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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유적지 일원

취미활동/국내여행

by 빛살 2019. 9. 2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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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문 일시 : 2019.09.14. 저녁- 2019.09.15. 한때

* 방문 일정 : 정약용유적지 - 실학박물관 - 다산생태공원 - 마재성지

<다산유적지>

정약용유적지 : 관람시간, 09:00-18:00 , 연중무휴(명절 제외), 관람 종료 30분 전 입장

다산유적지 입구. 다산문화관 건물. 주차장 길가에 다산이 학연과 학유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 유적지 곳곳에 있는 글을 정리해보았다.(파일첨부)

유배지에서보낸편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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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왼쪽에 있는 천일각(강진 다산초당의 천일각을 그대로 본뜸), 다산생애비, 책탑(500여 권의 저서를 상징하는 석탑).

문화관에 들어가기 전 길가에 '옛뜻' 시비가 있었다. 다산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해 옮겼다. 가슴이 저렸다.

 

   옛뜻古意
 
한강물 흘러흘러 쉬지 않고   洌水流不息(열수류불식)
삼각산 높고 높아 끝이 없도다.  三角高無極(삼각고무극)
산천은 변해 바뀔지라도  河山有遷變(하산유천변)   
당파 짓는 나쁜 버릇 깨부술 날이 없구나.  朋淫破無日(붕음파무일)   
한 사람이 모함을 하면  一夫作射工(일부작사공)   
뭇 입들이 차례로 전파하여  衆喙遞傳驛(중훼체전역)   
간사한 말들이 사실처럼 되거니  詖邪旣得志(피사기득지)
정직한 자 어느 곳에 둥지를 틀랴.  正直安所宅(정직안소택)
외로운 난새는 깃털이 약해  孤鸞羽毛弱(고란우모약)
가시 찔림 감당할 수 없기에  未堪受枳棘(미감수지극)   
구차하게 돛단배 얻어 타고서  聊乘一帆風(요승일범풍)
멀리멀리 서울을 떠나리라네.  香香辭京國(향향사경국)
방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放浪非敢慕(방랑비감모)
머물러도 쓸데없음 짐작한다오.  濡滯諒無益(유체량무익)
대궐문을 범과 표범이 지키니   虎豹守天閽(호표수천혼)
무슨 수로 이내 속마음 아뢰오리  何繇達衷臆(하요달충억)
옛 사람의 지극한 교훈 있거니  古人有至訓(고인유지훈)
향원(鄕愿)은 덕(德)의 도적이라네.  鄕愿德之賊(향원덕지적)
                                           <여유당집 권10, 1800년>

 

* 사공(射工) : 물여우. 날도래과에 속하는 곤충의 유충으로, 독이 있어 모래를 머금었다가 사람을 쏘면 종기가 생긴다고 한다.
* 난(鸞) : 상상 속의 영조(靈鳥). 털은 오채(五彩)를 갖추었고 소리는 오음(五音)에 맞는다고 한다.
* 향원(鄕愿) : 고려•조선 시대 각 향리(鄕里)에서 겉으로는 덕이 있는 사람인 체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여 실속을 채우던 악덕 토호(土豪). 함부로 토목 사업을 일으켜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거나, 환곡(還穀)을 중간에서 착복하여 백성에게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게 하거나, 정수(定數) 이외의 공물을 착복하거나, 촌민을 불러모아 수시로 사냥을 하여 농사를 방해하는 등의 일을 하던 자를 일컬음.
원래는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에서 유래한 말임.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하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위선자.

 

문화관 입구에 걸린 안내판.

왼쪽부터 장자크 루소 탄생 300주년, 헤르만 헤세 사망 50주기,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 클로드 드뷔시 탄생 150주년.

 

문화관 안에서 본 '회합(匯合)'이라는 말이 낯설다.

검색해 보니 '滙=물 돌아 나갈 회'라고 나온다.

물처럼 돌고 돌아 흘러서 다시 한곳으로 모인다는 뜻인 것 같다.

