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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마라톤의 전설 ‘멘슨 에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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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살 2011. 5. 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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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사람인 멘슨 에른스트(Mensen Ernst1795-1843)는 소인(Sogn) 지방의 프레스빅이라는 곳에서 한 소작농 집안의 일곱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몬스 몬센 외렌(Mons Monsen Ohren)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인이 되어 이름을 바꿨다. 개명은 바다로 나가 일하다 외국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몬센 외렌은 영국 선단에서 멘슨 에른스트가 되었다.

 

1812년경 그는 바다로 나갔다. 칼레도니아 호를 타고 세계의 대양을 항해했고 인도, 호주, 중국 등의 머나먼 항구들을 방문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에 갔을 때는 달리기 시합에 나가 승리하기도 했다. 출렁거리는 배 위에서 오래 지내다가 육지에 올랐을 때 뱃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른스트가 1818년에 항해를 그만두고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는 세계의 풍습에 익숙하고,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런던은 큰 꿈을 지닌 주자가 살기에는 더 없이 완벽한 곳이었고, 많은 외국인들이 시합을 치르기 위해 그 곳에 모여들었다. 에른스트는 내기 경주를 통해 뱃사람 급료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고, 자신의 진정한 소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1820년에 런던을 떠나 독일로 가서 뮐하우젠과 딩겔슈타트 중간쯤에 있는 안넨로드라는 영지에 정착했다. 뱃사람 시절에 에른스트는 이 영지 소유자의 장인 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4년간 행복한 세월을 보낸 후 그는 다시 길을 나섰지만, 안넨로드는 늘 간절히 되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장소로 일생 동안 그의 기억 속에 남았다.

 

그는 과일과 빵 그리고 포도주를 기본 식단으로 삼아 검소하게 먹고 살았으며, 돈의 액수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어디에서나 경주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경주를 하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곤 하는 식이었다. 그는 뜨거운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았고 육류는 정규 식단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포도주는 아주 좋아했다. 그는 모험가였으며, 달리기 재능 덕분에 스포츠 여행가로서 유럽에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고, 학식 있는 사람들과 어울렸으며, 훌륭한 도서관들에 출입하면서 새로 나온 지도들을 접해 자신의 여행 계획에 활용했다. 그는 노르웨이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지만, 1826년 겨울 코펜하겐에서 국왕을 포함해 수천의 관중을 끌어 모은 스포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덴마크를 방문한 적은 있었다. 그는 소작농의 아들이었지만, 주자로서 거둔 성공 덕분에 귀족들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회 저명인사가 되었다.

 

에른스트는 70군데가 넘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왕가 사람들, 지체 높은 귀족들, 일반 대중 등 다양한 관객 앞에서 자신의 ‘작품’을 상연했다. 그는 인쇄공에게 주문한 홍보 포스터를 직접 붙이며 자신의 경주 행사를 선전했다. 그가 해당 지역의 지체 높은 인사들이나 유지들을 방문하고, 또 힘 있는 사람들이 경주를 보러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광고 효과가 있었고, 행정 관리들과의 관계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그는 명성을 누렸고, 그의 명성은 유럽의 귀족 가문과 왕가 사이에 두루 퍼져나갔다. 유럽 명문가들의 유대 관계는 모든 국경을 가로질러 맺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30년에 덴마크의 오덴세 시를 방문했다.

 

