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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유배문화체험촌

취미활동/국내여행

by 빛살 2019. 10. 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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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방 일시 : 2019년 9월 30일 오후 

입구
체험촌 안내도
관리사무소와 망향교 사이의 공간-안내판과 형벌체험장

유배와 장기

장기는 신라 때는 지답현(只沓縣)인데, 남으로는 경주의 감포 경계까지 북으로는 현재의 구룡포와 호미곶까지를 관장하던 동해안의 중심지역이었다. 관내에는 신라 때에 설치한 시령산성 등의 고대 산성들과 고려 현종 2(1011)과 조선 세종 21(1439)에 쌓았다는 장기읍성이 있다. 장기는 또한 조선시대 유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형벌제도로 유배형이 실시되고 세종 때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이 정비됨에 따라 장기는 경성(京城)에서 유3천리(流三千里)의 빈해(濱海 서울에서 30개 역 밖에 있는 바닷가 고을)지역에 해당되어 유배지로 자주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등에서 장기로 유배가 결정된 유배인은 모두 149211(남자 172, 여자 39)으로 확인된다. 이는 단일 현()지역 유배인 수로는 국내에서 제일 많은 숫자이다. 조선시대 유배 형기(刑期)는 원칙적으로 종신형이었으며, 정치범으로 단죄된 유배자는 임금의 사면이나 정세의 변동이 없는 한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도록 하였다. 대부분 왕의 사면이나 정세의 변동으로 다시 되돌아가 정계에 복귀하여 승승장구한 사람들도 많으나,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고,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도 있다.


형벌제도로서 유배(流配)

유배는 죄인을 멀리 귀양 보낸다는 뜻이지만, ()와 배()는 서로 의미가 다르다. 유(流)는 아주 먼 곳으로 보내 살게 한다는 뜻이며, 배(配는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도록 어느 곳에 짝지어 배속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종 12년에는 전국적으로 유배지를 단축하고 혹은 우회하여 도착시키는 식으로 변용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배소상정법을 정비하였다. 이에 따르면 장기는 경성을 중심으로 유3천리 지역에 해당하는 빈해각관(濱海各官)에 해당되었다. 조선 후기 의금부에서 죄인의 배소를 지정한 곳을 기록한 의금부노정기에도 장기를 유배지로 지정함으로써 이 곳이 조선 내내 유배지로 널리 활용되었다.

장기로 오는 유배길은 한양-남태령-안성(죽산)-충주-문경-상주-함창-의흥-신령-영천-경주-장기로 연결되는 영남대로를 이용했다.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이고 하루 95리를 걸어 9일 반이 걸려야 도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하면 그 다음부터는 지방 수령인 장기현감이 모든 책임을 떠맡게 된다. 배소(配所) 및 그들을 맡아 보살펴 줄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정하고 유배인에 대한 정기적인 감시를 한다. 정기적인 감시를 점고(點考)라 하는데, 현감이 한 달에 두 번 점고를 하여 유배인의 상태를 확인하며 관리를 하였다. 유배인을 맡은 보수주인은 주로 지역의 아전이나 군교, 관노 또는 지역의 유지들이 맡았다. 우암 송시열의 보수주인은 장기에서 오랫동안 선비로서 터를 일구어 온 오도전(吳道全)이었고, 다산 정약용은 군교 출신인 성선봉(成善封)을 보수주인으로 삼았다.

 

조선 최고의 논객을 품었던 장기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치여 세력을 잃고 불우한 운명으로 유배된 관리 중에는 학문·사상적으로 걸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고난 속에서도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을 짓는 등 창작활동은 물론 지역에서 인재들을 양성하여 유배지에 독특한 유배문화를 남기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같은 석학에서부터 영의정에 이르는 관리들까지 수많은 현량(賢良)과 학자들이 머물다 간 장기가 그 대표적인 곳이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장기에 머물면서 결코 유배지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여기지 않고 학문연구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고, 그가 목민심서를 저술하는데도 큰 계기가 되었다. 그보다 120여 년 먼저 온 우암 송시열은 4년여 간 장기에 머물면서 남인 세력들이 득세한 경상도에 노론계의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후학양성에도 힘을 썼다.

