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들 중에 끼고 싶습니다. 저도 무척 잘 뛴답니다, 장군님.” 루이스가 장군에게 말했다.
“스피리돈, 자네가? 달리기를 한다고?” 장군은 마치 말귀를 알아듣게 하려는 듯 루이스의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점잖게 두드리면서 대답했다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는 올림픽 대회에 대비하여 이미 훈련을 시작한 몇 명의 달리기 선수들과 레슬링 선수들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마라톤을 최우선으로 준비했다. 올림픽에 완전히 광적으로 도취된,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Georgios Averoff나 이오니스 람브로스Ionis Lambros 같은 갑부들이 그리스의 승리를 기원하며 마라톤 승자에게 별도로 고대의 화병을 선물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제안에 자극을 받은 가난한 맨발의 그리스 소년들은 벌써 몇 주 동안 훈련을 해오고 있었다. 지구력을 가진 남자들, 목동들, 타고난 달리기 천재들을 찾는다는 소문이 그리스 전역에 퍼졌다. 아테네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농장의 소년들과 노동자들이 훈련을 했고, 과도한 훈련으로 젊은이가 3명이나 죽었다는 얘기가 퍼졌다.
그리스인들은 시범 경주 대회를 두 차례 개최했는데, 1896년 3월 10일에 열린 첫 번째 시합에는 12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노련한 경보 선수인 카릴라호스 바실라코스Karilahos Vasilakos 가 이 역사상 최초의 마라톤 시합에서 3시간 18분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올림픽 대회의 개최를 불과 닷새 앞두고 열린 두 번째 시범 대회에는 38명의 선수들이 참가했고, 최고 기록은 3시간 11분이었다. 무명의 스피리돈 루이스는 이 경주에서 5등으로 들어왔다.
이탈리아의 훌륭한 장거리 주자인 카를로 아이롤디Carlo Airoldi는 올림픽에 참가하고 싶었다. 그는 1896년 3월 12일에 밀라노를 떠나 걸어서 그리스로 향했고, 20일 후에는 크로아티아의 라구사(지금의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해 그곳에서부터 코르푸까지 보트를 타고 간 다음 계속해서 그리스의 파트라소까지 갔고, 거기서 아테네까지 나머지 거리를 다시 걸었다. 이렇게 해서 그가 걸은 총 거리는 830마일(1,336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는 대회 참가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리스의 심판관들은 그 이탈리아인이 길거리 경주에서 돈을 걸고 내기 시합을 해왔으며, 버펄로 빌 서커스단Buffalo Bill's a Circus에서 말이나 자전거 선수들과 달리기를 겨룬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대회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실망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고, 올림픽 역사상 아마추어 정신에 입각한 최초의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경주 전날인 1896년 4월 9일에 선수들은 아테네에서 마라톤 평원의 마을로 수송되었다. 느리고 덜컹거리는 4시간의 여행길이었다. 마라톤 마을의 읍장은 그들을 환영했고, 더욱 분발할 수 있도록 잘 먹고 마실 것을 권했다.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포도주를 좀 더 주시죠, 읍장님.” 선수들이 대답했다. 그들은 먹고, 웃고, 노래하며 늦도록 연회를 즐겼다.
경주에 참가했던 18명의 선수들 중에서 신원 미상의 독일인 한 명을 빼 놓고 보면, 나머지 중에 최소한 13명이 그리스 대표였고, 나머지 네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에드윈 ‘테디’ 플랙Edwin 'Teddy' Flack, 프랑스의 알뱅 레르므슈Albin Lermusiaux, 헝가리의 줄러 켈르너Gyula Kellner 그리고 미국의 아서 블레이크Arthur Blake였다. 출발선에 선 외국인 중 이전에 25마일을 달려본 선수는 헝가리인뿐이었다. 플랙은 마라톤 마을로 이동하던 바로 그날에 800미터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3일 전에는 1,500미터 경주에서 플랙, 블레이크, 레르므슈가 각각 1,2,3등을 차지한 상태였다. 이 경주는 강력한 중거리 주자들이 그리스인들의 근성과 애국심 그리고 그들이 신에게 올리는 기도에 맞서 싸우는 대결이었다. 시합 당일 아침 마라톤 교회에서 진행된 예배에서 신도들은 그리스의 승리를 위해 기도했고, 몇몇 선수들은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그었다.
