 길


18번 지방도로는 진도대교로 명량해협을 건너간다. 이순신의 전라우수영과 벽파진의 이순신 전적비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18번 도로는 삼별초의 용장산성을 지나서 남도석성에 닿는다. 삼별초 대장 배중손(裴仲孫)은 이 남도석성에서 전사했고, 몽고대장 홍다구의 칼에 맞아죽은 삼별초 임금 왕온(王溫)은 이 도로변 야산의 무연고 분묘들 틈에 묻혀 있다. 진도는 노래와 그림의 섬일 뿐 아니라 무인들의 삶과 죽음이 명멸한 섬이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된 이순신의 칼에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는구나(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검명이 새겨져 있다. ‘물들일 염(染)’ 자의 공업적 이미지는 이순신의 무인다운 내면의 한 본질이라고 할 만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펜을 쥔 자들의 엄살이거나 자기 기만이기가 십상이다. 그 말은 정치적이다. 칼을 쥔 자들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文)은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武)를 동경한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정직하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칼이었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삼엄한  단순성에는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그가 남긴 시문 중의 한 절창은 이렇다.


가슴에 근심 가득 뒤채이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비출 조(照)’ 자 속에서, 달과 칼 사이에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하는 자의 살기는 극도로 억눌려 있다. 이 내면의 억눌림이 그의 외로운 전쟁을 버티어준 마음의 힘이었다. 이순신의 글은 영웅다운 호탕함이나 과장이 없고 무협의 장쾌함이 없다. 그는 악전고투 끝에 겨우 겨우 이긴다. 그는 영웅된 자의 억눌림의 비극을 진술할 때는 단호하게도 말을 아끼고, 온갖 정한(情恨)에 몸을 떠는 한 필부의 내면을 진술할 때는 말을 덜 아낀다.

 


진도대교의 겨울


진도대교 행거 아치 밑에서 울돌목의 물살은 거칠고 사납다.

현대식 기선들도 이 물살을 거슬러서는 나아가지 못한다.

이 물살이 이순신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울돌목이다.


 한바탕의 전투를 치르고 바다에서 돌아온 날 저녁마다, 또는 전 함대를 전투 배치한 출정의 새벽마다 몸에 병이 깊은 그는 요가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 절망에 맞서는 그의 마음의 태도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고 거기에 일체의 정서를 개입시키지 않는 방식이다. 그때 그의 내면은 무섭게 억눌리고 그의 글은 칼의 삼엄함에 도달한다. 그는 많은 부하들을 베어죽였다. 부하를 죽인 날 그의 일기들은 “아무개가 거듭 군령을 어기기로 베었다. 바다는 물결이 높았다”라는 식의 문체를 보인다.


백의종군을 시작하던 1597년 5월 16일의 일기는 “맑음, 오늘 옥문을 나왔다”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을 가두고 때리면서 사형의 빌미를 찾으려 했던 정치 권력의 정당성 여부와 그 원한에 관하여 끝끝내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남해안 일대를 돌면서 망가진 배 12척을 수습해서 명량해협의 우수영에 포진했다. 명량해전을 보름 앞둔 1597년 10월 12일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裴楔)은 탈영해서 도주했다. 고급 지휘관의 적전 탈영은 절망적인 사태였다. 이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일기는 다만 한 줄이다. “맑음, 오늘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그의 일기에 나오는 ‘부안 사람’이라는 여자는 그의 첩이거나 애인이었던 모양이다. 이 여자는 이순신의 병영 가까운 곳에 거주했던 것 같다. 1594년 9월 15일의 일기는 “꿈에 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 수를 따져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쫓아버렸다”라고 기록했다. 여자의 정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악몽인데, 꿈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가파르고 단호하다. 그는 절망을 부인하지 않고 절망을 중언부언하지도 않는다.


명량해협에서, 이순신의 싸움은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이었다. 정찰병들은 적선의 숫자를 보고하지 못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들이 명량으로 몰려온다”는 것이 제1보였다. 이 바다가 아군에게 유리하다고 적군에게 불리한 바다는 아니었다. 양쪽 지휘관 모두 이 바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왜장 마다시의 작전 목표는 교전이 아니라, 이 해협을 통과해서 서해안으로 진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함대는 목포 쪽으로 흐르는 북서류에 올라타서 명량으로 들어왔다.