이곳을 거쳐 간 유배인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되었다. 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작은 고을이었지만 중앙의 올곧은 관리들과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배문화를 이어받아 장기면은 서원이 17개로 경북에서 가장 많은 고장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경주성 탈환에 일조를 한 이대임, 서방경, 서극인 등과 같은 의병장, 장헌문, 정치익 같은 구한말 의병, 애국지사 엄주동 같은 선열들이 이런 사상적 토대 위에서 배출될 수 있었다.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적비와 충효관을 건립하고,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330여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보듬으면서 그때의 사실과 정신을 일깨워 온 이곳 사람들 특유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역사의식은 현재까지도 살아서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장기면의 유배문화 영향으로 후세에도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글 이상준, 이종길)

 

* 조선시대의 형벌

조선시대 형벌은 대명률을 따랐으며 법적으로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의 오형을 인정하고 있다.

태장치기-조선후기, 김준근 작. 태형은 매질하기.
곤장치기-곤장은 조선중기 이후부터 사용되었다고 함. 장형은 몽둥이질, 곤(棍)은 넓적한 몽둥이. 곤장은 한 번에 30대 이상 못 치게 함.

* 도형(徒刑) : 범죄자를 타 지역에 보내 강제노역에 종사시키는 것으로 강제노역이 있다는 점에서 유형과 구별된다.

망향교를 건너면 <선비 인생 및 유배과정 이야기벽>이 있다.

*유배에도 차별이 있었다.

-유력 정치인 : 지방관의 환대를 받음.

김진형의 북천가 - 철종 때 함경도 명천으로 귀양가면서 이르는 곳마다 지방관의 환대를 받고, 기생들과의 풍류, 기생 군산월과의 연정 등을 노래한 유배가사.

 

-존재감 없는 인물 : 매우 고생함.

안조환의 만언사-정조 때 관직을 수행하던 중 주색잡기에 빠져 국고를 축낸 죄로 34세 때 추자도에 귀양 가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자신이 지은 죄를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눈 유배가사.

 

*정약용-당시 천주교는 군사독재정권 하에서의 공산주의보다 더 위험했다. 그러므로 다산도 이곳에서 어렵게 생활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궁하면 도울 이웃 있어도/ 아주 궁하면 돌봐 줄 사람 없다네 / 밝고 환한 들판의 농사꾼 백성들 / 동작들 어찌하여 저리도 호방할까", <고시 27>

 

장기와 유배

장기는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거명되는 우암, 다산 등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땅으로 장기에서 위리안치의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우암에게 날아든 아내의 부음, 그 소식을 접하고도 애통한 마음만을 슬픈 제문에 실어 손자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장기는 제주도와 전남 강진, 경남 남해 등과 함께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한 곳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장기현은 서울과 864리 떨어져, 신라 멸망 이후 변방으로 전락한 장기현은 조선시대 주요 유배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유배형의 종류에는 유2천리, 25백리, 3000리가 있었는데, 이에 해당하는 지역은 법으로 미리 정해 두었다. 영조 211218, 영조 31514일 등에 작성된 승정원일기에 장기는 기장, 영해 등과 함께 서울에서 유3천리 정도의 거리에 해당하는 지역이었기에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유배인은 태조 1(1392) 설장수이고, 이후 이승조, 이원강, 홍여방, 최윤복, 조말생, 송시열, 김수흥, 이광필, 이상묵, 윤석주, 조정상, 송영, 노성중, 정약용 등이 속속 장기로 유배 왔었다. 이렇게 장기는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과 같은 석학에서부터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거물 학자와 정객들이 머물렀다가 간 곳으로 독특한 유배문화가 간직된 곳이다.

신라 멸망 이후 변방으로 전락한 장기는 범속한 풍속을 가진, 즉 기층문화를 가진 고을이었지만 조선조 실세 정객과 학자들이 유배 와서 중앙의 고급문화와 최고 수준의 학문(儒學)을 유포해 유향(儒鄕)으로 변화했다. 그런 영향으로 동일지역 내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창건되었다. 장기는 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바닷가 작은 고을에 불과했지만 중앙의 학식과 지조를 갖춘 학자와 정객, 그리고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화 교류를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고, 이렇게 얻은 지식과 정보를 슬기롭게 소화하여 충절과 유향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유배인들은 고난 속에서도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과 저서를 쓰고, 지역 선비들을 교육시켜 유배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를 남겼다. 이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중히 여기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 풍토가 조성되었고, 이런 풍토는 은연 중 학자 내지는 관직 지향적 문화를 만들어 그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05인 기록 이야기벽

조선조 장기 정배자, 01 설장수부터 117 이근용까지 간단히 기록해 놓았다.

