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백의 일생>
이백(李白, 701~762)의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며 별칭은 적선인(謫仙人)이다. 그의 탄생에 관해서는 아직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데, 대체로 지금의 키르키르스탄의 타클라마칸에서 출생했으며, 당시 서역을 왕래하던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5세 때 지금의 사천성 강유로 이주하여 젊은 시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혈통 역시 불확실한데, 중동이나 중국 서북쪽 변방 이민족이라는 설, 혼혈인이라는 설, 한족이라는 설이 있다. 어려서 시경과 서경을 비롯하여 제자백가를 공부하였고, 검술이나 신선술 등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일찍부터 그의 사상적 기초는 유가뿐만 아니라 도가 등도 포함되었으며, 협객의 기질 또한 있었다. 열여덟살 무렵 대광산(大匡山)에 들어가 본격적인 글공부를 시작하였고 부근을 유람하면서 종횡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분야의 독서와 자유로운 유람, 광범위한 교제를 통해 자신의 독특한 풍격을 갖추어 나갔다. 724년 가을 이백은 고향을 떠나 형문(荊門), 초(楚)지방, 동정호(洞庭湖), 금릉, 광릉, 월(越)지방, 회계(會稽), 양주(揚州), 운몽(雲夢), 안륙(安陸)을 떠돌게 된다. 그러다 727년 안륙에서 고종(高宗) 때 재상을 지냈던 허상공(許相公)의 손녀를 처로 받아들였다.
730년 장안으로 가서 하지장(賀知章)과 만나고 하늘에서 귀양 내려온 신선이란 뜻인 ‘적선인(謫仙人)’이란 별칭을 얻게 된다.(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일이 742년에 있었던 일로 보기도 한다) 장안 근처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면서 당시 재상인 장열(張說)이나 옥진공주(玉眞公主)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려 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731년 장안을 떠나 송성(宋城), 양원(梁園)을 지나 숭산(崇山)에 은거하면서 원단구(元丹丘)를 방문하고 최종지(崔宗之) 등과 교제하게 된다. 734년에 양양(襄陽)에 머물다가, 736년에는 태원(太原)을 들른 후 숭산에 가서 원단구와 잠훈(岑勛)을 만난다. 돌아오는 길에 양양에서 맹호연(孟浩然)과 만나고 안륙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 남양(南陽), 진주(陣州), 안의(安宜), 오(吳)지방 등을 두루 유람한다. 다시 안륙으로 돌아왔다가 동로(東魯)로 이주하여 임성(任城)에 기거한다. 740년 조래산(徂徠山)에 은거하며 술과 시로 노닐었는데 이 당시 같이 지내던 이들을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고 한다.
742년 식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가족들은 남릉에 남기고 홀로 월지방으로 가 머물다가, 하지장과 옥진공주의 추천을 받아 궁중으로 들어가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여태까지 여러 산을 떠돌며 은자로서 이름을 알린 것이 결실을 맺어서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가 한 일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측근에서 글의 초안을 잡거나 연회에 불려가 흥을 돋우는 시나 짓는 정도였다. 어용문인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장안의 한량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와 술로 지내다 결국 744년 장안을 떠나 유랑의 길에 접어든다.
이백은 낙양에서 두보를 만나고, 양원에서 고적과 노닐다가 제남 자극궁(紫極宮)에서 고천사(高天師) 여귀도사(如貴道士)로부터 도교의 진록(眞籙)을 전수받는다. 장안에서의 회의와 좌절감이 이백으로 하여금 도교에 더욱 심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이백에게 있어서 일체의 세속적인 것은 가치가 없었으며 오직 술과 시를 위주로 한 방랑생활이 그에게 전부였다. 747년 양주, 금릉, 단양, 월지방, 곽산을 유람하고 금릉에 2년간 머물며 강남지역을 유랑하였다. 이 때 아내 종씨(宗氏)를 맞이하였으며 이후 유주(幽州)로 옮겼다. 754년 양주를 거쳐 남릉으로 다시 오게 되는데, 이렇게 그는 동서남북으로 계속 유랑하면서 도교사상 하에서 가무와 음주에 탐닉한다.
755년 안록산의 무리가 낙양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동로로 가 자녀들을 만나 다시 송성으로 가 부인 종씨를 데리고 남하하여 여산(廬山)에 은거하였다. 그러던 중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막부로 들어가서 어지러운 왕실의 기강을 회복하고 자신의 명예도 되찾으려 하였다. 하지만 영왕의 무리는 반란군으로 몰려 패배하고 이백 역시 모반에 가담한 죄로 심양(尋陽)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757년 옥에서 풀려나 야랑(夜郞)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759년 사면을 받아 유배생활을 마치게 되었지만 짧지 않은 유배생활과 아내와의 별거로 인해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말년을 보내다가 762년 당도(當涂)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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