1597년 10월 26일 해남 앞바다는 상오 7시께 큰 사리의 만조를 이루었다. 마다시 함대는 이 만조의 앞자락을 타고 해남에서 발진했다. 마다시 함대는 오전 11시께 명량으로 진입했는데, 이때 해협은 최강 유속을 이루었다. 우수영에서 발진한 이순신 함대 13척은 적의 진로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이 좁은 해협에서는 피아간에 우회로가 없다. 물살은 이순신에게는 역류였고, 마다시에게는 순류였다.


이순신의 적은 우선 일본 군대가 아니라 겁에 질려 도망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달아나는 부하들은 붙잡아 놓고 그 대안 없음을 가르쳤다. 이 아수라 속에서 살길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싸우다 죽든지, 달아나다 죽든지, 군율에 죽든지 죽음의 방식만이 선택의 길이다. 명량은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사지(死地)이다.


해협의 물살이 바뀔 때 이순신은 공세로 전환한다. 명량 바다로 나가는 그의 마음은 칼에 시 한 줄을 새기는 그 단순성이다. 그리고 삶을 수식하지 않는 그 삼엄함이다. 대안 없는 운명 속에서 대안은 있었다. 진도대교 밑에서 삶과 죽음은 대척점에서 서로 겨누며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바다는수억 년을 이쪽저쪽으로 뒤치고 있다.


이순신의 탈정치성


옥포만(玉浦灣)은 거제도의 동쪽 포구이다. 바다가 자루처럼 오목하게 안쪽을 파고들어, 외해로 드나드는 수로의 폭은 1.6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가파른 해안 단애가 만의 안쪽을 뺑둘러서 막아섰으니 일찍부터 사람 사는 마을들은 절벽이 물러서는 물가를 골라서 들어섰다. 해안 단애가 물밑으로 뻗어내려가 바다의 수심은 벼랑처럼 갑자기 깊어지고 원양을 흔드는 파도는 여기까지 밀려들지 못해 이 깊은 물은 늘 고요하다. 만은 퇴로가 없이 오목한 형국인데, 이 갇힌 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지면, 만 안쪽 해안에 포진한 수세(守勢)의 함대는 전투대열이 허물어질 때 물러설 자리가 없고, 좁은 수로를 넘어들어온 공세(攻勢)의 함대는 뒤쪽의 수로 입구를 역봉쇄당하면 물러서지 못한다. 쳐들어가기는 쉬워도 빠져나오기는 어려운 이 바다는 병서에서 말하는 ‘괘’의 형국인데, 이런 형국을 향해 공세를 몰아가려면 아군을 우회해서 후방을 봉쇄하려는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신속히 작전을 끝낸 후 뒤로 방향을 돌려 수로 입구를 재빨리 빠져나와야 할 터이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벌어진 조·일 해군의 첫 번째 교전이었다. 전라 좌수영 전함 24척은 1592년 5월 4일 (음력) 오전 2시, 모항인 여수항에서 발진했다. 전투 보조 목적으로 징발한 어선 46척이 뒤를 따랐다. 이순신의 함대는 동진했다. 5월 7일 정오께 옥포만 안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조선 척후병들이 정박 중인 적의 함대를 발견했다. 척후병들은 조선 함대 쪽을 향해 ‘적 발견’을 알리는 신호 화살을 쏘아 올렸다. 옥포만 어귀에 머무르던 조선 함대는 즉각 옥포 선창을 향해 만 안쪽으로 달려 들었다. 적이 가까워지자 이순신은 아직 실전 경험이 없는 장졸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경거망동하지 말라. 너희는 태산과 같이 진중하라!”


우리는 퇴계(退溪, 1501~1570)의 삶의 미세한 무늬들과 마음의 결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이순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다. 퇴계에게는 일상의 삶을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하고 거기에 인문적인 해석을 부여할 수 있는 문인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 제자들이 퇴계의 마음을 후세에 전한다. 이순신의 문하는 제자가 아니라 지휘복종의 관계에 있는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무인이었으므로 현실을 설명하기보다는 현실을 주물러서 개조하려 했다.


이순신의 정치 의식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는 의주로 달아난 피난 정권 내부의 당쟁에 관한 정치적 견해를 발설하지 않았고, 기록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그의 충성은 당파성과의 관련 위에 설정된 것이 아니었고, 정치 권력과의 밀월 관계 위에 설정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치 권력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그 정치적 복속 관계가 외적을 무찌른다는 군사적 국면을 손상하지는 않았다.