태조 1년(1392) 7월 30일. 01-문하시중 설장수(偰長壽 위구르인으로 귀화함. 반란 모의)

고종 32년(1895) 8월 1일. 117-이근용(李根用) 방면(放免) 

<우암의 벽>

우암 송시열(1607-1689)

우암은 [승정원일기] 숙종 원년(1675) 619일조에 기술된 경상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1675610일 장기에 도착해 장기성 동문 밖 마산리 사인(士人) 오도전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1679410일 거제도로 이배되기까지 4년여 장기에 머문 우암은 17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정치, 문화, 사상적으로 지배했던 국로(國老巨儒)답게 변방의 범속한 풍속을 가졌던 장기를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으로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암 유배 4년 동안 중앙의 우암 인맥들이 장기를 무수히 방문했다.(예로서 167623일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의 방문)

이들의 방문은 장기 사람들에게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정과 예의를 중시하는 몬화풍토를 조성시켰다. 그리고 그는 영남지역 전체에도 영향력을 미쳤는데, 인근 고을의 무수한 수령들과 학자들이 문안을 올리고 학문을 전수받기를 간청했을 정도였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무었보다 우암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4년을 보냈을까 하는 부분이다.

*윤증의 방문-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을 수정해 달라고 부탁하러 내려옴.

 

우암의 유배 생활

[송자대전](宋子大全) 행력과 [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 제7 원 연보에 따르면 우암은 장기 유배 동안 당대의 석학이자 정객답게 유배지에서도 수많은 문인들과 학문을 닦고 연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암은 장기 도착 당시 동생들은 물론 부실(副室 첩)과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함께 했는데, 이는 비록 유배객의 몸이지만 가족과 노복까지 대동할 정도여서 당시 우암의 입지를 반증하고 있다.

귀양살이 중에도 우암의 주변에는 두 동생인 시도와 시걸, 아들 기태, 그리고 손자 주석과 증손자 일원(왕자의 사부를 지냄) 및 유언(교관을 지냄)이 자주 드나들며 수발을 들었다.

우암 형제들은 유배길을 동행하고 귀양살이를 함께 할 정도로 우애가 깊었다. 우암은 동생들과 함께 하면서 비록 깊은 공부는 이루지 못했으나 온갖 근심을 잊어버리고, 많은 것들을 깨달아 나름대로 낙이 있었다.”며 고인들의 유배 생활과 비교하며 위안을 찾기도 했다.

우암 거소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4년간 열심히 우암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상당한 지식을 축적했고, 이로 인해 오도전은 장기현의 훈장이 되어 후학을 열심히 가르쳤다. 오도전의 원명은 오도전(吳道傳)이었는데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우암이 도전(道全)으로 고치게 했다.

늦은 봄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암꿩 한 마리를 우암에게 선물했다. 이를 받은 우암은 암꿩을 여러 차례 손으로 쓰다듬다가 지금 한창 알을 낳고 새끼를 칠 시기인데 꿩을 잡아 먹을 수 없다.”며 방생할 것을 요구했다. 꿩을 가져왔던 사람이 감동하여 숲에다 놓아주었더니 얼마 후 수많은 새끼를 데리고 산간을 왕래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우암의 배소

숙종 원년(1675) 610일 우암이 장기현 경계에 도착해 현내(縣內)의 마을 이름을 들었을 때 마산(馬山)이라고 대답했더니 읍호(邑號)()’자가 ()’자와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마산에 거주하는 사인(士人) 오도전(吳道全)의 집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윤휴가 조사기(趙嗣基이무(李袤) 등과 함께 우암을 원악지(遠惡地 서울에서 멀고도 살기가 어려운 곳)로 옮기기를 청하여 처음에는 웅천(熊川)으로 정했다가 곧 장기로 옮겨서 위리안치하게 한 것이다.우암이 배소(配所)에 이르자, 심양필이 가시울타리 치는 일을 친히 감독하였는데, 자제들이 전례를 끌어대어 후문(後門)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지(장기면 읍내리)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곳에는 우암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현재까지 자생하고 있으며, 이 학교의 교목 역시 은행나무이다.

