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원1,2 요석 그리고 원효/김선우/민음사/2015.06.23.
한겨레신문의 칼럼을 읽다가 김선우의 발원을 알게 되었다.
원효라는 이름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원효에 대한 궁금증으로 책을 구입해 읽어보았다. 역시 알량한 상식 혹은 선입관 때문에 여기저기서 막힌다.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헤매길 여러 번 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이제 원효를 찾아가는 길 입구에 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장율사, 의상법사, 원효성사라고 한다. 속세의 먼지에 찌든 몸이 율, 법, 성 중 무엇이 가장 높은 가치일까를 생각해 본다. 종교라는 측면에서는 성이 가장 높은 가치가 아닐까?
다시 속된 의문이 생긴다. 원효는 요석을 품었지 않았는가? 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파계승에 불과한 존재가 어찌 성(聖)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겠는가? 역시 나의 선입관은 너무나 굳어 있었다. 강조의 오류로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다. 삿되고 좁은 견해부터 털어버리자.
우리가 자랑해마지 않는 호국불교의 기원을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큰 수확이다. 원효가 반전주의자임도 처음으로 알았다. 아무리 진골 출신 최초의 왕이라 할지라도 전제 군주 시대에 왕의 뜻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이 가능할까? 삼국일통의 전쟁을 반대하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는 원효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체제 전복 세력이다. 권력자의 측면에서 보면 당연히 제거의 대상이다.
김춘추와 맞서는 또 한 사람, 그의 둘째 딸 요석이다. 모든 행위가 정략적인 아버지에게 맞서는 요석도 제거의 대상이다. 원효는 요석과 하나가 됨으로써 김춘추로부터 자신과 요석을 지켜낸다. 원효와 요석의 사랑은 속물적으로 봤을 때는 분명한 파계다. 춘추가 봤을 때 원효는 힘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원효의 입장에서는 그 동안 쌓아온 헛된 명예를 버리고 백성으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나는 중생 바깥에서 중생을 가르치고자 살았습니다. 장애가 없이 무애에 이르고자 했습니다.”라는 원효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원효는 어릴 적 이름이 새벽이었다. 16살 화랑이 되기 위해 서라벌로 떠날 때 원효로 바꿨다가 요석과 몸을 섞은 뒤 소성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거사가 된다. 사랑과 자비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걸 내어 주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모든 사람이 부처로 존중받는, 국가를 넘어선 불국토 건설을 꿈꿨던 원효. 나에게도 새로운 안목이 트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