이 곳에서 태어나 관직 생활과 포항 장기, 전남 강진 유배,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것이 '회합'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린다.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어 실학을 집대성한 것도 '회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념관 앞뜰 왼쪽에 다산 동상이 있다.

과골삼천(踝骨三穿 - 앉아서 책을 보느라 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났다.)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독서광인 다산답게 책을 들고 있다. 

문도사(文度祠). 문도공(文度公)은 다산의 시호(諡號)다. 다산이 영정(影幀)이 있는 곳으로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壙中本
 
정약용 선생이 61세 되던 1822, 당신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묘지명(墓誌銘)이라는 문체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 것으로,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과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이 있으며, 아래 명()은 광중본으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글이다.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명은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는 재원(載遠)이다. 음직(蔭職)으로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윤씨(海南尹氏)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616일에 용()을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정조7, 1783)에 경의(經義)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정조13, 1789)에 갑과(甲科)의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直講), 비변사 낭관(郎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었다. 을묘년(정조19, 1795)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郎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가경 정사년(정조21, 1797)에 곡산 도호부사(都護府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정조23, 1799)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 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경신년(정조 24, 1800) 6월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화()가 일어났다.
 
15(영조52, 1776)에 풍산 홍씨(豊山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선생 익(李先生瀷)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 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11, 1787) 아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정조15, 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 버렸다. 을묘년(정조19, 1795) 여름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순조1, 180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 얼마 뒤에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의 의()를 올렸으나 오직 서 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되고, ()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를 얻으니, 용과 전()이 또 체포당하였다. 일을 안찰한 결과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의 작처(酌處)를 입어 용()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계해년(순조3, 180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臣) 서용보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순조10, 18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寃)으로 방축 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순조18, 18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이 적소(謫所)에 있은 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 ()』․『()』․『()』․『()』․『()』․『춘추(春秋)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역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안옥(按獄무비(武備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簒)한 것이 거의 2백권이니모두 성인의 경()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조대왕의 총애와 가장(嘉獎)이 동열(同列)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내구마(內廐馬)·문피(文皮)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陣)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 주셨다. 항상 규장각(奎章閣)·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았다. 밤마다 진찬(珍饌)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그 사람됨이 선()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순조22, 18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 버리고 밤낮으로 성찰(省察)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에 배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開國)한 뒤로 한양(漢陽)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판서 옥형(玉亨), 좌찬성(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否塞)하여 마현(馬峴)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고조의 휘()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께서만 진사를 하였다
 
홍씨(洪氏)63녀를 낳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 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 바라던 대로였다. ()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를 입어 근밀(近密)에 들어 갔네(荷主之寵 入居宥密)
임금의 복심(腹心)되어 조석으로 모셨도다(爲之腹心 朝夕以昵)
하늘의 총애를 입어 우충(愚衷)이 열리었네(荷天之寵 牖其愚衷)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精硏六經  妙解微通)
소인이 해성 해치니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儉人旣長  天用玉汝)
거두어 간직하고 장차 훨훨 노니련다(斂而藏之  將用矯矯然遐擧)


비석 옆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다산 부부의 묘지이다.

文度公茶山丁若鏞(문도공다산정약용), 淑夫人豊山洪氏(숙부인풍산홍씨)之墓(지묘)

묘지에서 생가, 사당 등 유적지 모든 것이 보인다. 이런 게 회합(滙合)일까?

묘지에서 내려오다 본 여유당(다산 생가)

정면에서 본 여유당

 

여유당(與猶堂)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으로 집 앞으로 내 (川)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 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水閣)이라고도 표현하였다.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선생이 1800년(정조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으로 여유당기(與猶堂記)를 통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하랴.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깍는 듯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내가 이러한 의미를 해독해 낸 지가 6,7년이나 된다. 당(堂)의 이름으로 하고 싶었지만 이윽고 다시 생각해 보고 그만두어 버렸었다. 초천(苕川)으로 돌아옴에 이르러서 비로소 써가지고 문미(門楣)에 붙여놓고 아울러 그 이름 붙인 이유를 기록해서 아이들에게 보도록 하였다.
 