 우암의 사관(舍館)은 해문(海門)과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해풍을 막기 위해 우암이 거처하는 방 밖 처마 밑에 별도의 이중벽을 치고 출입문을 별도로 만들었다. 또한 뜰 안에 바람막이를 만들어 해풍을 막기도 했다.

 우암은 뜰 앞에 자그마한 채전을 만들어 약초와 생강을 손수 심고 가꾸었고, 행단(杏亶)을 일구고 그 아래에 우물을 파서 붕어를 키웠으며, 창 밖에는 벌을 치면서 조석으로 즐겨 구경하기도 했다.

 

[송자대전] 153,

망실(亡室) 이씨(李氏)에게 올린 제문(祭文)

, 나와 당신이 부부(夫婦)로 맺은 지가 지금 5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의 가난함에 쪼들리어 거친 밥도 항상 넉넉하지 못하여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던 그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쌓은 앙화 때문에 아들과 딸이 많이 요절하였으니, 그 슬픔은 살을 도려내듯이 아프고 독하여 사람들이 견디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근세(近歲)에 이르러서는 내가 화를 입어서 당신과 떨어져 산 지가 이제 4년이 되었는데, 때때로 나에 대해 들려오는 놀랍고 두려운 일들 때문에 마음을 녹이고 창자를 졸이면서 두려움에 애타고 들볶이던 것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끝내 몸이 지쳐 병에 걸려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시종을 따져 보면 나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타고난 운명이 좋지 않아서 이같이 어질지 못한 사람과 짝이 되었으니 당신이야 비록 원망을 않는다손 치더라도 내 어찌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 내겠습니까.

 

* 1675(숙종 1) 1월에 예송논쟁 여파로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윤515일 장기(瘴氣 풍토병)가 가장 심한 충청도 웅천으로 이배가 결정되었으나 이틀 후 경상도 장기로 변경됨. 16794월에 거제로 이배된 후 이듬해 5월 청풍으로 이배되다가 6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석방됐다.

1689(숙종 15)에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에 반대하여 3월에 제주로 귀양을 가 5월에 국문(鞫問)을 받으러 육지로 불려가던 중 68일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己巳換局)

 

오직 주자만이 진리다.

한족(漢族)보다 더 중국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 소중화사상

성리학의 주류를 보수적인 예학으로 바꿔 놓았다. 예학(禮學)-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행동 규범. 품절문자(品節文字)

명분적, 제한적 북벌론자이다. 청과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를 섬길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바랐다.

최대의 당쟁가이다-노론만 그를 성인으로 받들었다.

 

우암 적거지
적거지-가시(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다.
복원된 화장실
장기현 지도

 

<다산의 벽>

다산의 유배 생활

[정약용의 유배지, 장기]

다산은 1801119일에 터진 <책롱사건>, 즉 신유박해라고도 부르는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루돼 장기로 유배되었다.

180139일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마현리 구석골늙은 장교 성선봉 집에서 기거했다. 그해 1020일까지 7개월 10(220) 동안 장기에 머문 다산은 인간으로는 가장 불행한 귀양살이 기간이었지만 불굴의 투지로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며 학문연구와 시작에 전념했다.

다산은 220일 동안 <기성잡시 27>, <장기농가 10장>, <고시 27수> 등 60() 130여 수에 달하는 주옥 같은 시를 창작했고, 서인과 남인의 예론(禮論) 시비를 가린 <기해방례변>,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고훈>,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기 위한 <촌병혹치> 저술, 그리고 아들에게 보낸 3통의 편지 등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답게 가히초인적인 창작활동을 전개했다.

<기성잡시 27>에는 장기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눈에 비친 당시 장기의 모습들이 그림 그리듯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다산은 처음에는 장기의 모습과 풍물들을 묘사하다가 차츰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풍속과 애환을 그리는 데로 나아갔고, 그 속에서 백성의 가난을 발견하고, 가난의 원인이 당시 사회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함을 밝히려 애썼다. 그러면서 이곳 사람들의 애환과 관리들의 부패상을 우화적이고 은유적인 시로 표현했는데, 그 대표적인 시가<장기농가 10장>이다.