지난해부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르웨이 출신의 유명한 주자가 7월 초 파리를 포함해 영국과 프랑스를 방문했고, 최근에 이곳을 찾았다. 지난주에 그는 우리에게 매우 고차원적인 기술을 선보였는데, 발에 약 2피트 길이의 죽마를 신고 달리는 묘기였다. 셋째 장날이었던 6일(수요일)에 그는 오덴세 시내 우체국에서 베스터포트까지의 거리를 죽마를 타고 26분 만에 4번 왕복했다. 그리고 죽마를 떼고 같은 거리를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주파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먹고 살 돈을 벌지 않아도 생활이 어렵지 않은 꽤나 부유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가 체질적으로 이런 일에 익숙하고 또한 이런 수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그가 여행하는 삶의 묘미를 만끽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은 마을에서 펼치는 이런 종류의 달리기는 이제 식상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가능한 업적으로 여겨질 법한 엄청난 일을 해내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1832년 7월 11일, 그는 모스크바까지 1,600마일의 거리를 15일 안에 주파하기 위해서 파리를 떠났다. 내기꾼들은 그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그가 출발하자마자 술 취한 소작농들이 길을 가로막고 그를 꽁꽁 묶어서 수레에 실어버렸다. 그는 꾀를 내어서 소작농들에게 그들이 가진 가장 빠른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하겠다고 제안했고, 결국 이 난관에서 벗어났다. 그는 독일을 지나 폴란드로 들어서서 크라쿠프를 향해 계속 달렸다. “대로를 따라, 그리고 시골 들판을 가로질러 거침없이 뛰어가는 그를 본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 생각했고, 심지어는 미쳤거나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본 것은 비바람에 잔뜩 시달린 얼굴에 작고 야윈, 잿빛 머리카락의 사내였다. 고생이 그의 얼굴에 금세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그는 특별히 속력을 내지 않았고, 1시간에 6마일 정도를 주파했으며, 오르막에서는 속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잠을 자는 데 시간을 많이 낭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는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는 최단 시간에 최대한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길을 가다가 땅바닥에 바로 누워 노숙하는 쪽을 선호했다. 수면이나 휴식을 거의 취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능력은 어둠 속에서도 별빛과 달빛의 인도를 받아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더 많은 거리를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뱃사람으로 살던 시절에 획득한 방향감각은 그가 나침반, 목제 상한의(象限儀, 고도 측정 기구), 지도 등을 가지고 낯선 나라를 쾌속으로 통과해 지나갈 때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월 19일 저녁, 그는 헤움 근처의 러시아 땅에 당도했고, 그와 모스크바 사이에는 아직도 넓은 평원이 최후의 직선 코스로 남아 있었다. 닷새 후, 그는 20년 전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전투를 벌였던 보로디노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모스크바까지는 하루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었고, 그에게는 아직도 48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만족스러웠던 그는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이 날은 여인숙에서 묵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는 다급한 여행자의 행색이 분명한 그의 기이한 외모에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통행 허가증을 보이며 자기가 누군지 이해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허가증은 몰수당했고, 멘슨 에른스트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냉철했다. 굴뚝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벽난로 입구의 돌들을 벌린 그는 굴뚝 속으로 타고 올라가 지붕 위로 나왔는데, 그만 거기서 발각되고 말았다. 다행히 지붕에는 마당으로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가 걸쳐져 있었고, 그는 재빨리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멘슨 에른스트는 늦어도 6월 26일 밤 11시에는 도착해야 하는 모스크바를 향해 다시 길을 떠났다. 예정보다 하루 일찍, 오전 10시에 땀에 흠뻑 젖은 낯선 남자가 크렘린 궁전의 성문을 지키는 근위병 앞에 와서 멈춰 섰다. 일단 러시아인들이 상황 파악에 나섰고, 멘슨 에른스트가 여행길에 지니고 온 프랑스 신문을 건네주자 그들은 정중한 프랑스어로 그를 기쁘게 맞이해주었다. 그는 군중의 환호와 축배를 받은 후, 모스크바에서 지내는 내내 나무 의자를 잠자리로 택했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전갈은 그 시대의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인 수기 신호 체계(semaphore telegraph)를 통해 파리로 전해졌다.

 

14일 동안, 1,600마일(2,575킬로미터)을 달렸다는 것은 하루에 약 115마일(185킬로미터)을 주파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긴 기간 동안 이런 평균 주파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당시 에른스트는 최고의 절정기였고 훈련이 잘 되어 있었으며 경험이 풍부했다. 그리고 그는 잠을 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 정도 거리의 구간들을 완주하기 위해 그는 하루에 최소 18~20시간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는데, 그 정도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육체적으로 그리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길이 항상 곧고 평평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전에 경로를 계획했다 하더라도 낯선 지방을 통과할 때 방향을 제대로 잡아나가기 위해서는 시간과 기술이 필요했다. 만일 1830년대에 파리에서 모스크바까지 2주 내에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면, 그가 바로 멘슨 에른스트였다.

 

구스타브 리크(Gustav Rieck)가 1844년에 집필한 에른스트의 전기에는 당시에 그가 통과했던 장소와 날짜가 실려 있다.

 

* 살롱쉬르마른Chalons-sur-marne : 6월 11일 저녁 * 카이저라우테른Kaiserlautern : 6월 13일 아침 * 마인츠Mainz : 6월 13일 정오 * 틴츠Tinz : 6월 16일 * 산도미에슈Sandomierz : 6월 18일 저녁 * 헤움Chelm : 6월 19일 밤 * 모길료프Mogilev : 6월 21일 오후 *스몰렌스크Smolensk : 6월 23일 아침 * 모스크바Moscow : 6월 25일 아침

 