(배경설명)
정약용 선생이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老論)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 해는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남인의 정치적 스승이었으며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 채제공 선생이 돌아가신 해이기도 했는데, 이 무렵 정조는 정약용 선생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흔한 광경으로 선생이 판서(判書)가 되고 재상(宰相)이 되어 제2의 채제공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론 벽파는 선생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이는 1797년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모두 고백했고, 그 뒤 곡산부사로 외직(外職)에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온 터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노론은 교활하게도 형 약전을 공격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는데, 가족이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분노했고 세상이 혐오스러웠다.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선생은 자명소(子明疏)를 올려 관직을 그만두기를 청하였다. 정조는 계속 만류하였지만 선생이 벼슬을 거부하자 할 수 없이 그해 7월 26일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800년(정조24년) 봄에 아버지 정재원이 낙향했던 것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서 집의 문미(門楣)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하였다.
그 해 6월 12일 달밤에 정조의 유시를 전하려 규장각 아전이 한서선(漢書選) 10질을 가지고 찾아왔다. “5질은 남겨서 가전(家傳)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나머지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를 부르리라.” 선생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 노론 틈에 정조를 홀로 남겨놓고 온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은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는 노론에 둘러싸여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안내 표지판-

*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 노자 15장

 

성리학 지상주의 세상에서 천주교는 이단 중의 이단이었을 것이다.

천주교와 노론 세력(특히 서용보)은 다산을 옥죄는 포승줄이었을 것이다.

목숨이 달린 일이었기 때문에 몹시 조심하는 다산의 모습이 보인다.

생가 외양간의 황소. 굳센 모습이지만 눈은 왠지 사방을 살피는 것 같다.

다산유적지 정문. 실학연수(實學淵藪)-실학이 번성한 곳

연수: 못에 물고기가 모여들고 숲에 새들이 모여드는 것과 같이, 여러 사람이나 물건이 모여드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밖에서 본 유적지 모습. 수원화성, 거중기 모형, 여유당이 보인다.

 

<실학박물관>

* 위치 : 다산유적지 끝자락 맞은편

- 앞으로는 해설사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실학의 학파와 전개

22전시실에서 3전시실로 가는 통로에 대표적인 실학자와 그의 중심사상을 게시해 놓고 있었다.

 

朝鮮人朝鮮詩 나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시를 쓰겠노라 - 정약용

域外春秋 공자가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분명히 우리나라의 역사를 썼을 것이다 - 홍대용

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자 - 박지원

文明都雅 풍요롭고 바르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자 - 박제가

實事求是 바른 것에 근거하여 옳은 것을 구해야 한다 - 김정희

承順事務 현실과 괴리된 학문을 버리고 지금에 필요한 사무를 익혀야 한다 - 최한기

 

<마재성지>

* 위치 : 다산유적지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짐

마재성지는 정약종 일가의 가족묘지 같은 느낌이다.

오른쪽으로 정약종, 유조이, 정철상, 정하상, 정정혜의 초상이 늘어서 있다.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1801년 신유박해 때 효수.

유소사(유조이). 세실리아(체칠리아). 약종의 두 번째 부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

1: 정철상, 가롤로, 첫 번째 부인 소생. 신유박해 때 순교.

2: 정하상. 바오로. 조선인 최초의 신부로 결정되었으나 기해박해 때 순교.

1: 정정혜. 엘리사벳, 개해박해 때 순교.

 

모두 순교했지만 그림의 표정만큼은 지극히 온화하였다.

약종동산.

4형제 중 맏이인 약현은 유교, 둘째와 막내인 약전과 약용은 천주교에서 다시 유교, 셋째는 가족 모두가 순교.

약종과 철상이 신해박해 때 순교하고 가족이 약용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약용의 가족은 그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같은 해에 순교한 약종과 철상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약종의 삶과 약용의 삶.

그것은 선택의 문제일까?

 

<다산생태공원>

* 위치 : 다산유적지 맞은편 샛길로 곧바로 갈 수 있다.

빗방울이 딴짓하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한두 방울 떨어지는 저녁, 잘 가꾸어진 공원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냈다.(14일)

유배지에서보낸편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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