다산은 또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이를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글로 남겼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회오와 억울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정조와의 끊을 수 없는 그리움에 잠기기도 했다.

다산은 자신보다 126여 년 전에 장기로 유배왔던 우암과는 대조적인 귀양살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배소에는 주인 외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자취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다산의 유배길

다산은 석우촌-사평-하담-탄금대-무교-조령-함창-경주-장기로 이어지는 유배 길마다 자신이 보고 느낀 생각과 감회를 시로 남기며 유배지에 도착했다.

당시 장기현 관아는 지금 읍성 안의 장기 향교 바로 옆자리였을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산은 다음날 저녁 무렵에 관리를 따라 장기읍성 동문으로 나와 마산리 구석골 늙은 장교 성선봉(成善封) 집을 거처로 삼았다. 당시 다산이 관리를 따라 나왔던 동문은 지금 장기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조해루(朝海樓)라는 문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다산이 관리를 따라 내려온 길은 지금도 거의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장기향교에서 동문을 거쳐 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걸어 다닐만한 돌 비탈길이 여전히 남아 있어 다산의 유배 길을 걸어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고시 27[古詩 27](9)


가지 늘어진 정원 속의 내나무 / 冉冉園中竹
말쑥한 자태 너무나도 소박한데 / 修節擢澹素
지방 사람들 대가 귀한 줄 모르고 / 土人不重竹
대 베어 채마밭 울타리 만든다네 / 伐竹爲樊圃
네가 북쪽 지대에만 났더라면 / 苟汝生北方
사람들이 왜 널 사랑하지 않으리 / 豈不人愛護
잎 하나라도 혹시 다칠세라 / 一葉疑有損
갔다가도 다시 와서 보살피련만 / 旣去復來顧
 

 

다산의 배소

다산은 장기에 도착한 다음날인 1801310일부터 마산리(馬山里 : 현 마현리) 구석골에 사는 늙은 장교(將校) 성선봉의 집을 배소로 정하여 있게 됐다.

* 다산은 영조 38(1762) 616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그후 40년 만에 다시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과 뜻을 가진 마현으로 귀양살이를 왔다.

 

(향토사학자 금낙두 선생에 의하면) 다산의 배소였던 성선봉 집은 현재의 장기초등학교 뒤편 언덕으로 대숲에 둘러싸여 지금은 길조차 분간하기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는 폐가로,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이 일대가 다산이 머문 곳일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매화병제도(梅花屛題圖)

아내 홍씨에게 받은 낡은 치마에 딸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축원하는 매조도(梅鳥圖)와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담은 시와 이를 만든 사연을 적었다.

 

翩翩飛鳥 훠얼 훨 날아 온 새가

息我庭梅 내 집 뜰 매화나무에서 쉬는구나.

有列其芳 그윽한 그 향기가 짙기도 하여

惠然其來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구나.

爰止爰棲 여기에 머물러 깃들어 지내며

樂爾家室 네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華之旣榮 꽃이 이제 활짝 다 피었으니

有蕡其實 열매도 주렁주렁 많이 달리겠네.

 

嘉慶 十八年 癸酉 七月十四日 洌水翁書于茶山東菴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 가경 18년 계유(1813) 714일에 열수(洌水, 다산의 호) 늙은이는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내가 강진서 귀양산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홍부인이 낡아 헤진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다.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이를 잘라 네 첩으로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었다. 그 나머지를 이용하여 작은 가리개를 만들어 딸에게 보낸다. 

* 장기와는 상관없는 것인데(1813년 강진에서 지음) 우암의 제문과 격을 맞추기 위해 올린 듯하다.

 

촌병혹치(村炳或治) -→ 촌병혹치(村病或治)

 

* 해미 유배(1790년 정조 14, 29)

다산은 226일 한림학사로 추천받아 예문관의 검열에 임명되었다. 이때 반대편에서 한림 추천에 사정(私情)이 개재되었다고 비난하자 입시(入侍)를 거부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충남 해미현(海美縣)으로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났다.

