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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여행03

취미활동/국내여행

by 빛살 2017. 1. 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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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차

호텔조식(8시, 샌드위치+오렌지주스/커피) - 벽골제 - 미륵사지 - 진안휴게소 - 논공휴게소 - 포항(4시 20분 도착)


채석강(採石江)

개설

전라북도 기념물 제28호이며, 변산반도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변산반도 서쪽 끝의 격포항(格浦港) 오른쪽 닭이봉(鷄峰) 일대의 1.5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지명으로 변산팔경 중의 하나인 채석범주(彩石帆舟)가 바로 이곳을 말한다.

 

명칭 유래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해서 채석강이라고 불렀다.

 

자연환경, 형성 및 변천, 현황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바위의 기묘한 형상 때문에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격포항 오른쪽의 닭이봉 밑 바다에서 추켜올려진 단애는 수성암 단층이 여러 채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닷물의 침식을 받은 화산성 퇴적암층은 격포리층으로 역암 위에 역암과 사암, 사암과 이암의 교대층[호층, 互層], 셰일, 화산회로 이루어진 이암의 층서를 나타낸다. 퇴적환경은 화산 분출물이 깊은 호수 밑바닥에 고밀도 저탁류(底濁流, turbidity current)로 퇴적된 수중 삼각주로 해석된다. 채석강의 절벽에는 습곡, 단층구조, 관입구조와 파식대 등이 나타나며 지형ㆍ지질 현장 학습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단층(斷層)과 습곡(褶曲)이 유난히 발달된 기암절벽이 십자동굴을 비롯하여 곳곳에 해식동굴(海蝕洞窟)을 형성하고 있다.

 

현황

채석강이 끝나는 북단에는 물이 맑기로 유명한 격포해수욕장이 있다. 닭이봉 꼭대기에는 팔각정의 전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보면 멀리 위도와 칠산(七山) 앞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파랑의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파식대와 해안절벽이 후퇴하면서 낙석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어 탐방객의 접근을 통제하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채석강 남단의 격포항의 선박을 위해 방파제가 설치되어 있어 경관을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소를 떠나기 전 급히 밖으로 나와 사진을 찍었다.

멀리서만 보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닭이봉에 올라가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



명칭 유래

* 벽골제: 벼(稻)의 고을(鄕)의 둑(堤) → 볏골둑  → 벽골제(碧骨堤) - 한자의 음훈차 표기

* 호남(湖南): 벽골제 이남 혹은 호강(湖江, 지금의 錦江) 이남

* 호서(湖西): 제천 의림지(義林池) 이서 혹은 호강 이서

* 영남(嶺南): 조령(鳥嶺, 새재) 이남


아리랑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문학비


방죽 위에 올라가니 뭐가 보이는가 보다.


드넓은 부대시설에 압도되어 기대를 가지고 방죽 위에 오르면 보이는 것은 넓은 벌판뿐.

우리나라의 최고(最古), 최대(最大) 저수지, 김제 벽골제(碧骨堤).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한반도 3대 저수지로 꼽히지만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이라고 한다.

상주 공림지를 포함해서 4대 저수지라고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벽골제 설화1> 단야의 설화

신라 원성왕 때에 벽골제 보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 원덕랑이 김제태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는데 태수의 딸이었던 단야가 같이 일하면서 원덕랑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런데 벽골제 주변에는 청룡과 백룡이 살고 있었다. 백룡은 천재, 풍우, 변란 등을 막아 주었지만 청룡은 백성들을 괴롭히고 사람을 죽이는 등 온갖 피해를 입혔다. 이 청룡이 벽골제 보수의 완성 단계에서 공사를 하지 못하도록 천둥과 번개를 동원한 폭풍우를 내리고 제방을 헐려고 온갖 심술을 다 부렸다.

이때 백룡은 청룡에게 제방을 건들지 말라고 충고하였지만, 청룡은 오히려 백룡과 싸워서 백룡이 피를 흘리며 물러나게 하고 말았다. 백룡이 패배하자 청룡은 더욱 더 행패를 부리며 제방을 헐기 시작했다. 그때 청룡을 피해 달아나던 마을 주민들이 청룡의 노여움을 풀어주려면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면서 제물로 삼을 만한 처녀를 구하였다. 그런데 마침 신라에서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가 원덕랑을 찾아온 사실을 알게 된 김제태수가 월내를 청룡의 제물로 바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략을 세웠다.

그때 단야는 이 사실을 알고 고민 끝에 자기 아버지의 음모도 막고 원덕랑과 월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단야는 제방을 마구 공격하는 청룡에게 수많은 백성들이 피땀 흘려서 쌓은 제방이니 제발 헐지 말라.”고 간절히 당부한 후 청룡의 제물이 되었다. 월내 대신 단야가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은 청룡이 사는 곳에 배를 띄우고 그녀의 넋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단야의 효심과 희생정신을 기려서 이곳에 단야각과 단야루를 세웠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벽골제 설화2>

벽골제가 축조된 곳은 바다에 연한 곳이었기 때문에 9번이나 제방을 쌓아도 모두 무너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제방 쌓는 일을 걱정하고 있을 때 산신령이 나타나서 푸른 뼈로 제방을 쌓으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같은 꿈을 꾸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마침내 푸른 뼈를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은 푸른 뼈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은 제방공사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한 스님에게 푸른 뼈의 정체를 물었더니 푸른 뼈는 말의 뼈라고 알려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말의 뼈가 푸른색임을 알고 난 후 말의 뼈를 갈아서 흙에 넣었다. 그리고 그 흙으로 제방을 쌓았더니 제방이 무너지지 않고 잘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때부터 푸른 뼈를 넣어서 쌓은 제방이라 하여 푸른 뼈 제방, 벽골제(碧骨堤)’라 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뼛속에 있는 인 성분은 물질의 합성, 합금에 신기한 작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만리장성 축조 때 시체 매립,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제작 시 아기 공양설화 등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에밀레종에서는 인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륵사지에 대한 첫 느낌은 매우 넓다는 것이었다.

용화산(미륵산)을 배경을 펼쳐진 공간이 풍수를 모르는 내가 보아도 길지인 것 같다.

전망도 탁 트여 괜찮았다.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이 창건했다니 더 친숙한 느낌이다.

미륵사가 이렇게 폐사지가 된 것은 패배한 자의 서러움일 수도 있고

미륵신앙이 갖는 혁명성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백제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소이다.

굳이 복원을 하지 않고 보존만 잘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서탑은 한창 복원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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