군대 작전이나 진퇴, 또는 군대 운영이나 관리에 관한 한 그는 철저히도 탈정치적이었다. 그는 다만 아군의 사실과 적군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다. 압록강가의 피난 정권은 바다의 현실에 전적으로 무지했다. 임금은 어린아이처럼 보챘다. 꾸물거리지 말고 속히 함대를 몰고 나가 적을 격파하라는 교서가 연일 남쪽 바다로 내려왔다. 조정에 종이가 떨어졌으니 종이를 구해 보내라는 명령도 내려왔다. 바다에서 싸우는 해군이 어떻게 종이를 만들거나 구할 수가 있었을까. 이순신은 종이를 조정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순신의 조정의 조바심을 위로하고 복종 태도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함대는 다만 군사적 이익을 위해서만 나아가고 물러났다. 전투를 포기하고 군대를 해산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明)의 외교적 요청에 대해 이순신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의 분노는 정치적 분노가 아니라 군사적 분노이다. 전쟁의 목적은 나라의 원수를 갚고 ‘적의 종자를 없애는 것’이며 이미 돌아갈 고향도 없다고 그는 임금에게 보낸 글에서 말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지휘권 밖에 있는 군관이나 지방 수령들의 무능과 비리, 토색질, 전투기피증, 군수물자 유용, 징모 부정, 적전 근무 이탈을 임금에게 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이 한심한 관리들을 처형하거나 경질해줄 것을 문서로 작성해서 임금에게 요청했다. 그가 보낸 문건은 조정에서 공개되었다. 그는 남을 죽여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공개되는 사태에 대한 정치적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자비로운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는 무자비한 지휘관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군율을 어긴 부하들을 조용히 목 베었다. 적전 초소이탈, 정보 유출, 투항 미수, 부녀자 강간, 영내 절도, 군수물자 횡령, 작전명령 불복종, 공문서 변조, 유어비어 유포, 허위 보고와 민간인의 개를 잡아먹은 부하들을 그는 목 베고 가두고 때렸다. 전투에서 달아나 고향에 숨어 있는 자들은 그 은신처까지 형리를 보내서 기어코 목 베었다. 그의 일기에서 부하들을 목 벤 일은 바다의 날씨를 기록하는 문장과 똑같이 단순명료하다.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하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이것이 그의 비극의 근원이었다. 그는 일찍이 사석에서 말했다. “장수된 자는 작은 공로만 있어도 목숨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란 도대체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순신은 그런 회의를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는 후인들은 그런 회의를 끝내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정치는 그에게 손댈 수 없었다. 그는 기나긴 전쟁이 끝나던 날 적탄에 맞아 숨졌다.


무사와 카게무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은덕으로 서울에서 <카게무샤>를 볼 수 있었다. 그 영화가 보여준 16세기 일본 무사들의 갑주(甲冑, 요로이 가부토)는 놀랍게도 장식적이다. 그들의 갑옷은 온갖 색깔과 문양을 교직한 정교한 공예품처럼 보였다. 무사의 지위가 높을수록 그 장식적 현란함은 더욱 심해져서, 전투 지휘관이나 영주들의 갑옷은 군대의 유니폼이 아니라 독자적 개성과 위엄의 상징 체계를 드러내는 개인 패션이었다.


적의 창검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만으로는 그 갑옷의 탐미적 열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강력하고도 세련된 웅성(雄性)의 삼엄한 기상을 표출하는 것이 그 갑옷들의 공통된 지향점이겠지만, 그 웅성의 긴장미를 드러내는 방식은 제각기의 극한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 갑옷의 기능적 본질은 방어이지만, 미학적 외양은 공격이다. 패션은 수세(守勢)의 본질 위에 공세(攻勢)의 외양을 덧씌우는 과정을 따라서 전개되는데, 이 패션의 수공(守攻) 전환은 갑옷의 머리 부분에서 양식적 완성을 보인다. 그 투구와 장식은 밀리터리한 아름다움의 한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영화 <카게무샤>가 보여주는 일본 무사들의 갑옷은 구로사와 감독의 치열한 완벽주의 정신에 의해 엄격히 고증된 것이라고 한다.


16세기에 일본 사무라이 계급은 시대의 중원으로 진출했다. 중앙 통제적인 정치의 권위가 부재한 시대에, 그들은 다만 피로써 피를 씻는 판쓸이의 방식으로 전국(戰國)을 정리했다. 사무라이 계급은 그들의 호전성의 외곽을 귀족 문화의 탐미주의로 치장했고, 탐미주의와 호전성의 결합은 무사적 교양의 중요한 패턴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개나 닭까지도 모조리 베고 찌르는 살육의 싸움터에서 돌아온 저녁에, 저 피에 젖은 무사들은 덧없는 삶의 허무와 끝없는 싸움의 비애를 읊조리는 격조 높은 단가를 지어낼 수도 있었다. 그들의 시심(詩心)으니 정갈했고 그들의 언어는 새파랗게 날이 서 있었다. 갑옷과 투구는 그 탐미적 호전성을 조형으로 완성시킨다. 아름다운 갑옷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징했고, 삶과 죽음의 무게가 실린 숨막히는 도락이었으며, 그 갑옷의 조형미 속에서 전쟁은 무사의 개인적 미의식에 따라서 패션화하고 있었다.


