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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19. 10. 3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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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05.06.15.

 

청소년 권장도서로 쉽게 풀어썼다.

 

책 내용은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잘 말해주고 있다.

 

'懲毖'라는 말은 <시경> '소비(小毖 대비하는 마음)'의 "予其懲而毖後患 내가 지금 깨우치고 경계하는 건 후환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네)"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은 상하 2권과 '녹후잡기(錄後雜記)', <근포집> 2권, <진사록> 9권, <군문등록> 2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책은 녹후잡기까지만 수록되어 있다. 징비록은 임란의 원인과 전황, 녹후잡기는 임란 당시 전쟁 수행 책임자 중 최고위직에 있던 저자가 보고 들은 내용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국보 제123호로 참 소중한 책이다.(난중일기 국보 67호)

 

고립은 위험을 초래한다.

조선은 200년 간의 평화로 위기의식이 없었고, 성종 이후는 일본에 통신사도 파견하지 않아서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 눈과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

 

문(文)에 치우쳐 전쟁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모든 일에는 전문가가 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하여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던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통신사 사절 홀대와 아베의 한국을 대하는 태도의 유사점.

선조의 도망과 이승만의 도망.

1592년 4월 13일 전쟁이 시작된 뒤 4월 30일에 선조는 한양을 버린다. 성주는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는 일본은 빠른 시일 내에 선조를 사로잡고 전라도를 보급기지화하여 명나라를 침략하려고 했다. 그런데 선조는 너무 쉽게 한양을 버림으로써 일본의 허를 찔러 버렸다. 그리고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 의병 활동, 겨울의 추위 등으로 일본의 예봉은 무디어졌다. 그러나 선조는 도망가면서 조선까지 버릴 작정이었다. 그해 6월 13일 영변에 도착하여 명나라에 망명할 뜻을 표명하고, 6월 16일 정주에서 명나라에 망명의사를 타진했다. 명나라의 거부와 망명을 하더라도 수행인원을 100명으로 제한한다는 조건 때문에 결국은 포기했다.

강화 반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에서 휴전 반대.

임진왜란 때는 그래도 이순신이라는 들보가 있어서 우리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세에 힘을 빌리면 빌리는 만큼 제한을 받아야 한다. 일본이 평양에서 후퇴할 때 전쟁을 끝낼 수 있었지만 명나라와 우리의 소극적인 태도로 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외세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순신과 진린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가 떠오른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역사적 사실과 계유정난 등 정변과 연산군 폐위 등으로 조선의 왕들은 항상 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것 같다. 선조와 인조처럼.

 

명나라 심유경이 김명원에게 보낸 글 중에 나오는 것이다.

"향후 계책을 세우는 것은 귀국의 책임이라더니 원대한 계책은 듣지도 않고 오직 궐 밖에 엎드려 우는 계책밖에는 세우지 않는지요? ……… '한가할 때는 근본을 다스리고 급할 때는 보이는 것부터 다스린다.'고 하는 말에 따라 평소에 훈련을 열심히 하고 때가 되면 적을 제압해야 할 터인데 귀국에서는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징비록의 교훈을 새겼다면 병자호란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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