스피리돈 루이스를 비롯해 같은 마을에서 온 3명의 다른 선수들은 친구들이 모금을 해서 사준 운동화의 끈을 단단히 조이고, 근처 이곳저곳을 몇 차례 오가며 몸을 풀었다. 숙소로 돌아오자 담당 주치의가 선수들의 무릎을 망치로 3번씩 조심스레 두드렸다. 루이스의 경우에는 4번을 두드렸는데, 무릎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자 “이 친구는 잘 해낼 것 같네요”라고 의견을 밝혔다.
오전 11시에 선수들은 각자 우유와 맥주 2병을 제공받았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1896년 4월 10일 오후 2시에 울려 퍼졌고, 가벼운 옷차림의 주자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 말에 올라타 길을 정리하고 있는 병사들, 마지막으로 조금 뒤쪽에 조심스러운 기색의 의사들을 가득 태운 수레들까지 한데 어울려 출발 지점은 축제 장소처럼 변했다. 경주로를 따라 그 지역 주민들이 모두 다 몰려 나왔는데, 그들 대부분에게는 처음 구경하는 운동 시합이었다. 그들은 선수들을 격려하며 모두에게 박수갈채를 보냈고, 음식과 음료를 제공했다.
발 빠른 외국인 선수들이 곧장 선두로 치고 나갔다. 각 선수들에게는 자전거를 타고 동행하는 도우미들이 있었다. 프랑스 선수가 선두로 잘 달렸고, 대략 절반 지점인 피케르미 마을을 통과할 때쯤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선수, 미국 선수 그리고 헝가리 선수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스피리돈 루이스는 상태가 좋아보였다. 그는 의붓아버지에게 포도주 한 잔을 받아 들고,
프랑스 선수가 1시간 34분 만에 15마일(24킬로미터) 지점인 하르바티 마을에 도착했고, 오스트레일리아 선수는 1시간 35분, 미국 선수는 1시간 38분이 걸렸다. 그리스 선수 가운데 성적이 가장 좋은 바실라코스와 루이스가 그들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오르막 구간에 들어서고 얼마 안 되어 프랑스 선수가 조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조수는 급히 달려와 마사지를 하면서, 알코올로 몸을 문질러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호기심 어린 구경꾼들에 둘러싸여 그곳에 그렇게 머물러 있는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선수가 그를 추월해서 처음으로 선두에 나섰다. 20마일(30킬로미터) 지점에서 결국 프랑스 선수는 탈진해 쓰러져버렸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실렸다. 스리피돈 루이스가 오스트레일리아 선수인 플랙을 따라잡았을 무렵에는 플랙 역시 다리에 힘이 빠져서 곧 나가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우승에 대한 예감이 루이스를 본격적으로 사로잡았다. 그리스 선수와 오스트레일리아 선수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자, 어떤 장교가 기쁨에 겨워 공중으로 총을 쏘면서 “그리스 만세!”라고 소리쳤다. 루이스는 경쟁자를 곁눈질로 살펴보고 그가 전력 질주를 하지 않는 이상 결코 자신을 앞지를 수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스퍼트에 나섰다. 잠시 후 오스트레일리아 선수는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경주를 포기한 채 마차에 실려야만 했다.
경주의 출발 총성을 울렸던 파파디아만토포울로스Papadiamantopoulos 장군이 말을 타고 루이스 옆으로 다가왔다.
“뭐 좀 마시고 싶나?”
“물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그에게 코냑을 줬고, 그는 곧바로 뱉어냈다. 장군은 루이스에게 손수건을 주었고, 루이스는 얼굴에 난 땀을 닦다가 그만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그가 주우려 하자 장군은 “힘을 아끼게!”라고 소리쳤다. 루이스는 여전히 몸 상태가 좋았고, 고향 마을에서 온 어떤 지인이 그에게 포도주 한 잔을 주자 한층 더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 도시 외곽에서는 상징적으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거리에 몰려나온 관중이 쏘아 올리는 불꽃의 소음은 마치 천둥소리 같았고, 루이스는 오렌지 조각을 건네받았으며, 심지어는 청혼을 받기까지 했다경주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관한 소문이 스타디움에 모인 7만 명의 관중들 사이에서 웅성웅성 퍼져나가고 있었다. 독일 사람인 아우구스트 괴드리히August Goedrich가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선수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공표하자, 스타디움 안에는 실망의 한숨 소리가 물결처럼 번졌다. 그러나 잠시 후 출발 총성을 울렸던 장군이 먼지를 온통 뒤집어쓴 채 말을 타고 들어와 곧장 왕가의 관람대에 자리 잡고 있던 국왕 게오르기오스Georgios에게로 다가갔다.
