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얇고 작은 책자에 글씨도 큼지막해 읽기에 편했다.
<고선사서당화상비>,<송고승전-송, 찬영스님>,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원효의 일생을 군더더기 없이 요점만 집중적으로 밝혀 읽기에 편했다.
정확한 자료가 부족해 글쓴이의 추정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평전의 성격이 강하다.
그동안 나에게 가장 혼란스러운 인물이 원효였다.
파계승과 성사(聖師) 사이에 놓여 있는 어마어마한 거리감 때문이었다.
이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그 거리감이 사라진 것 같았다.
글쓴이는 원효가 650년 가을에 의상과 함께 제2차 유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추정한다.
귀족불교에서 벗어나 민중들 포교에 힘쓰던 원효는 승가와 지배층의 비난을 받게 된다.
"죽일 것 같은 활이 그를 향하였고, 항하사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이치에 맞지 않는 비난을 하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옛집에 돌아가서 거사가 되었다.'(고선사서당화상비)
이에 환속을 결심하고 경산 옛집으로 돌아와 초개사를 열고 거사로서 활동한다.
원효(元曉), 소성(小性, 小姓)거사, 복성(卜性)거사 모두 거사의 이름이다.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와 같은 경전의 내용을 풀이하여 무애가를 짓고, 무애호라는 호리병박을 이용한 악기로 바가지 장단을 치며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을 교화했다. 대중에게 가장 설득력이 있는 정토사상을 바탕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외게 하며 자신은 끊임없이 불경연구에 몰두했다.
요석공주와의 사랑이야기도 거사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파계가 아니다.
태종무열왕(김춘주)의 딸이자 전사자(김흠운)의 아내이고, 문무왕(김법민)의 동생인 요석공주와의 사랑은 전쟁 등 당시 시대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국론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지배층의 요구에 원효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임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석가모니 이래 세상 사람들의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인물.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그들의 교화에 헌신한 대승보살.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의 경지에 올라 막힘이 없었던 보살행.
그의 창의성과 헌신성에 머리를 숙인다.
爲民도 民本도 아닌 與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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