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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13. 12. 1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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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이문구/문이당

 

이문구님의 장편소설 <매월당 김시습>을 읽었다.

속표지에 '92년 8월 21일 구룡포 명보서점'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20여 년전에 구입한 것이다.

여기저기 밑줄이 그어져 있으니 읽기는 읽었던 것 같은데 낡은 활자들은 새롭기만 했다.

옛날보다는 쉽게 읽히는 것 같아 조금 위안이 되었지만 아직도 매월당은 그 존재 자체가 어렵게 느꼈진다.

 

소설은 설악산 관음암(오세암)에서 벌어지는 일과 과거 회상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같은 생육신이자 가장 절친한 벗인 남효온이 죽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마지막 귀의처인 부여 무량사로 떠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읽으면서 계유정난과 사육신, 그리고 거기에 얽힌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이 조카인 어린 단종을 폐위시키고 죽음으로 내몬 일과 신숙주를 비롯한 공신들의 행태는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행위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졌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사육신은 육신을 찢기는 처참한 죽음을 택했고, 김시습은 평생을 방랑과 울분 속에서 살았고, 신숙주를 비롯한 공신들은 정의를 팔아 부귀영화를 구걸했다. 그저 침묵 속에서 산 사람들도 있었겠지..

 

불의의 시대는 정의를 꿈꾸는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 같다.

유교적 명분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을 떠나 불교에 귀의하여 설잠(雪岑)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남아있는 수염처럼 현실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이상과 현실, 유교와 불교가 뒤섞인 혼돈의 삶을 살아갔지만 그 뿌리는 유교의 명분론이다. 명분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불의한 세력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매운 정신으로 불교에 의탁한 것일 것이다. 이런 결과 김시습은 당시 주류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있었지만 이런 점 때문에 사상적으로 자유로워 질 수 있었고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금오신화>와 같은 창의적인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시습의 일생에서 나는 뜻 있는 선비의 높은 절개를 보았다. 

 

<금오신화> 속에 동원된 시문(詩文)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김시습의 의도

조선 전기는 운문문학이 발달했던 시기다. 이 시기에 지어진 <금오신화>는 많은 시문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작품을 운문에서 산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김시습은 시작(詩作)을 업으로 삼았다고 할 정도로 시작은 그의 일상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비들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감정이 고조되면 시로 표현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배경이 <금오신화>에 많은 시문을 남기게 된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소설 본래의 서사구조에 길들여진 현대 독자들은 이러한 삽입시로 읽는 데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독자들에게 남다른 감흥을 자아냈을 것이다.

작자가 의도했든 안 했든간에 이러한 삽입시는 영화에서 클로즈업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인물의 심리를 집약적으로 표현하여 개성을 살려 주며, 그러한 구체성은 서정적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서정성은 환몽적이고 비현실적인 요소와 어울려 낭만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금오신화는 일종의 조선식 뮤지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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