광화문의 충무공 동상


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본 북한산과 경복궁과 그 앞으로 펼쳐진 거리는 한반도의 정치적, 이념적 정통성의 축선이다.

충무공은 이 축선의 가운데를 지킨다.

“정치란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충무공의 생애와 더불어 이 축선 한가운데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올려지는 고통스러운 질문이다




<카게무샤>가 상영되던 1998년 지난해 ‘12월의 문화 인물’은 이순신이었다.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 동상으로 서 있는 이순신의 갑옷은 투박하고도 단순하다. 그의 갑옷은 공격적 기상을 조형화하지 않는다. 이순신의 갑옷은 일본 무사들의 갑옷처럼 날아오르지 않고, 억눌려 있다. 그 갑옷은 다만 적을 죽이기 위해서 죽지 않아야 하는 사람의 자기 방어의 실용성만으로 고요하다. 그의 갑옷을 억누르는 것은 시대와 역사 전체를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사람의 한없는 경건성이다.


영화 <카게무샤>는 패션화한 전쟁의 웅장한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푸르른 무사들은 싸움닭처럼 용맹하고 영롱하다. ‘헛것’이 그 빛나는 싸움닭들의 전쟁을 지배한다. 관동(關東)의 패권을 다투던 다케다 신겐이 죽자 다케다 가문의 무사들은 다케다의 죽음을 은폐하려고 다케다를 닮은 한 불량배를 영주의 자리에 앉힌다.


다케다의 ‘허깨비’인 그 불량배는 사인화(私人化)한 권력의 비극을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헛것을 정점으로 힘이 집결되고 이 헛것이 모든 권위와 범절과 질서의 근원으로 자리잡았다. 다케다 가문의 무사들은 헛것의 권위 아래서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고, 다케다의 적들은 헛것이 두려워서 군사를 움직이지 못한다. 이 헛것의 정체가 드러나고 허수아비가 쓰러지자 다케다의 진영은 궤멸했다.


사인화한 권력은 조직의 기능과 역할에 따라서 권위를 분배하지 않는다. 권위는 최고 권력자에 대한 근접도에 따라서 분배된다. 이 사인화한 권력이 ‘헛것’의 지배를 가능케 한다. 사무라이들의 전쟁이 강렬한 장식과 상징물로 패션화하는 배경도 권력의 사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전쟁은 이민족과 싸우는 조국 수호 전쟁이 아니라 언제나 무가 가문들 사이의 패권 다툼이었다.


다케다 신겐의 진영이 헛것과 함께 궤멸하자 천하는 오다 노부나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오다는 용맹한 멋쟁이 무사였다. 그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네 글자를 도장으로 사용했다. 그의 도장 속에서 권력의 폭력적 본질로서의 ‘무(武)’는 알몸뚱이를 드러내고 있다. 오다는 부하의 칼에 죽었다. 오다가 횡사하자 그 휘하의 일개 부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정권의 수뇌부를 타도하고 천하를 장악한다. 도요토미의 권력 밑으로 전 일본의 조직된 무력은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이루며 집결했고, 이 가공할 군사력 전체를 적(敵)으로서 감당해내야 했던 무인은, 이 무덤덤한 갑옷의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의 내면은 무겁게 짓눌려 있고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다. 그는 통제된 내면의 힘으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다.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들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정치적 불운에 목숨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의주 피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정치 상황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다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다. 매일매일 바다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그는 기록했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이순신의 죽음이 ‘의도된 전사’였으며, ‘위장된 자살’이었다는 주장은 매우 신빙성 있는 정황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전후의 권력 재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다케다 신겐이 허수아비를 앞세우고 통과해나간 아수라를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으로 정리했다. 영웅이 아닌 우리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다. 역사는 모순이며 비애이다. 우리는 억눌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우리는 패션이 공격 무기가 되는 세상에서 살기 싫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힘이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카게무샤>는 슬픈 영화다.

                                                               출전: 김훈 에세이 <자전거 여행>, 생각의 나무, 2004.03.12.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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