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소 : 장기읍성 둘레길
2. 시간 : 7월 15일 (토)
3. 코스 : 장기읍성 주차장 - 장기읍성길 - 정약용길 - 송시열길 - 희망의 길 - 망해산 - 고석사(고석사에서 반환하여 원점회귀)
4. 운동시간 : 4시간 정도
총 소요시간 : 6시간 정도
운동거리 : 12km
* 가볍게 : 장기읍성길, 중간 강도 : 망해산까지 풀 : 고석사까지(모두 원점회귀)
면사무소 앞 등산로 안내 표지판
읍성으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장기벌
산 너머가 신창 앞바다
옛날에는 호랑이가 출몰했다고 한다.
읍성 어디쯤에서 다산은 바다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었겠지.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9개월간이 아니라 7개월간
목민심서는 강진에서 완성
회혼은 결혼한 지 예순 돌 되는 날이다. 회혼식은 금강혼식(diamond wedding)이라고도 한다.
죽음을 예견한 듯 회혼식 3일 전에 썼다.
1836년 2월 22일(양력 4월 7일) 다산은 75세로 삶을 마감했다. 당시 부인 풍산 홍씨는 76세.
六十風輪轉眼翩 / 穠桃春色似新婚 / 生離死別催人老 / 戚短歡長感主恩
此夜蘭詞聲更好 / 舊時霞帔墨猶痕 / 部而復合眞吾象 / 留取雙瓢付子孫
-回卺(回婚)詩-
그럽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갑시다.
주자학의 절대적 신봉자로 송자(宋子)로까지 추앙받았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
장기에서 다산은 송시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나는 포항 인근 장기읍 고석사에서 용암수형(熔岩樹型 Lava Tree Mold)을 제주도권 이외에서 최초로 발견했다. 용암수형은 화산작용에서 용암에 나무가 묻혀 구멍이 생긴 바위를 말한다. 하와이에는 용암수형 주립공원(Lava Tree Mold State Park)까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에서 70년대부터 발견되어 현재 제주도 관광지 곳곳에 마스코트로 세워두고 있다.
고석사의 구멍난 바위가 용암수형이라고 내가 판단한 것은 그 바위 아래에 돌자갈들을 물고 있는 화산 용암석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고석사 구멍난 바위는 용암이 나무와 돌자갈들 위로 지나갔음을 보여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위 구멍은 인공으로 파여지지 않았으며 그 굴의 모양이 큰 나무 등걸의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제주도 이외의 한반도 지역에서 최초로 나는 용암수형을 찾아낸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단지 이 바위가 오래된 구멍난 바위로만 여겼을 것이다. 고석사 구멍난 용암수형 바위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야 할 것이다. (07/24/15 오두 김성규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
바위 아래 돌부처
돈에 소주에, 행복하실까!
수국-고석사에서
도라지꽃-고석사에서
정체가 뭘까-고석사 돌계단에서
장기초등학교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
노론과 남인, 주자학과 실학의 묘한 조화(?)
장기와 정약용
1800년(정조 24, 39세, 庚申) 봄에 세로(世路)가 위험하다고 느껴 전원으로 돌아갈 계획을 결단하였다. 왕명으로 다시 상경했으나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였다. 겨울에 졸곡(卒哭)을 지낸 뒤 열수(洌水 : 한강의 상류로 다산의 고향을 말함) 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에 다산은 초천(苕川)의 별장으로 돌아가 형제가 함께 모여 날마다 경전을 강(講)하고, 그 당(堂)에 ‘여유(與猶-)’라는 편액을 달았다. 이해에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가 이루어졌다.
1801년(순조 1, 40세, 辛酉) 2월 8일, 사간원의 계(啓)로 인하여 9일 하옥되었다. ‘책롱사건(冊籠事件)’의 발단이었다. 19일 만인 2월 27일에 출옥되어 3월에 장기(長鬐)로 유배되었다. 二兄 약전(若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유배되었다. 3월에 장기에 도착하여 《이아술(爾雅述)》 6권과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지었는데, 겨울 옥사 때 분실되었다. 여름에 성호가 모은 1백 마디의 속담에 운을 맞춰 지은 《백언시(百諺詩)》가 이루어졌다. 10월,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약전과 함께 다시 투옥되었다. 11월, 다산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손암은 흑산도(黑山島, 소흑산도-우이도)로 유배되었다.
다산의 두 번째 유배 생활은 1801년 2월 28일 한양을 출발, 3월 9일 장기에 도착하여 마현리(馬峴里 ← 馬山里) 구석(龜石)골에 있는 군교(軍校)이자 농사꾼인 늙은 성선봉(成善封)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성선봉의 집은 지금의 장기초등학교 뒷편으로 추정되는데, 집주인의 후손은 인천으로 이주하여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다산의 장기 유배는 그 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장기에서 머무른 시간은 3월 9일 도착해서 그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던 10월 20일까지 7개월 20여 일이다.
그 기간에 130여 수의 한시와 10여 권의 책을 지었다.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다산에게는 사상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은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장기에서 지었다는 '보리타작'이라는 한시에 그 변화가 잘 나타나 있다.
보리타작(打麥行)
新篘濁酒如潼白 (신추탁주여동백)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大碗麥飯高一尺 (대완맥반고일척) 큰 사발에 보리밥, 높이가 한 자로세.
飯罷取耞登場立 (반파취가등장립)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雙肩漆澤蒜日赤 (쌍견칠택번일적)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네.
呼邪作聲擧趾齊 (호야작성거지제) 옹헤야 소리 내며 발맞추어 두드리니
須臾麥穗都狼藉 (수유맥수도랑자) 삽시간에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하네.
雜歌互答聲轉高 (잡가호답성전고)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但見屋角紛飛麥 (단견옥각분비맥) 보이느니 지붕 위에 보리티끌뿐이로다.
觀其氣色樂莫樂 (관기기색락막락)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了不以心爲形役 (요불이심위형역)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樂園樂郊不遠有 (낙원락교불원유)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何苦去作風塵客 (하고거작풍진객)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요.
'행(行, 사물이나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즐겁게 노동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양반인 화자는 보리타작에 열중하는 농민을 바라보며, 육체와 정신이 합일된 농민들의 노동이야말로 참된 삶이라고 노래하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낙원이란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이 아니라 건강한 삶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엄격한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살이를 부정하고, 평민들의 삶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있는 다산의 모습이 놀랍다. 장기에서 겪었을 다산의 심리변화 과정을 세밀하게 느껴보고 싶다.
-'유림만보' : 백성 편히 다스릴 정책을 알고 싶다면 / 농부에게 묻는 것이 첫 번째라오
'고시 27수 중 3': 부지런히 일하는 저 들판의 백성들 / 그 동작 진실로 호일(호방)하구나
이때의 호는 여유당(노자 '도덕경' 15장, 與猶는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장기 유배 시절에 딱 맞는 호이다. 다산은 다산초당이 있는 산(만덕산)의 이름이고, 사암(俟菴)이라는 호도 있다. 사(俟)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정약용이 기다리는 세상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보리타작 | 벼타작/김홍도 |
김홍도의 그림에서 당시 농민을 감독하는 양반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다산의 시선과 얼마나 비교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