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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02

취미활동/국내여행

by 빛살 2018. 11. 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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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8년 10월 30일 16:00-10월 31일 10:00


드디어 안양(安養, 서방정토, 극락)의 세계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석등과 마주한다.

무명(無明)에서 벗어난 진리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뜻일까.

국보 17호로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팔각석등이라고 한다.


서방정토를 주관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과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 때문에 건물 전체가 무거워 보인다.

건물 안팎으로 고졸(古拙)하다.

산을 닮았다.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의 주존인 소조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이다.


이 현판은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1330~1374)의 친필을 판각한 것이라고 한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은 복주(福州,안동)로 피난을 가게 된다. 현판 친필은 안동으로 피난 가는 도중 1358년 왜구에 의해 소실된 부석사 무량수전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남기고 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극락에서 바라본 속세.

어디가 극락이고 어디가 속세인지 모르겠다.

성속일여(聖俗一如)의 경지가 바로 극락이 아닐까.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이런 전망을 접할 수 있다는 게 부석사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


신라 문무왕 1년(661)에 의상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갔을 때 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이라고 불렀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아미타불 바로 밑에 머리 부분이, 석등 아래까지 꼬리 부분이 묻혀 있다-안내 책자)

조선 영조 때 이종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 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부석' 안내 표지판>에서 


'부석'의 주인공인 선묘를 모신 건물인 <선묘각>

선명한 단청의 빛깔이 쓸쓸함을 더하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신룡이 되어 의상을 호위하는 선묘의 그림

무량수전 뜰 아래 석룡이 되어 있다는 전설처럼 어쩌면 조용히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부석사가 선묘고, 의상이 아니겠는가.


초기의 사찰은 탑 중심이었다고 한다.

불상을 모신 법당을 짓기 시작하면서 그 뜰에 불탑을 세웠는데 이곳은 동쪽 둔덕에 세워져 있다.

무슨 깊은 뜻이 있을까?


의상대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조사당

의상대사는 절 창건 후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전하며 제자를 길러냈다고 한다.

단청도 없고 회색벽이 그대로 있어 얼핏 보기에는 공사 중인 건물 같다.

선비화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구조물이 그런 느낌을 가중시킨다.

그래도 국보 제19호인 건물이다.

과연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선비화(禪扉花, 골담초)는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가져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아 자란 것이라고 한다. 1,300년 이상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어 신비감을 자아낸다.


처음 보는 이름의 건물이다.

무식하게도 창고인 줄 알았다.


나중에 찾아 보니 단하소불(丹霞燒佛)의 고사로 유명한 당나라 때의 고승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 선사를 봉안하고 있어 단하각이라고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작은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왼쪽 무릎 위에 푸른색 쥐 한 마리를 손으로 잡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응진전>에는 석고로 만든 석가모니불과 십육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석가삼존불과 오백나한을 모신 전각을 나한전(羅漢殿)이라 하고, 석가모니불과 십육나한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應眞殿)이라고 한다.

<자인당>은 부처님을 자인(慈忍)대사라고 하는 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중앙에 석조여래좌상, 그 양편에 두 분의 비로자나불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당'이라는 이름이 벅차다.


삼성각 칠성, 독성(나반존자),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새로 지은 <관음전>에서의 조망도 좋았다.


오후 늦게 찾아와 제대로 살펴보지 못해 다음날 아침에 다시 찾았다.

오후는 오후대로 아침은 아침대로 좋았으나 톡 쏘는 청량음료 같은 공기와 황금빛 고요함에 빛나는 풍경이 있는 아침이 더 정감이 갔다.

건물들마다 문을 닫아놓아 겉 모습만 보고 가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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