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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19. 6. 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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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이덕일 / 김영사 / 2011.09.11.

부제 : 한 인간을 둘러싼 300년 신화의 가면 벗기기


송시열은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었으며,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子라는 존칭 접미사(宋子)가 붙는 인물이다. 정조 때 국가에서 그의 문집 '송자대전'을 편찬했으며 덕치의 조광조, 도학의 이황, 학문의 이이, 예학의 김장생, 의리의 송시열 분류될 만큼 의리의 대명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전국 23개의 서원과 9개의 사우(祠宇)에 제향되었으니 가히 조선 최고의 학자라고 칭할 만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제목에서도 나타나듯 위의 모든 것이 노론에 의한 과장과 조작으로 편벽한 소인에게 주어진 공허한 찬사로, 송시열은 시대의 파탄에 책임있는 분당 정치가로 규정하고 있다.



송시열(선조 40, 1607 - 숙종15, 1689)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 최고의 격변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역사의 방향을 주자의 성리학이라는 수구로 돌려세운 사람이다.


우암이 속한 서인은 이기일원론의 율곡을 종주로 하지만 동시대인인 송익필은 예학을 중시했다. 송익필의 예학은 김장생에게로, 김장생은 다시 송시열로 이어진다. 성리학의 주류가 예학으로 바뀐 것이다. 예학은 각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행동규범(品節文字)을 강조한다. 율곡의 개혁정신이 사대부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수구적인 이데올로기로 바뀐 것이다. 결국 1,2차 예송논쟁을 일으킨다.


서인이 일으킨 인조반정은  실용과 자주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무너뜨리고 사대와 예법으로 조선을 퇴화시킨 시대착오적 사건이었다. 명분 없는 반정에 민심이 흔들리자 남인인 이원익을 영상에 앉힌다. 남인은 관제 야당이 된 것이다. 반정 후 서인들은 급격한 친명배청 정책으로 선회한다. 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초래한다. 우암은 임시직인 대군사부(종9품)에 임명되어 봉림대군을 6개월 정도 가르친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있었다. 병란 후 출사를 거부하고 은둔한다.


광해군과 더불어 개방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던 소현세자의 가족이 인조에 의해 몰살된다. 그리고 차자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종법(宗法)을 무시한 이 일은 나중에 예송논쟁으로 이어진다. 


효종은 실질적인 북벌을 주장했다. 10만의 병사만 있다면 조선보다도 인구가 적은 여진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보았다.(한족-1억 5천만, 여진-300만) 그러나 송시열은 명분적 북벌론자였다.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修政事以攘夷狄)는 대일통(大一統)사상에 근거해 북벌을 주장했지만 조선이 치욕을 받은 사실보다 명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명이 멸망한 후 도(道)가 행해지는 곳은 조선이므로 우리가 '소중화'라는 이념이 나왔다. 우암은 실질적인 북벌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청과 국교를 끊고 명을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의리를 지키는 것을 북벌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적 북벌인 것이다.

효종의 재위 10년 내내 우암이 효종과 북벌을 추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암이 출사한 기간은 1년 남짓하다. 사대부의 비협조로 북벌이 어려워지자 효종은 우암 일파에게 전권을 맡기고 기해독대로 우암과 담판을 벌인다. 송시열이 진퇴양난에 빠져 있을 때 독대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효종은 급서를 한다. 국상을 우암의 자문으로 진행하는데 국왕의 관(梓宮)이 작아 널판을 구해 잇대었다. 뒤에 예송논쟁에서 시빗거리가 되었다.

숙종조에 윤휴가 북벌을 주장하지만 경신환국 직후 사형을 당한다. 숙종과 서인 정권은 윤휴를 제거함으로써 청나라와의 갈등을 피해려했던 것이다. 윤휴가 죽은 후 노론은 우암을 북벌론자로 추앙하기 시작한다.


대동법은 부과단위를 전세처럼 토지 소유의 다소로 바꾸어 공납액을 내게하자는 법이다. 백성들은 환영했지만 양반부호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한당(漢黨)인 김육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산당(山黨)인 송시열은 기를 쓰고 반대했다. 산당의 영수 김집이 자신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학연을 중시하는 사상의 뿌리를 보는 것 같다. 


1차 예송논쟁 : 기해예송, 기해복제

인렬왕후 한씨는 소현, 봉림, 인평, 용성대군을 낳고 죽는다. 인조는 장렬왕후 조씨를 비로 맞이하는데 당시 인조는 만 43세, 비는 만 14세였다. 인조 사후 자의대비가 되는데 효종보다 5살이나 어렸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자의대비가 장자의 예를 따라 3년복(斬衰)을 입어야 하는지, 차자의 예를 따라 1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지 문제였다. 2차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자의대비가 장자부의 예를 따라 1년복을 입어야하는지 차자부의 예를 따라 9개월복(大功服)을 입어야하는지의 문제였다.

송시열은 사종지설(四種之說)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왕통을 이었지만 嫡子가 아닌 庶子-衆子)를 근거로 해 1년복을 주장한다. 왕위 계승의 적법성은 살아있는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석견(石堅)에게 있다는, 즉 효종은 부당하게 왕이 되었다는 위험한 말이 될 수 있었다. 윤휴, 허목 등 남인의 반박이 거세자 경국대전에 따라 1년복으로 정하였다. 그후에도 윤선도가 문제를 제기하자 현종은 예송논쟁을 못하도록 못박는다.


