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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취미활동/국내여행

by 빛살 2019. 7. 1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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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1일 목요일 방문


* 분황(芬皇)-芬陀利(분다리 Pundarika, 白蓮花) + 覺皇如來(각황여래, 부처님)

* 분황사-백연화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는 도량. 


① 분황사 모전석탑 ②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③ 분황사 석정 ④ 지장전 터 ⑤ 금당 터 ⑥ 보광전 ⑦ 요사채 ⑧ 화장실 ⑨ 삼문 ⑩ 화장실 ⑪ 대종각 ⑫ 매표소 ⑬ 출입문 ⑭ 주차장 ⑮ 당간지주

-지금은 매표소가 삼문 옆으로 왔고, 삼문이 출입문 구실을 한다.


주차장 입구에 서 있는 대형 비석

'원효성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원효의 자취를 드물었다.

이 곳에서 원효는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혈사(穴寺)에서 원효가 죽자 아들인 설총이 원효의 유해로 반견상(返見像, 廻顧像-뒤를 돌아보는 형태의 상)을 만들어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설총은 죽을 때까지 소상(塑像)을 극진히 모셨는데 어느날 설총이 옆에서 절을 하자 문득 소상이 고개를 돌렸다는 전설이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 : 현전(現傳)하는 최고(最古)의 신라 석탑. 선덕여왕 3년(634)에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렸다. 기단이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을 지키는 인왕상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 감실 안 불상은 정면에만 남아 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돌사자가 있다.

모습이 각각 다르며 물개를 닮은 것도 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和諍國師碑趺) : 원효대사비의 받침돌. 고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분황사에 비를 세우게 하였다.(숙종 6년, 1101, 8월)  현재 비는 없어지고, 추사 김정희가 비신을 받쳤던 비대를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는 글자를 음각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분황사 석정(石井) : 우물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인데 각각 8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상징한다. 우물 안의 4각형 격자는 사성제(四聖諦)를 뜻한다고 한다. 일명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 하는데 '삼국유사 권2 원성대왕' 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원성왕 11년 을해(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웬 여자 두 명이 대궐 안뜰에 나아와 아뢰기를

"저희들은 바로 동지(東池), 청지(靑池) 두 못에 사는 용의 아내들이옵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서 우리들의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의 용 등 세 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하여 나라를 보위하는 우리 남편 되는 용들을 두고 가도록 해주소서."

라고 하였다.

왕이 하양관(河陽館-경북 영천 지방)까지 그들을 뒤쫓아가서 그들에게 친히 잔치를 베풀어주고 하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째서 우리 나라의 용 세 마리를 잡아서 이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제야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쳤다.

고기를 세 군데에 놓아주도록 하였더니 놓은 곳마다 물이 한 길이나 솟고 용이 기뻐 뛰놀면서 가버렸다. 당나라 사람은 왕의 명철하고 거룩한 데에 감복하였다.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이상호 옮김, 까치)'에서


석조 약사여래 입상과 대원심보살 사리탑


분황사에는 원래 755년(경덕왕 14) 본피부()에 사는 강고내말()이 주조 봉안한 무게 30만 6,700근의 동()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한다.(삼국유사 권 제3)

현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높이 3.45m의 입상으로 조선 영조 50년(1774)에 제작된 것이다.

원효대사의 진영이 있다고 하는데 약사불에 시선을 뺏겨 놓쳐 버렸다.



분황사 대종각 : 1인1타 자비함이 마련되어 있고, '1타에 1000원 이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1타를 하면서 기둥에 붙어 있는 타종의 의미를 되새겼다. 여운이 꽤 오래 갔다.


聞鐘聲煩惱斷 / 智慧長菩提生

離地獄出三界 / 願成佛度衆生


종 표면에 향가 '도천수관음가'가 돋을새김되어 있었다.


분황사 천수보살과 눈을 뜨게 된 맹아

경덕왕 때에 한기리(漢岐里)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나서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로 가서 왼쪽 전각 북쪽 벽에 그린 천수대비 앞에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드디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무릎을 곧추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옴을 두나이다

즈믄 손 즈믄 눈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더옵기

둘 없는 내라

하나로 그윽히 고쳐질 것이라

아아 나에게 끼쳐 주시면

놓되 쓸 자비여 얼마나 큰고  -삼국유사 권 제3


* 더 확인해야 할 것-원효대사 진영,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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