몇 분 후 땀에 절고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흰색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스타디움 출입문을 통과하자 우레와 같은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모자들이 공중에 넘실댔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얼싸안았다. 과거와 현재가 스피리돈 루이스라는 형상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자랑스러운 유산을 양 어깨에 지고 있었고, 올림피아의 위대한 나날 이래로 그리스에서 가장 거대하고 우렁찬 승리의 함성을 듣고 있었다. 다른 관중과 마찬가지로 깊은 감명을 받은 국왕과 황태자는 관람대 아래로 뛰어 내려와 루이스의 곁에서 함께 달렸다. 스타디움의 분위기에 당황한 루이스는 한 관중에게 결승선이 어딘지 물어 보았다. 행복했지만 모든 힘을 소진한 그는 경주를 2시간 58분 30초에 완주하고 탈진해 쓰러졌다.
그는 배가 고팠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결승선을 통과한 다른 선수들과 함께 우유와 과자를 제공받았다. 9명의 선수들이 완주했고, 마지막 선수는 3시간 58분 50초를 기록했다. 완주한 선수들 중 줄러 켈르너가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그는 3등으로 들어온 벨로카스Belokas가 도중에 마차를 탔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 문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결국 그 헝가리 선수가 2명의 그리스 선수에 뒤이어 3위에 올랐다.
루이스는 스물세 살이었고, 아테네 근처의 마루시(혹은 아마루시온이라고도 불림)라는 마을 출신이었다. 그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운동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집 근처에서 샘물을 떠 마차에 싣고 아테네까지 9마일 거리를 오가던 부지런한 일꾼이었고, 그럴 때마다 마차 옆에서 빠르게 걷거나 구보를 하곤 했을 뿐이었다.
루이스는 금메달과 우승자의 증서 그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주겠노라’는 게오르기오스 국왕의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루이스는 물을 나르는 데 필요한 좀 더 나은 마차와 좀 더 힘센 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여러 차례 결혼과 일자리를 제의받았고, 어떤 초콜릿 공장에서는 그에게 초콜릿을 평생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원래의 사회적 위치를 그대로 지켰고, 다시는 시합에 나서지 않았다. 평생 단 두 번의 시합, 그것도 일주일 간격으로 연이어 벌어진 시합에 참가해서 그렇게 엄청난 업적을 이룬 운동선수는 아마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1회 아테네올림픽 마라톤 결과 | ||||
1° |
Spiridon |
Louis |
Greece |
2:58:50 |
2° |
Kharilaos |
Vasilakos |
Greece |
3:06:03 |
3° |
Gyula |
Kellner |
Hungary |
3:06:35 |
4° |
Ioannis |
Vrettos |
Greece |
|
5° |
Eleitherios |
Papasimeon |
Greece |
|
6° |
Dimitrios |
Deligiannis |
Greece |
|
7° |
Evangelos |
Gerakeris |
Greece |
|
8° |
Stamatios |
Masouris |
Greece |
|
9° |
Sokratis |
Lagoudakis |
France |
|
Did not finish | ||||
DNF |
Teddy |
Flack |
Australia |
|
DNF |
Albin |
Lermusiaux |
France |
|
DNF |
Ioannis |
Lavrentis |
Greece |
|
DNF |
Georgios |
Grigoriou |
Greece |
|
DNF |
Ilias |
Kafetzis |
Greece |
|
DNF |
Dimitrios |
Khristopoulos |
Greece |
|
Disqualified | ||||
DIS |
Spiridon |
Belokas |
Greece |
|
마라톤의 기원 (0) | 2011.05.10 |
---|---|
울트라마라톤의 전설 ‘멘슨 에른스트’ (0) | 2011.05.03 |
센니치 가이호교(千日回峰行-1,000일간의 마라톤)04 (0) | 2011.04.26 |
센니치 가이호교(千日回峰行-1,000일간의 마라톤)03 (0) | 2011.04.26 |
센니치 가이호교(千日回峰行-1,000일간의 마라톤)02 (0) | 2011.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