2차예송논쟁

효종 국상 때 대비가 중자(衆子)의 상복인 기년복을 입었으니 지금도 큰며느리가 아니므로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예조에서 품의했다. 대공복으로 장례를 시행 중인데 대구 유생 도신징이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논쟁이 재연되었다. 다시 체이부정이 거론되고 현종은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아 서인 정권을 갈아치우려고 한다. 이때 현종은 34세의 나이로 급서한다. 

14세의 숙종이 왕을 잇는다. 숙종이 즉위한 지 4개월 만에 우암은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다.

우암은 충청도 옹천으로  이배를 결정했었으나 영상 허적의 청으로 경상도 장기(長鬐)오 위리안치(圍籬安置) 된다. 장기에서 <朱子大全箚疑> 를 찬술한다. 장기로 윤증이 찾아와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을 고쳐달라고 청한다.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말을 보태 조롱한 것이다. 윤선거가 윤휴와 교류했기 때문이다.

숙종 5년 우암의 죄는 종묘에 고해지고(告廟) 거제도로 위리안치된다. 


오로지 주자만을 절대적인 존재로 추종했던 우암과 독창적인 사상을 지녔던 윤휴는 갈등할 수 밖에 없었다. 우암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성리학, 주자학)으로 공격한다. 우암과 윤휴의 갈등에 윤선거가 끼어들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는 원인이 된다.

현종의 온양 행차에 대한 이경석의 상차를 오해하여 수이강(壽而康: 오래 살고 강녕하여)이라는 말로 이경석이 왕명에 의해 삼전도비문을 지은 것을 조롱한다. 우암은 한미하던 시절 이경석을 주인삼아 서울에 오면 초라한 차림으로 그의 집을 찾곤 했었다. 이경석은 무대응으로 일관했지만 후에 박세당은 이경석의 신도비문에서 강력히 비판하고 나아가 이경석을 봉황에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하기도 했다.  


숙종의 오른팔 김서주 일행은 고변을 일삼는 공작정치를 행한다. 김석주의 심복 김익훈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은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나뉜다. 우암은 처음에는 김익훈 처벌에 동조했으나 서인 정권의 실세들과 만난 후 반대쪽으로 돌아선다. 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다.


귀인 장씨(장옥정)가 숙종의 아들을 낳는다. 그런데 장씨는 천인 출신으로 남인과 관계가 있다. 이에 서인들이 강력히 반대해 왔었다. 왕자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원자는 당연히 다음 세자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장씨를 내명부 정1품 희빈으로 책봉한다.

고묘가 끝난 일은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다. 그런데 우암은 원자 정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분노한 숙종은 우암을 삭탈관직하고 성밖으로 쫓아낸다. 그리고 서인 정권에서 남인 정권으로 넘어가는 기사환국이 일어난다. 83살의 우암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이 와중에 노론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우암은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인의 반발을 두려워한 남인의 반대를 받아들여 숙종은 국문(鞫問)을 사사(賜死)로 고치게 한다. 우암은 정음에서 사약을 들이켰다.


문하(門下:송시열)께서는 한결같이 주자를 종주로 하고 사업은 대의에 두었으나, 자신에게 찬동하는 자는 친밀하게 대하고 바른 말로 뜻을 어기는 자는 화를 당하니 이 때문에 문하의 큰 이름이 온 세상을 덮지만 진실한 덕은 안으로 병듭니다. 굳세다[剛:강]는 것은 자신을 이기는 것을 말함인데 문하는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굳세다고 하니 이는 참된 굳셈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문하의 위력을 두려워해서 복종하는 것이지 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완연한 부귀가의 모습일 뿐 유학자의 기상이 없습니다.


문하의 문장에 이르러서는 주자를 인용하지 않으면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듯하지만 혹 주자라는 이름만 알고 뜻은 알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의견을 먼저 세워 놓고 주자를 끌어내 거기에 빙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다시피 하니 사람들이 모두 겉으로는 대항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불복하는 것입니다.


평생 춘추의 대의를 주창한다 하지만 말로만 하는 체하고 실제로는 하는 일이 없으니 안으로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수치를 푸는 계획이 조금도 진전된 것이 없이 다만 문하의 벼슬만 높아지고 이름만 널리 퍼진 것뿐입니다.

신유의서(辛酉擬書)-윤증


그의 문인들에게 송시열은 사표 그대로였다. 정치적인 삶이 아닌 개인적인 삶으로 볼 때 그는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인물이었다. <소학>은 바로 그의 평생에 걸친 수신 교과서였다. 어릴 때부터  주색을 멀리한 것은 물론이다. 또 검소함을 으뜸으로 삼았다. 심지어는 조복(朝服)도 비단이 아닌 무명을 사용할 정도였다. 망건에 금관자도 달지 않았다.


그의 가정 생활도 <소학>의 실현이었다. 효도는 그에게 성인의 도, 그 자체였다. 효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께서 네게 성명(性命)의 온전함을 주셨으니 이 속에는 모든 선이 다 갖추어졌다. 하나의 선이라도 밝히지 않으면 그것이 곧 불효이고, 하나의 선이라도 행하지 않으면 역시 불효다."

그는 부모가 생전에 가난하여 요도 없이 지낸 일이 있다고 하여 평생 요를 깔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효자였다. 부모가 돌아가자 중형(仲兄)을 아버지 섬기듯 하면서도 두 아우에게는 우애와 엄정함을 가르쳤다. 그는 확고한 가부장제 지지자이지만 부인에 대한 예우는 깍듯했다. 집에서는 부인을 손님같이 대했다. 며칠 이상 바깥출입을 하러 나갈 때는 부부가 서로 절하고 귀가할 때도 절하였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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