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17년 10월 3일 12:30 - 15:00
12시에 청량산 오토 캠핑장을 나와 청량산 입구에 있는 퇴계 시비를 돌아본 후 곧장 이육사 문학관으로 향했다.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가을 풍경이 펼쳐진다.
농암종택, 도산온천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고 곧이어 퇴계종택, 선비문화수련원, 퇴계선생묘소를 알리는 안내판과 건물도 나타난다.
퇴계선생묘소 앞길을 돌아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니 산에 둘러싸인 분지가 나오고 고개가 끝나가는 지점에 이육사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산골 치고는 제법 너른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문학관을 제외하고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 중이라 주차 공간도 없어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서너 대의 승용차가 있었다.
눈에 띄는 사람이 거의 없어 혹시 문을 닫은 건 아닌가 의심을 하면서 건물 입구로 다가가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이육사 묘소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베이징에서 운명하여 그 어디쯤에 있는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향 마을인 이곳에 있었다. 여기서 2.8km. 아무 준비 없이 지나가는 길에 들른 처지라 오늘은 문학관이나 보고 나중에 다시 찾기로 했다.
요즘 준비 없이 들렀다가 제대로 못 보고 간 곳이 많아 후회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오늘도 그럴 것 같다.
홈페이지라도 찾아보고 탐방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안을 기웃거리며 찻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다 보니 시비 앞에 앉아 있는 육사 동상이 보인다.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날의 부드러운 햇살 때문인지, 커다란 시비 때문인지 정장 차림의 육사가 너무 곱상하고 왜소해 보였다.
마치 부잣집 도련님이나, 순진한 대학생 같았다.
나라면 시비에 '절정'보다는 '광야'를 택했을 것이다.
'절정'의 내용과 인물상, 배경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절정'이 개인적인 결단을 바탕으로 한 지사적인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면 ,
'광야'는 민족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예언자적 모습까지 보여 주고 있어 울림이 엄청 크다.
이육사의 동상도 원촌(현재는 원천, 遠村과 川沙를 합친 행정구역 명)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으며, 이 고을 풍경이 광야의 내용을 축소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육사는 진성 이씨로 퇴계의 14대 손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풍토가 육사를 키웠다는 생각이 이곳에 오니 저절로 든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
그런데 우리는 뿌리에 대해 관심이나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입구 쪽에서 가장 위에 있는 반듯한 건물이 육우당이다.
완전히 새 건물이다. 당호와 표지판 이외에는 육사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좀 더 고풍스러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매표소로 가니 졸고 있던 담당 직원이 동물적 감각으로 눈을 뜨고 신속하게 표를 끊어 준다.
내일이 추석이라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몇몇이 눈에 띈다.
덕분에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문학관 재개관 기념으로 전시실 영상관에서 '시인의 육필전'이 열리고 있어서 생각도 못했던 작고 시인들의 육필 원고를 볼 수 있었다.
영상실 3면을 빼곡히 채운 유명 시인들의 원고를 찬찬히 살피다가 '김소월'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간신히 '기분전환'이라는 제목을 읽어 낼 수 있었지만 처음 보는 제목이다.
처음에는 정말 김소월의 친필인가 의심이 갔다.
얼굴 사진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주로 1920년대 활동했으니 100년이 다 되어가는 글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확인하니 친필이 맞다.
가슴이 뭉쿨했다.
기분전환 / 김소월
땀, 땀, 여름볕에 땀 흘리며
호미 들고 밭고랑 타고 있어도,
어디선지 종달새 울어만 온다,
헌출한 하늘이 보입니다요, 보입니다요.
사랑, 사랑, 사랑에, 어스름을 맞은 님
오나 오나 하면서, 젊은 밤을 한소시 조바심할 때,
밟고 섰는 다리 아래 흐르는 江물 !
江물에 새벽빛이 어립니다요, 어립니다요.
김수영의 '마아케팅'도 보인다.
육사의 육필 원고 세 편 중 일경에 압수되었다가 해방 후 되찾은 '편복(박쥐)'의 원본
육사의 묵란도.
육사는 5세에 할아버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삼경을 떼었다고 한다.
16세에는 대구에서 석재 서병오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이러한 선비의 전통이 육사의 시에도 짙게 깔려 있다.
육사는 情보다는 意가 강한 시인이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돚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문장', 1939.8.
시 <청포도>의 배경은?
이 곳으로 오다가 '264 청포도 와인'이라는 입간판과 자그마한 청포도 밭을 몇 개 보았다.
안동시가 이 지역 출신 이육사에서 영감을 얻어 지역 특화 사업으로 개발한 브랜드라고 한다.
포항시도 작년부터 '이육사 청포도 문화 축제'를 청림동에 있는 청포도 문학 공원에서 개최하고 있다.
포항 사람들은 시 '청포도'의 배경이 영일만이 내려다 보이는 이곳 동해지역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호미곶에 오래 전에 청포도 시비를 세우고, 최근에는 청림동에도 세웠다.
포항과 안동이 논쟁을 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동해지역에 대규모 포도밭이 있었고, 영일만이 바라다 보이며, 1931년 대구격문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기계면 현내리에 있는 친척 이영우의 집에서 2개월간 요양을 했으며, 1936년에도 동해송도원에서 휴양을 하고, 경주 옥룡암에서 요양을 하면서 바다를 몇 번 찾았다는 정황으로 보아 '청포도'는 포항을 배경으로 한 것 같다.
일설에는 육사의 편지에 그런 내용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발견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1943년 7월에 경주 남산의 옥룡암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먼저 와 요양 중이던 이식우(전 경주고 교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시 중에서 '청포도'를 가장 아끼며,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 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 간다. 일본은 곧 끝장난다고.
어떻든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를 기억하고, 기념물들은 관리를 제대로 했으면 한다.
이육사를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로 이끈 사람이다.
육사에게 많은 영향을 준 듯하다.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는 의열단이 주축이었지만 육사는 끝내 가입하지 않은 듯하다.
의열단의 핵심이었지만 육사는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 듯하다.
1927년(23세) 장진홍 의거(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이 때 수인 번호가 264이다. 이 것을 시작으로 모두 17번 수감된다.
1943년(39세)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우고 베이징으로 갔다가 7월 모친과 맏형 원기의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피검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당했다. 이 때 청량리역에서 딸 옥비는 푸른 수의를 입고 용수를 쓰고 포승줄에 묶인 육사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이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시기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이육사의 삶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병희, 이 분의 증언이 없었다면 육사의 마지막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수많은 설에 빠져 들어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