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20년 1월 10일
* 일정
09:30 수프라 레스토랑(조지아식 레스토랑 맛집) 근처에서 투어차량 탑승(현대버스, 20인, 야경투어 가이드) - 신한촌기념탑 - 우스리스크로 이동- 112km,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소요) - 최재형 선생의 집 - 전로한족 중앙총회 장소 - 시민공원(도라공원, 거북이공원) - 점심식사 - 이상설 유허비 - 4월참변 추모비 - 고려인 문화센터 - 아르바트 부근 기념품 상점 - 숙소 휴식 - 칼리나몰(Kalina Mall) 안에 있는 조지아식 레스토랑에서 식사 : 하차푸리, 샤슬릭 등, 입구에서 겉옷을 맡기고 들어가는 것이 우리와 달랐다.
발해성터 유적지는 눈이 많이 내려 가지 못했다.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문
민족의 최고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한민학교 설립, 신문발간, 13도의군 창설 등으로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회의-최초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일항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한민족은 1937년 불행하게도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게 되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에 해외 한민족연구소는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이 기념탑을 세운다.
1999년 8월 15일
한국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
중앙의 빗돌은 남한, 좌측은 북한, 우측은 해외동포, 밑에 있는 8개의 빗돌은 조선 8도를 의미한다.
요즘은 추운 겨울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얼어붙은 아무르만. 우스리스크에서 돌아오는 도중 버스 안에서. 이용악의 시가 생각났다.
풀벌레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우리집도 아니고 / 일가집도 아닌 집 /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 풀벌레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 눈빛 미명은 고요히 /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 풀벌레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 러시아 영토
*아무을만: 러시아 지명. 아무르강 하류 지역.
-아무르강: 중국에서는 헤이룽강( (黒龍江) 또는 헤이허강(黑河),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Amur), 몽골인과 퉁구스인은 하라무렌(검은 강이라는 뜻)이라 부른다. 유역은 러시아·중국·몽골[蒙古]에 걸친다.
*니코리스크: 현재의 우수리스크. 한자로는 蘇王領(苏王领sūwánglĭng소왕령), 双城子shuāngchéngzi.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고택. 1919년부터 1920년 4월 순국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으로 2019년 3월 최재형 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 자료를 볼 수 있다. 기념관 안내서는 배우 송혜교와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의 기획 및 후원으로 제작하였다는 글이 있었다.
흉상과 비문
독립운동가 최 재 형(1860.8~1920.4)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안중근 의거를 지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최재형은 1869년 연해주로 이주 후, 러시아에서 군납업을 통해 큰 부를 이루었고
재러한인사회의 대표적 지도자로 한인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다.
의병조직 동의회 총재, 대한의군 국내 진공작전 지원, 대동공보와 대양보 사장, 권업회 회장,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으로 활약하며 항일 독립운동과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1920년 4월참변 때 일본군에 의해 순국한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애국의 혼, 민족의 별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기념관 입구에 있는 페치카.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으로 선생의 별명이다. 동포들은 집집마다 선생의 사진을 걸어놓았다고 한다.
최재형 선생은 함북 경원에서 노비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9세에 가족과 함께 지신허(하싼구 비노그라드노예 일대)로 이주. 11세에 형수와의 갈등으로 가출하여 포시에트에서 러시아 무역상선 선장에 의해 구출. 러시아 국적 얻는다.
'저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함이 묻어나는 어린이집 다니는 아동의 그림과 글.
이주민의 고달픈 삶이 느껴진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굳센 정신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안내 표지판 내용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당시 니콜스크 실업학교)
이 건물은 1918년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어 민족의 자치와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한 장소이니 1919년 3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최초로 임시정부를 선포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었다.(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현재는 우스리스크 11호 학교 교사로 쓰이고 있다. 추운 지방인데도 겨울방학이 없다고 한다. 추워서 할 일도 없으니 공부나 하라는 의미일까. 난방비도 만만치 않을텐데.
바로 옆에 있는 도라공원(우스리스크 시민공원, 거북이공원) 아이 러브 우스리스크.
