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19년 1월 7일 월요일
<법주사 창건>
법주사는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 율사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보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진표 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 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법주사는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 홈페이지에서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는 창건 이야기에서 보듯 원래 미륵종찰이었다.
의신 조사가 서역에서 법이 담겨진 경전을 흰 노새에 싣고 와서 이곳의 산세가 험한 것을 보고 큰 절을 세워(553년, 진흥왕 14년) 머물렀기 때문에 법주사라고 한다고도 한다.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상을 멀리하지 않는 데 세상이 산을 멀리하는 구나(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 최치원
일주문 - 호서제일가람
속리실기비각(속리산 사실기비)과 벽암대사비
수정교와 금강문
금강문 - 그 뒤로 천왕문 현판과 팔상전이 보인다.
천왕문
철당간과 당간지주, 그 뒤로 석연지가 보인다.
석연지(石蓮池 국보 제64호)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이다.
석조(石槽)
돌로 만든 물을 저장하는 용기.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미륵존불이 새겨져 있는 바위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
사리각 옆의 추래암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 마애불상.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좌상이며, 옆 바위에 새긴 지장보살과 함께 미륵 신앙이라는 법주사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장보살
사리각과 능인전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중 통도사에 봉안돼 있는 진신사리 1과를
이 곳에 가져와 조성한 세존사리탑이 건물 뒤에 있다.
능인전
‘능인(能仁)’은 석가불의 별칭으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며,
능히 사바세계(堪忍세계)의 괴로움을 참아내고 그 괴로움 속의 중생들까지 견뎌낼 분이라는 뜻에서 능인(能忍)이라 표기하기도 함.
주존인 석가모니불과 좌우협시로 미를보살과 갈라보살, 16나한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 뒤로 세존사리탑이 보인다.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자연 암반에 인위적으로 홈을 파서 몸돌을 끼워 만든 희귀 비석이다.
<금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용화보전에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사라졌고, 중건할 때 을 다시 모셨으나,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고 헐어갔다고 한다.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지하 용화전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모셨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가 모셔져 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720년(성덕왕 19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팔상전과 쌍사자석등
원통보전, 쌍사자석등, 약사전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원통보전 옆에 조성된 입상.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고 한다.
그 과보로 약왕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진영각, 명부전, 삼성각
대웅보전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법신 비로자나불상, 좌측에는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이다.
가운데 부처님은 마음을, 왼쪽 부처님은 덕을, 오른쪽 부처님은 육신을 뜻한다. 부처님은 원래 한 분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三身)으로 모셔 놓은 것이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佛殿) 중 하나이다.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 위쪽에 있는 원숭이 석상이 눈길을 끈다.
대웅보전 앞의 사천왕석등
약사전과 종각
철확
거대한 쇠솥으로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였다고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였다고도 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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