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0.01.12. 일요일
* 동행 : 우리 가족 모두(막내 합류)
* 일정 : 00:15 하얼빈 타이핑 국제공항(哈尔滨太平国际机场) - 02:00 숙소 도착(109 shimao ave, songbeiqu, heilongjiang sheng, china, 150028) - 소피아성당 - 중앙대가(中央大街 zhōngyāngdàjiē) - 노창춘병(老昌春饼 lǎochāngchūnbǐng) - 카르푸(家乐福) - 숙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00:30분 출발했는데 하얼빈공항에 도착하니 00:15분이다. 두 도시의 시차가 2시간이다.
1월 월 평균 기온 -18.3℃의 하얼빈. 차가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얼빈 지역은 부여-고구려-말갈-발해 막힐부로 이어지면서 우리 조상의 생활 터전이었다. 그러나 926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태조 아율아보기에 의해 발해가 멸망한 후 이민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송화강을 낀 작은 어촌이었으나 19c말~20c초 러시아인들이 중동철도(←동청철도)를 건설하면서 도시가 생겼다. 러일전쟁(1904~05) 당시 러시아의 군사작전기지였고 전쟁 막바지에 중국과 일본이 공동 관리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러시아에서 도망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한때는 소련 밖의 도시 가운데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지만 기사가 길을 몰라 몇 번이나 차를 멈췄다. 숙소 주위를 맴돌다 다행히 사람들을 만나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숙소는 단지 안에 있는 아파트였다. 입구에서 걸어들어가야 하는 곳이라 찾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2시 다 되어 도착했다.
숙소는 아파트 독채였는데 요것조것 꾸며 놓았지만 왠지 엉성하고 지저분했다. 곰팡이 핀 도마와 물기 있는 식기 등 특히 주방이 심했다.
늦잠을 잤다. 막내와 아침거리를 사러 밖으로 나왔다. 추웠지만 정신은 맑아진다. 이곳의 교통질서는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 것 같다. 사람이 차를 피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들도 차를 피해 무단횡단을 일삼는다. 이것도 실용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리의 식당에는 아침식사를 하는 현지인들이 제법 있었다. 우리와 다른 모습이다. 음식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서 먹고 12시 훨씬 넘어 나왔다.
택시를 불렀는데 기아차라 반가웠지만 차 안에 배어있는 담배냄새 때문에 딸들이 괴로워했다. 다음부터는 한 단계 위의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빙등제 축제장, 태양도 눈축제장, 낚시꾼들의 차가 있는 송화강 등을 지났다. 말 그대로 설국이다. 이곳의 별명이 빙성(氷城)이라고 하며, 세계에서 대도시 중 가장 춥다고 한다. 중국 10대 도시로 천 만의 인구, 남한 면적의 반 정도가 된다고 한다.
성 소피아성당. 블라디보스토크의 성당은 알록달록 예뻤는데 이 성당은 크고 묵직했다. 추운 날씨에도 사람이 제법 있었다. 모두 사진 찍기에 바빴다. 러시아가 동청철도(东清铁路, 동시베리아에서 중국 만저우리와 하얼빈 등을 잇는 철로의 중국 내 구간)를 건설할 때 러시아 군인들을 위해 세웠다고 한다.
광장 우측으로 천막 건물이 있었고 입구 부근에서 따뜻한 콜라를 팔고 있었다. 주변에 코코(버블티) 가게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그냥 나왔다. 젊은이들에게 맛집 탐방은 여행에서 필수 요소인 것 같다.
중앙대가. 양말을 두 개나 신었는데도 발끝이 시리다. 얼굴이 따끔거려 목도리로 감쌌다. 주머니에 핫팩을 넣고 다니니 따끈따끈해서 장갑이 필요없을 정도다. 핫팩을 한 상자 사오길 잘 했다. 사방이 어둑해져 흐린 날씨 탓인 줄 알았는데 이곳은 4시만 되면 어두워지기 시작한단다. 일몰 시간이 4시 10분대.
이 추위에도 꼬치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곳의 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단다. 일명 马迭尔(mădiéĕr) 아이스크림. 모던호텔하얼빈(马迭尔宾馆, modern-모테른호텔) 1층 레스토랑 왼쪽에서 팔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섰다.
이효석(1907~42)은 1939년 초가을과 40년 가을 두 차례 하얼빈을 찾았다. 두 번째는 아내(이경원, 함북 경성 출생)와 차남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귀국 후 단편소설 ‘하얼빈’을 발표(40년 10월)하였는데 그 소설에 나오는 호텔이 바로 모테른이다.
여행 전에 미리 <하얼빈>과 <아자미의 장>, <친일문학론>의 이효석 부분을 읽어봤다. 자아성찰이 부족한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효석이 생활이 어려워 1931년 일본인 은사의 주선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한 후의 일이라고 한다.
『취직한 지 보름도 안되었을 즈음 직장에서 광화문통으로 내려오는데 이갑기라는 청년을 만났다. 문학을 하는 청년이었다. 조금 안면이 있었다. 이는 다짜고짜 험상궂은 얼굴을 하더니 "너도 개가 됐구나"하고 내뱉었다. 대로상에서의 봉변이었다. 금방 주먹으로 한대 칠 듯한 기세였다. 그러찮아도 피해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죄악감과 피해망상에서 피로해진 소심한 그의 신경은 감당치를 못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한국의 인간상 제5권, 유종호)』
이 사건으로 퇴직하지만 병에 걸린 아내와 차남을 살리기 위해 다시 친일을 했다. 그러나 아내는 1940년 2월 22일 복막염으로 죽고 이어 차남도 생후 4개월 만에 사망한다. 자신도 1942년 5월 25일 35살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이러한 사유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그 이름이 올라가지 않았다.
친일소설이라고 평가받는 <아자미의 장>을 읽으면서 소설의 성격이 모호하다고 느꼈었다. 이효석은 친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나약한 지식인이었다.
노창춘병(老昌春饼 lǎochāng chūnbǐng). 백종원 덕분에 이름이 더 알려진 노창춘병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언 몸도 녹이고 맥주 한 잔도 곁들였다.
중앙대가를 빠져 나오니 어둠이 짙었지만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추위와 짧은 낮 시간 때문에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 못하겠다. 태양도 빙설축제는 건너뛰었다.
까르푸(家乐福)에 들러 내일 아침거리와 필요한 물건을 샀다. 워낙 추워 하얼빈에서는 찬 기운이 실내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출입문 앞에 지그재그로 꽤 두꺼운 가림막을 설치해 놓았다. 매장은 컸으나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고 호객행위로 몹시 시끄러웠다. 한겨울에도 과일은 종류도 다양하고 많았다. 양모양말을 두 컬레 샀는데 계산대에서 플라스틱 태그를 떼지 않아 신을 수가 없었다.
추위에 체온을 빼앗겨서인지 피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