우수리스크시 인근 발해 절터에서 발굴된 거북이 모양의 비석받침돌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빗돌은 건축자재로 쓰였다는 말이 있다. 본래 두 개인데, 한 개는 하바로프스크 박물관 앞뜰에 있다고 한다. 빗돌에 진국(발해의 초기 국명)이라는 단어가 있고 이 지역이 발해 15부 중 솔빈부가 있던 곳이라 발해의 유물로 보기도 하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황족 가족묘가 있던 곳이라 금나라의 유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점심식사를 한 곳. 이동하면서 휴대폰을 보니 현지 온도가 -19도에서 -18도이다. 그런데도 햇살이 쨍쨍하고 바람 한 점 없어 그렇게 추운 줄 몰랐다. 1층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는데 한식과 중식을 섞은 것 같았다. 푸짐한 고사리나물이 맜있었다.
이상설 선생 유허지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한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탄생하여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이다.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서 화장하고 그 재를 이 곳 수이푼강 물에 뿌리다. 광복회와 고려 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유허지 주위에 한국에서 가져온 소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비석의 무늬는 불꽃을 형상화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한 사람이 이상설 선생이라고 한다.
이상설 선생의 유언 -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수이푼강(绥芬河 Suífēnhé , 솔빈강, 라주돌나야강). 물살이 거세 얼음이 두껍지 않다. 발해가 멸망할 때 병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4월참변 추모비 - 4월 참변은 1920년 4월 4~5일, 이틀에 걸쳐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의 러시아 혁명 세력과 한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과 우수리스크에 거주하던 다수의 한인들이 학살당했으며, 이때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최재형도 희생되었다.
<고려인 문화센터-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으로 2004년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2009년에 건립되었다. 1층 고려인 역사관이 중심이다.
<고려인의 역사>
고려인이란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의 독립 국가 연합의 국가들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①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지신허(하싼구 비노그라드노예 일대)로 이주. 최초의 한인마을. 지신허기념비(2004년 서태지 기부로 건립)
② 지신허와 더불어 포시에트(목허우), 크라스키노(연추-얀치혜)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③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한인촌을 건설했으나 콜레라가 발생하여 시 외곽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곳이 신개척리 곧 신한촌이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기까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④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1937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연해주의 한국인 17만여 명이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 이주당했다. 조선인이 일본의 첩자 노릇을 할 우려가 있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사전에 문제가 될 것 같은 인물들을 간첩죄로 처형했으며(소설가 조명희 등)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라 제대로 준비도 못한 채 가축수송용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40일 동안 이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 이때 독립군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되었다. 그곳에서 밤에는 극장 수위,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1941년 독소전쟁이 터지자 73살의 고령임에도 "일본의 동맹국 독일을 무찔러야 한다"며 현역으로 참전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했다.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⑤ 1953년 스탈린 사망으로 강제 이주의 비극은 끝났다. 1955년 고려인의 정치적, 법적 명예회복을 흐루시초프가 선언함으로써 고려인들은 러시아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극동 지방 재이주 금지 조치가 풀리면서 일부 고려인 중에는 옛 고향으로 귀환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기억하라! 다시는 이 세상에 등장해서는 안 될 이 무서운 괴물을!"-강제 이주의 반인륜적 자료를 반세기 만에 폭로한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변호사 김블라디미르
- 출처 : 우리문화신문
아르바트 가까이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선물가게에 들렀다. 안중근 단지동맹비 스노우볼이 있어서 샀다. 수익금의 10%는 독수리전망대 밑에 있는 조명희 문학비 등 역사유적을 관리하는데 쓰인다고 한다. 단지 동맹비는 이곳에서 한 시간 정도 가야하는 크라스키노(연추)에 있다. 뒤의 물방울 모양은 피를, 바닥의 15개의 돌은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15가지 이유를 형상화한 것이다.
조명희의 이름을 듣게 된 것은 뜻밖이었다. 이곳에서 활동을 하다가 일본 첩자로 몰려 하바로브스크 감옥에서 총살당했다. 단편소설 <낙동강>이 생각났다. 간도로 떠난 '로사'가 어쩌면 이곳에도 왔을지 모르겠다.
차량으로 이동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고, 가이드의 설명을 귀담아 듣던 초등학교 5학년 아이도 나와 같은 스노우볼을 사들고 있었다.
조명희 <낙동강> 원문 낙동강.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