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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22. 12. 2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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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정찬/창비/2022.06.03. 

 

장궈룽의 <패왕별희>가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요란하면서도 바닥에는 슬픔이 깔려 있고, 화려하면서도 본질은 가면과 흐릿한 조명에 가려져 있는 것 같은.

 

<패왕별희>에서 청뎨이(장궈룽)는 경극단에 들어가기 위해 어머니가 손가락 하나를 자른다. 이는 어머니와의 육체적 단절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가 일차적으로 부정당한 것이다.

극단에서 선배 段小楼duànxiăolóu(시투)의 보호를 받는다. 어머니를 대신하는 유일한 의지처이다. 극단에서 도망쳐나와 경극을 보다가 항우 역을 하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다시 돌아온다. 극단에서 강요하는 우희 역을 거부하다가 샤오러우의 폭력으로 남성성을 버리고 우희 역을 맡게 되고 이후 우희로 살아간다. 이차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것이다. 뎨이는 폭력으로 여성이 되었고, 폭력의 현실과 역사 속에서 우희로 살다가 끝내 우희로 죽는다.

그러한 비극을 처절하게 보여준 배우가 장궈룽이다. 그도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고 양성애자였다고 한다.

<패왕별희>는 개인이 어떻게 사회적 폭력에 희생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선생은 사부에게 거절당한 뎨이 어머니가 경극 학원을 나와 식칼로 아들의 여섯째 손가락을 단숨에 자르는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왜 그런 모진 선택을 했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장궈룽이 머뭇거리자 선생은 그녀의 삶 혹은 운명이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라고 말하며 장궈룽을 가만히 보았습니다.----뎨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그 어두운 곳에 손가락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겠지,라는 목소리가 말입니다."(29-31)

"일본 퇴역군인 나가토미 하쿠토는 난징에서 목을 베거나 불태워 죽이고 산 채로 파묻은 사람이 이백명이 넘는다고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천황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목숨, 심지어 자신의 목숨조차 가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살인이 어렵지 않았다고 했습니다."(44)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분은 왜 혁명을 하기로 결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이 캄캄해졌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이 캄캄해졌습니다.(56)  

"그분은 얼굴이 뜨거워진 나에게 예술가가 무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대답을 못하자 그분은 자유라고 말했습니다."(58)  

"홍위병이 나를 불렀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머릿속이 타는 듯했습니다. 혁명의 일탈자가 되지 않으려면, 그래서 카키색 군복을 입고 팔에 홍위병의 붉은 완장을 차려면 아버지를 규탄해야 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했는지 기억에 없습니다. 아무튼 뭐라고 소리치면서 손으로 아버지의 어깨를 짓눌었습니다. 아버지의 허리가 꺾이는 걸 느꼈습니다."(58-59)

<발 없는 새>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모성을 잃고 방황하는 삶을 그리고 있다.
권력은 개인의 실존을 허용하지 않는다. 개인의 실존을 끊임없이 삼킴으로써 생명력을 증대하는 것이 권력이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개인의 실존을 확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권력의 실존만 확인될 뿐이다.(65)  

"뎨이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배우의 내면에는 실재하오. 유령처럼 말이오. 그렇다고 해서 뎨이를 유령이라고 할 수 없소. 유령이 사람의 내면에 깊이 박힌 상처가 물질화된 존재라면 뎨이는 예술가에 의해 창조된 미학적 생명체이기 때문이오. 뎨이라는 생명체는 영혼이 가시투성이임에도 아름답소. 영혼 전체가 운명의 물결이 되어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말이오. 그런 생명체가 내면에 스며들었다면 캄캄한 가슴속에 따뜻한 불이 켜진 느낌이 들지 않겠소."(85)-운명의 수용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이 새는 나는 것 이외는 알지 못해.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아비정전)  

"자유는 오래전부터 사람에게 영혼의 양식이었소. 그래서 자유의 깊이가 곧 삶의 깊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오. 죽음을 선택한다는 건 삶의 영역이오. 그러니 죽음의 깊이 역시 자유의 깊이 아니겠소. 뎨이가 우희의 영혼으로 건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자신의 삶을 위해서였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소. 그런 열망의 에너지가 어디서 나왔겠소? 자유이오. 자유의 투명한 심연 말이오. 난 장궈룽의 죽음 속에 깃든 자유의 깊이를 생각해보곤 하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겠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건 장궈룽의 영혼을 감싸는 색채이오. 그 색채 때문에 아프지만 장궈룽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었소."(97)  

<역사의 아이> 꿈꿀 수 있는 존재, 희망 
아이리스 장(张纯如) 2004.11.09. 자살 
"조개의 분비물이 굳어진 결정체가 진주예요. 조개는 이물질이 들어오면 몸을 체액으로 감싸 자신을 보호해요. 진주의 섬세한 나노구조는 그런 체액들이 쌓이면서 형성된 결과물이죠. 진주 속으로 스며든 가시광선이 오묘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발산하는 건 그런 독특한 구조 때문이에요. 희생자라는 말 속에는 이런 진주의 색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The rape of Nanking>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몰랐지요. 제가 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그분들의 희생이 제가 가야 할 길을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분들의 희생 자체가 역사의 캄캄한 내부를 밝히는 진주 같은 발광체였던 거예요."(114)

利济巷위안소-나(상우)의 고모할머니(영선, 14세) 이약기

"머잖아 자신이 세상을 떠나리라는 걸 알고 있소. 하지만 그분들이 죽음보다 더 두려워하는 게 있소. 오랜 세월 동안 견뎌온 고통이 아무런 쓸모없이 자신의 육신과 함께 썩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오. 자신이 겪어온 고통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면 그건 쓸모없는 고통이 아니겠소. 그분들이 일본의 사죄를 간절히 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오. "(153)  

