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속 깊은 곳에 오랫동안 간직해 두었던 말들을 끄집어 내듯 토해낸다.
차분하지만 울림이 깊고 길다.
평소 궁금했던 것들이 있었다.
첫째, 일본군 포로 석방 문제다.
안중근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군 포로 3명(사병2, 민간인1)을 만국공법에 따라 소총까지 돌려주며 석방한다. 석방된 포로는 부대로 돌아가 안중근 부대의 정보를 보고하고 이에 안중근 부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산속에서 붙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그때 죽였어야 옳았던가를 안중근은 스스로 물었다. 안중근은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94쪽)
영화 <lone survivor>에서도 교전수칙(국제법)과 작전수행(민간인 포로 문제)간의 딜레마적 상황을 다루고 있다. 작전팀은 교전수칙을 따르다 단 한 명만 살아남는다.
전쟁 자체가 생명을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비정상적이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에 대책 없는 포로 석방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인정을 베풀거나 동정이나 배려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비웃는 '宋襄之仁', 전쟁을 할 때 적을 속이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兵不厭詐' 라는 말도 있다. 전쟁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이 실수한 것일까?
<lone survivor>에 파슈툰 왈리라는 것이 나온다. 파슈툰족의 길(인생의 강령)이라는 뜻으로 적에게 쫒겨 위험에 처한 사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고 보호해야 한다는 지침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비정상적인 상황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규범이 존재한다. 안중근은 고통을 초래했지만 대의를 잃지 않았다. 유교를 바탕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동양의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야 할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대의명분이냐? 실리냐? 거대정당의 위성정당과 정의당의 관계가 다시 떠오른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한국책임 첫 인정(한겨레/2023.02.08)
둘째, 종교와 현실의 문제이다.
뮈텔(조선대목구장)은 자신의 걱정을 신부와 신도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은 사제를 능멸했고 교회의 가르침을 배반했으며, 교회 밖으로 나가서 살인의 대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비록 영세를 받았다고 해도 더이상 교회의 자식이 아니라고 뮈텔은 하느님께 고했다. 하느님은 세속의 일에 관하여 대답하지 않았다.(185쪽)
27일 아침에 빌렘이 신자들을 소집했다. 안중근의 문중 사람들과 마을의 신자들이 청계동성당에 모였다.
빌렘은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를 베푼 일을 마을 신자들에게 말했다. 빌렘은 '나의 시체를 하얼빈에 묻으라'는 안중근의 유언을 신자들에게 전했다. 안중근이 시체는 하얼빈으로 가지 못하고 여순감옥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빌렘은 전했다.
빌렘은 신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하얼빈>은 두 개의 동양평화론(이토와 안중근), 현실의 법칙과 종교적 법칙이 충돌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안중근을 처음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한 죄인(1910. 뮈텔 주교)으로 취급했다. 1993.08.21.에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 추모미사를 집전하면서,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안중근 현양사업을 선도적으로 전개해왔다.
셋째, 안중근은 의사인가, 장군인가?
나는 한국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238쪽)
김수환 추기경의 평가대로 안중근의 행위가 정당하다면 그는 의사라기보다 장군이고 전쟁포로이다. 일본 법이 아니라 국제법으로 재판받아야 되고 안중근이 포로를 석방했듯이 그도 풀려나야 했다.
<간직하고 싶은 글들>
사형선고를 받고 사흘 후에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재판과정에서 검찰관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들으면서 안중근은 항소는 쓸데없는 것이 될 것임을 알았다. 이 세상의 배운 자들이 구사하는 지배적 언어는 헛되고 또 헛되었지만 말쑥한 논리를 갖추어서 세상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253-54쪽)
구리하라 전옥이 집행을 선언하고 나서 안중근에게 말했다.
-할말이 더 있는가?
안중근이 대답했다.
-없다. 다만 <동양 평화 만세>를 세 번 부르게 해다오.(276쪽)
*진정으로 평화를 추구했기에 끝까지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다.
옥리들이 안중근의 몸을 마차에 싣고 가서 감옥 공동묘지에 묻었다. 하관 때 가는 비가 내렸고, 문상객은 없었다. 관동도독부는 집행 날짜를 25일로 정해놓고 있었으나 서울의 통감부가 25일은 한국 황제의 생일이므로 날짜를 바꾸어야 한다고 여순감옥에 전보로 알렸다. 집행은 하루 연기되었다. 안중근은 3월 26일에 죽었다.(277쪽)
*안중근과 황제의 대비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18쪽)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주었다-----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 무직이며 포수인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인간세의 운명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안중근은 말하고 또 말한다. 안중근의 총은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작가의 말)
*권력자들은 끝까지 권력의 언저리에서 머물렀으나 민중들은 끝까지 저항하고 희생되었다. 민중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덧붙임> 안중근 후손들의 삶
안준생-1939년 박문사 화해극
안현생-1941.3.26. 박문사 참배,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 대구가톨릭대(효성여대)는 안현생씨가 1953년 4월부터 56년 3월까지 3년간 문학과 교수(불문학)로 재직한 사실이 기록된 ‘사령원부’를 발견, 이를 공개했다.
https://v.daum.net/v/20211216181802999
https://m.blog.naver.com/83parkji/221715906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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