* 책롱사건(1801119)

임대인(任大仁)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북경 주교의 서한 및 주문모 신부의 서한, 정약종 일기 등이 들어 있는 정약종의 책롱(冊籠 책을 넣어 두는 농짝)을 황사영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2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이 검거되고, 11일에 권철신과 함께 정약종이 체포돼 의금부에 투옥됐다. 정약종은 이날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고 정약용은 장기,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

1801년 천주교 박해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황사영도 쫓기는 몸이 되자 제천의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였다. 나중에 배론으로 온 황심(黃沁)과 조선교회를 구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길이 62, 너비 38의 흰 비단에다 한 줄에 110자씩 121, 도합 13311자를 검은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10월에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어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920 옥천희가 잡히고, 황심이 926일에 체포되어 백서는 압수되었고, 황사영도 929일 체포된다.

백서의 마지막 부분에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 사건으로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추자도로 이배된다.

 

 

  보리 타작 / 정약용, 송재소 역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 큰 사발에 보리밥, 높기가 한 자로세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네
응헤야 소리 내며 발 맞추어 두드리니 / 삽시간에 보리 낱알 온 마당에 가득하네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 보이느니 지붕 위에 보리티끌뿐이로다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오 (1801)


보리타작하는 농부들의 힘차고 건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조형물은 억지로 일을 하는 것 같다. 아쉬웠다.
 

 

<민속놀이 마당>

 

<망향정>

 

망향정 앞길에 한시앉음석이 있었다.

示孫兒輩 /尤菴 宋時烈 - 因臺啓謫長鬐 渼湖江邊 留別諸人 / 退憂堂 金壽興 - 往長鬐行三日 宿秋風驛 /明齋 尹拯 - 楡林晩步 / 茶山 丁若鏞

 

  해질녘 느릅나무 숲을 거닐며(楡林晩步 二首) / 다산 정약용
 
지팡이 끌고 사립문 밖 시내로 나와  曳杖溪扉外
선명한 모래사장 천천히 지나가노라  徐過的歷沙
몸뚱이는 장기(瘴氣)로 쇠약해지고  筋骸沈瘴弱
옷은 바람을 받아 기우뚱거린다  衣帶受風斜
해는 하늘거리는 풀을 비추고  日照娟娟草
봄은 고요한 꽃에 깃들었구나  春棲寂寂花
세상만사 절기마다 변한다 해도  未妨時物變
몸뚱이 있는 곳이 내 집이라 하다니  身在卽吾家
 
누런 느릅나무 가지런히 새잎 돋아  黃楡齊吐葉
녹음이 짙은 속에 빙 둘러앉아 있네  環坐綠陰濃
꽃이야 작고 가냘프나 벌은 꽃술 다투고  花瘦蜂爭蕊
숲이 따스하여 사슴도 뿔을 기른다  林暄鹿養茸
임금님 은혜로 목숨은 남았다 하니  主恩餘性命
시골 늙은이들 내 몰골 애석하게 여기네  村老惜形容
백성 편히 다스릴 정책을 알고 싶다면  欲識治安策
농부에게 묻는 것이 첫 번째라오  端宜問野農 (1801)
 

 

송시열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장기초등학교에 있다.

 

 

장기초등학교에 있는 송시열, 정약용 사적비

정약용사적비 뒤에는 '장기농가10장 제1'이 새겨져 있었다. 

      
長鬐農歌十章 第一
 
麥嶺琦嶇以太行    보릿고개 넘기기가 태산처럼 기구터니
天中過後始登場    단오를 지나면서 비로소 여묾하네
誰將一椀熬靑麨    설익은 한 대접 보릿가루일지언정
分與籌司大監嘗    대감님 맛보라고 어느 누가 나누리요
 

 

두 사적비를 보면서 다산의 고시27수 중 其24가 떠올랐다.

  古詩27首 基24
 
魯叟講斯道    공자는 도를 강론하면서도
王政居其半    그 절반이 왕도정치에 관한 것이었으며
晦翁屢抗章    주자가 누차 올린 바른 상소문
所論皆廟算    그 내용 대부분 조정의 당면 문제였네
今儒喜談理    요즘 선비들 성리론만 즐겨 말하나
政術若氷炭    통치술과는 얼음과 숯이라네
深居不敢出    깊이 숨어 살며 감히 나오지 못함은
一出爲人玩    나왔다가는 남들의 노리갯감 될까 봐서라네
遂令浮薄人    끝내는 경박한 사람들에게
凌厲任公幹    나랏일을 마음대로 맡겨 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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