멘슨 에른스트의 주문에 맞춰 리크가 기록한 그의 전기에는 몇 군데의 엉뚱한 오류와 이야기의 맛을 살리고 글을 좀 더 읽기 좋게 만들기 위해 덧붙인 몇 가지 자유로운 상상들이 함께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입증 가능한 여러 가지 사실들도 제공한다. 그 다음해에 에른스트가 뮌헨에서 그리스의 나브플리온까지 여행했던 기록은 당시 자료들에 잘 수록되어 있다. 에른스트는 약 1700마일을 1833년 6월 7일부터 7월 1일까지 24일 42분 30초만에 주파했는데, 하루 평균 95마일(153킬로미터)씩 이동했던 셈이다. 그는 독일의 루트비히 왕이 아들인 그리스의 오토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참하고 갔다. 그리스가 산악국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업적은 모스크바까지 달렸던 업적에 필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멘슨 에른스트가 맞서 싸워야했던 것은 단지 먼 거리만이 아니었다. 그는 큰 강도 건너야 했고, 노상 강도, 야생동물, 전염병 등과 같은 예기치 않은 위험에도 직면해야 했다. 가끔은 도시 성문 앞에 서서 방문자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사람이 있어 콜레라나 흑사병이 창궐한 마을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잘 알려진 인장이 찍혀 있는 증명서 덕분에 그는 국경 지대를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는 겉보기에는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상이었지만(이를테면, 바이에른의 테레제 여왕은 이 유명한 주자의 체구가 너무 왜소해서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호주머니에 귀족들에게 받은 여행 허가서와 금화를 넣고 다니며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한 이 급사(急使)에게는 무언가 이국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 무엇인지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달린 가장 긴 거리는 1836년에 이스탄불에서 캘커타까지 4주 만에 주파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 길을 되돌아왔다. 전체 여정에는 59일이 걸렸고 거의 5,200마일(8,370킬로미터)의 거리를 주파했으니, 하루에 95마일을 뛴 셈이었다. 그가 그 머나먼 캘커타에 정말로 도착했는지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테헤란에서 보내온 증명서는 그가 돌아가는 길에 테헤란에서 이스탄불에 있는 스웨덴 공사관까지 가는 데 8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 달리기의 발단이 되었던 것은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는 영국인들이 터키에서 인도까지 속달을 보내고자 했던 욕망이었다. 그 발상이 에른스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그는 그 과제를 6주 안에 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넉넉하게 시간을 남긴 채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아시아의 새로운 지도를 연구했고, 경로의 위험성과 자기 자신의 한계를 파악했다. 그는 이러한 달리기가 얼마나 많은 계획과 노력을 요하는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온갖 난관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프리카를 가로지르기나 중국까지 달리는 꿈을 키워갔다. 1842년에 그는 독일의 귀족이자 장거리 달리기와 그리스 역사의 열렬한 애호가인 헤르만 폰 퓌클러 무스카우Herman von Pückler-Muskau 공작을 섬기게 되었다. 에른스트는 공작의 영지에 도착했고, 1842년 2월에 공작은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이곳은 내가 멘슨 에른스트라는 달리기 선수를 부리게 된 일을 제외하면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다네. 투르크풍의 복장을 한 그 사람은 마치 두 발로 뛰는 말처럼 날래다네.”

 

공작과 상의한 끝에 에른스트는 그 시대 유럽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나일 강의 원천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로 가기로 뜻을 모았다. 그는 예루살렘을 거쳐 카이로로 갔다가 나일의 저 먼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갔는데, 거기서 그만 이질에 걸려 1843년에 47세의 나이로 나일 강변에서 죽고 말았다. 몇몇 여행객들이 현지에서 그를 묻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는 아스완 댐으로 인해 지금은 커다란 인공호수가 되어버린 그곳 바닥에 누워 있을 것이다.

 

1843년 3월 21일, 독일 아우그스부르크에서 발간된 <알게마이네자이퉁Allgemeine Zeitung>이라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백(白)나일(나일 강의 원류 중 하나)의 원천을 발견할 목적으로 출발했던 유명한 도보 여행자 멘슨 에른스트가 1월 말 이질에 걸려 시에네(현재의 아스완)에서 죽었다. 그의 위대한 재능을 익히 알고 있던 여행객들이 그를 나일의 첫 번째 여울 곁에 묻힐 수 있게 해 주었다.

 

멘슨 에른스트는 공식 기록, 정확히 측정된 트랙, 선수권대회 등이 일상화되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공식적인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는 분명히 도심 거리들에서 열리는 단거리 달리기에서도 인상적인 능력을 보여줬을테지만, 그를 19세기의 직업적인 주자들과 구분해주는 특징은 꾸준한 속도로 몇 주 동안 목표를 향해 달리는 그만의 능력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픈 야망과 충동이 그의 강력한 동기였고, 그는 이 분야에서 최고의 지구력을 가진 일인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가 오로지 돈과 박수갈채만을 바라고 뛰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순진무구한 생각이다. 그는 그 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빠른 특사였고, 장거리에 관한 한 말보다도 빨랐으며, 매우 독보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사람이다.

<러닝-한편의 세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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