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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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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살 2011. 5. 10.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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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와 싸워 승전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마라톤Marathon에서부터 아테네까지 달려온 후 탈진하여 죽었다는 전령을 기념하기 위해 달리기 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어떨까?

이는 아테네에서 올림픽을 부활시키려는 계획이 구상되고 있던 1892년에 프랑스인 미셸 브레알Michel Breal(철학자, 역사학자, 언어학자, 소르본 대학 교수)이 내놓은 제안이었다. 쿠베르탱은 그런 장거리 달리기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브레알은 자신의 제안을 놓고 투표가 진행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경주의 우승컵을 기증하겠습니다.” 그는 마라톤에서부터 아테네 시내에 있는 프니크스 언덕까지의 코스를 제안했다. 도시 바깥의 평원에서부터 고대 아테네의 전통적인 회의 장소까지의 경로인 셈이었다. 그것은 역사의 메아리와 함께하는 의지의 시험대가 될 경주였다.

 

이 발상은 그리스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곳 사람들의 애국심에 불을 붙였다. 마라톤 평원이 그 장거리 경주의 출발 지점이 될 것이고, 주자들은 25마일(40킬로미터)의 거리를 달려서 아테네에 신축한 스타디움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렇듯, 이 최초의 마라톤 경주의 배경에는 한 학자의 역사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에는 그 누구도 그 전설이 역사적으로 정확한지 여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식으로 25마일 이상을 달리는 경주는 그리스나 로마의 어떤 오래된 문헌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긴 경주는 그 거리의 10분의 1정도다. 스포츠 행사로서의 마라톤은 역사적인 뿌리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그 전설은 필리피데스Philippides, Phidippides, Pheidipides라는 전령과 관계가 있는데, 어쨌거나 그는 실존 인물이다. 미심쩍은 것은 그와 이 전설 사이의 연관성이다.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정복할 작정을 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인 마라톤 평원 근처의 해변에 상륙했다. 페르시아군은 200~300척의 전함에서 내린 병사들 그리고 1,000필의 군마와 강력한 전쟁 무기들로 싸울 채비를 갖췄다. 아테네군은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도시를 떠나 출전하면서, 노련한 전령인 필리피데스를 150마일 떨어진 스파르타로 급파하여 원군을 청하도록 하였다. 그는 다음 날로 그곳에 도착하여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스파르타 사람들은 약 엿새 후에 보름달이 뜰 때까지는 원군을 보낼 수 없었다. 종교적인 축제를 거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령은 다시 아테네를 향해 출발했고, 도중에 판Pan(그리스 신화의 목양신)이 도움을 약속했다.

 

1만 명의 아테네 군이 2만 5,000명의 페르시아 전사들을 공격하겠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처럼 보였다. 그러나 계략과 용기 그리고 기습작전이 아테네 쪽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들은 동트기 전에 공격 대형을 갖추고, 1마일을 질주하여 번개같이 공격에 나서, 두려움 없이 적진을 뚫고 돌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페르시아군 궁수들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서자 아테네군은 돌격 속도를 더욱 높였고, 페르시아군은 급기야 후퇴하기 시작했다. 적군이 갑작스레 출현하자 페르시아군은 공포를 느꼈고, 아테네군이 귀신에 들렸다고 생각했다. 전투는 칼과 활과 화살 그리고 주먹으로 싸우는 백병전이 되었고, 결국 페르시아군은 바다쪽으로 도주하여 배로 돌아가 버렸다. 몇 시간 동안 치러진 전투에서 아테네는 불과 192명의 병사를 잃은 반면에 페르시아는 무려 6,400명의 병사를 잃었다마라톤에서의 승리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대단한 위업이었다. 이는 페르시아가 처음으로 경험한 실질적인 군사적 패배였으며, 이 전투는 결과적으로 아테네와 그리스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5년, 추정)는 그곳에서 싸운 병사들을 언급하면서, 당대의 자료들을 근거로 그 전쟁을 설명한 바 있다. 그는 필리피데스뿐만 아니라 마라톤에서부터 아테네까지 달려가 승전보를 전하고 지쳐 쓰러져 죽었다는 다른 어떤 인물에 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틀림없이 누군가가 그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고, 우리는 긴장과 염려 속에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승전보를 전할 때 그의 기쁨과 자부심이 어떠했을지 능히 상상할 수 있다. 필리피데스와 같은 전령들이 이처럼 위급한 소식을 전하는 일에 통상적으로 활용되긴 했지만, 그가 그 전투 현장에 정말로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전령으로서의 그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볼 때, 그가 그렇게 비교적 짧은 거리를 달리고 난 후 정말 죽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스의 풍자시인 루키아노스Lucianos(125~180년 이후, 추정)는 필리피데스가 승리의 전령이었음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지만, 루키아노스의 문헌은 그 사건이 일어난 후 600년이 지난 뒤에야 쓰인 것이다. 플루타르크Plutarch(46~120년, 추정)는 다른 전령인 에우클레스Eucles를 지목한다. 그는 외국에 있다가 돌아와 늦지 않게 마라톤까지 뛰어가서 전투에 참가했으며, 그런 다음 완전 군장으로 다시 도시로 달려와 아테네의 당국자들에게 소식을 전한 후 탈진해 죽었다고 한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당시 그리스의 역사가들 대다수는 그 전령의 이름이 에우클레스라고 생각했으며, 에우클레스가 아니라 테르시푸스Tersippus였다고 믿는 사람들도 소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논쟁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전쟁 이후로 수세기 동안 그 전설이 생생하게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필리피데스에 관한 전설이 나머지 유럽 세계의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세기 초 그리스의 독립 투쟁은 그리스 연구에 새로운 관심을 유발하였고, 그리스의 역사를 열렬히 애호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 경(1788~1824년)은 그리스를 찾아갔고, 그리스의 혁명가들과 함께 싸웠다. 그는 마라톤 평원도 방문했는데, 그곳은 그에게 강력한 시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산들이 마라톤을 바라보고/ 마라톤은 바다를 바라본다./ 한 시간 동안 그곳에서 홀로 생각에 잠겨/ 나는 그리스가 이제 곧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꿈꾸었다./ 페르시아인들의 무덤 위에 올라선 나는/ 도저히 나 자신을 노예라 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1812~1889년) 역시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꿈꿨고, 찬미가인 <피디피데스>에서 그는 스파르타로 위험 경보를 전하고 그런 후에 마라톤에서부터 아테네까지 목숨을 건 달리기를 했던 그 전령에게 경의를 표했다.

 

많은 시인 등이 동일한 전설의 풍경 속에서 시상을 떠올렸고, 그들의 문학적인 공헌은 번성 중이던 그리스 고전 연구 및 그리스의 강렬한 애국주의와 결합하여(특히 1896년 올림픽 기획자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장거리 경주에 대한 브레알의 제안이 수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고대와 근대의 올림픽을 이어주는 최종적인 연결고리였으며,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필요로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당사자인 그리스인들도 마라톤 경주에 특별히 주목했는데, 브레알의 제안은 충분히 논의될 만한 것일뿐더러 기대감을 가져볼 수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인들은 영국과 미국이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단거리 종목들과 대조적으로, 마라톤이야말로 자신들의 역량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라톤전투에서 그리스에게 패했던 페르시아를 계승한 나라가 이란이다. 이란의 입장에서 보면 마라톤전투는 떠올리기조차 싫은 끔찍한 기억일 것이다. 따라서 이란은 지금도 마라톤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1974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에서도 마라톤 종목을 제외시켰다.

 

                                                                                                         <러닝-한 편의 세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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