"신화와 종교에서 희생자는 성스러운 존재이오. 은폐된 죄와 함께 가려진 진실이 희생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오. 공동체가 희생자를 진정으로 애도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소. 하지만 야스쿠니 신앙은 다르오. 야스쿠니 공동체는 전사자들을 애도하지 않소. 추앙하오.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오. 그래서 전사자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오.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기쁨이여 감격이오. 야스쿠니의 품 안에서는 전쟁의 참혹함이 깨끗이 지워져 있소. 250여만의 죽음이 묻혀 있는 피바다의 공간에 경이롭게 피 한방울이 보이지 않소. 그러니 일본군들에 의해 죽고 부상당한 수천만 사상자들의 피바다가 눈에 보여서는 안 되는 거요. 천황주의자들이 난징학살을 부정하는 심리적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오. 이런 거대한 허위가 야스쿠니 공동체에서는 신성한 진실인 것이오."(161-2)  

"전쟁 자체의 악은 견디기가 그나마 수월해요. 찢기고 으깨어진 시신의 모습에 감정이 끓어오르지만 그 감정을 전쟁이라는 끔찍한 괴물에 퍼부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희생자에 대한 가해자의 유희는, 희생자의 고통 앞에서 가해자가 보이는 그 기이한 희열은 견디기 어려워요. 일본군이라는 특수한 집단에 대한 절망에서 인간 자체에 대한 절망으로 넘어가버리니까요."162 

<맹인 악사> 심연, 감정, 예술
"장궈룽의 내면에는 어머니에게 상처 받은 아이가 있소"(197)

"그로부터 일여년 후 장궈룽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비스듬히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이 떠오르면서 그의 몸이 기울어진 건 옆에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소."(199)  

"유령은 언제나 한조각 꿈처럼 나타나. 그는 말 너머의 세계에 있음에도 말로써 자신을 표현하려고 해. 하지만 그의 말은 말의 그림자일 뿐이야. 우린 알고 있어. 말의 그림자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상처와 그리움이지. 그래서 그를 보면 늘 놀라. 우리와 너무 닮았으니까. 때때로 그가 반딧불이처럼 느껴지기도 해. 산 자의 세계가 캄캄하니 그가 오히려 빛나는 거지. 산 자들의 캄캄한 삶 사이를 반딧불이처럼 떠도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알 수 없게 돼.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으로 보이니까."(200)  

<나비의 꿈> 차별 없는 세상. 실현의 어려움, 자살.
사람의 감각은 어머니의 몸속에서 형성된다는 것, 양수의 아늑한 촉감 속에서 어머니 몸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런 어머니의 몸속으로 아들이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유령으로 변신한다는 것, 이 모든 내용들이 무대에서 자네의 몽상을 구현하는 훌륭한 형식이네. 예술에서 형식이 곧 내용이라고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216)  

그 어렴풋함 속에는 어머니와 연관된 흔적들, 기억의 잔상들이 어른거렸을 것이오. 간혹 거기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을 수도 있소. 일상의 소리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과 함께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소리가 말이오. 친구의 피리 소리는 나에게 그렇게 들렸소."(210-20)  

난 가끔 생각해보곤 하오. 마오쩌뚱의 홍위병이 느꼈던 절대적 자유와 일본 천황의 군인들이 느꼈던 절대적 자유의 차이를 말이오.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이토록 서글픈 일이오.----역사가들이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이오, 그 심연 앞에서 역사가의 언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소. 난징학살에는 그런 심연이 있소.(229)  

언젠가부터 나는 장자의 몽상을 역사 속으로 끌어들일 수 없을까, 생각해왔소.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존재의 경계가 없소. 장자가 나비일 수도 있고, 나비가 장지일 수도 있으니 말이오. 장자와 나비의 관계를 역사의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내 몽상의 실체요.------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소. 장자가 나비를 보듯이, 나비가 장자를 보듯이, 희생자가 가해자를 보아야 하고 가해자가 희생자를 보아야 하오. 내 몽상의 괴로움은 희생자는 보이는데 가해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소. 몽상이 실현되려면 가해자가 자신이 가해자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어.(241)  

일본군과 홍위병의 폭력에는 공통점이 있소. 신적 존재를 향한 숭배요. 신적 존재를 위해서라면 어떤 행위도 용납 되오. 신적 존재의 품에 안긴 이들의 눈에는, 그 품에 안기지 못하는 이들이 벌레처럼 하찮게 보일 것이오. 적잖은 사람들은 벌레를 발로 뭉겠다고 해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런 신적 존재가 언젠가부터 내 눈에 다시 보이기 시작했소. 그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이오. 새로운 신이 두려운 것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다는 점이오. 모든 국가, 모든 민족 위에 군림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벌레로 만들어 버리오. 지금 세계는 새로운 아비규환으로 뒤덮이고 있소. 그 신의 정체가 무엇이겠소. 자본이오. 놀랍지 않소? 신의 실체가 물질이라는 사실이. 지금 인류는 새로운 신이 뿜어내는 휘황한 광채에 싸여 있소. 새로운 신의 시대가 절망스러운 것은 어떤 신의 시대보다 폭력의 형태가 깊고 광범위하다는 사실에 있소.(241-2)

아이리스 장은 <The Rape of Nanking>을 통해 학살자와 희생자가 나란히 서 있는 세계를 꿈꾸었다. 그것은 워이커씽 씨의 꿈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설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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