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이라는 글을 보고 우리 학문의 지평도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반가웠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로 약 4600여 년 전부터 쓰이기 시작하여 수메르어-악카드어-히브리 신화-그리스 신화로 이어진 신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최초의 히어로, 길가메쉬(수메르어 빌가메시)는 4800년 전쯤 수메르 남부의 도시국가 우루크를 126년 동안 지배한 왕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길가메쉬는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인간인 초인(超人)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을 지녔기에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릴케가 이 작품을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라고 평가한 것은 적절하다.
모든 것을 누리고 더 큰 명예를 얻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가 끝내는 신의 영역인 영생 앞에서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이 신화의 원형이 아닐까?
길가메쉬가 모든 신부에게 초야권을 행사하는 등 횡포를 일삼자 천신 아누(Anu)(수메르어,안)와 모신(母神) 아루루(Aruru)는 엔키두라는 야만인을 만든다. 엔키두는 샴하트에 의해 인간이 되고, 신부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길가메쉬를 엔키두가 막아서면서 싸움이 시작되지만 둘은 친구가 된다.
둘은 공명심에 들떠 엔릴의 삼목산 산지기 훔바바(후와와)를 정벌하는 모험을 떠난다. 처음에 엔키두는 만류를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훔바바를 죽이도록 독촉한다. 그를 죽이고 우루크로 돌아온다.
길가메쉬가 여신 이쉬타르(인안나)의 유혹을 뿌리치자 이쉬타르는 아버지 안에게 길가메쉬를 징벌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저승의 여신 에레쉬키갈의 남편)를 내려 줄 것을 요청한다.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하늘의 황소도 죽인다.
훔바바와 하늘의 황소를 죽인 데 분노한 신들이 엔키두를 죽인다.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길가메쉬는 영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죽지 않는 유일한 인간인 우트나피쉬팀과 그의 아내를 찾아 나선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바 없겠지?! 너무나 슬픈 생각이 내 몸속을 파고드는구나! 죽음이 두렵다. 그래서 지금 대초원을 헤매고 있고…… 우바르투투의 아들 우트나피쉬팀의 구역을 향해 곧바로 가리라.”(259쪽)
우트나피쉬를 찾아가다가 바다 끄트머리에 위치한 여인숙을 지키는 씨두리에게 충고를 듣는다.
“길가메쉬. 자신을 방황으로 몰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요?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지요. 길가메쉬.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말이에요. 옷은 눈부시고 깨끗하게 입고, 머리는 씻고 몸은 닦고, 당신의 손을 잡은 아이들을 돌보고, 당신 부인을 데리고 가서 당신에게서 즐거움을 찾도록 해주세요.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그렇지만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272쪽)
고생 끝에 우트나피쉬팀을 만나 대홍수에 대해 전해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얻지만 모두 실패하고 우루크에 돌아온다.
“이제 그대가 찾고 있는 영생을 위해 누가 신들을 모이게 할 것인가! 잠깐! 너는 6일 낮과 7일 밤을 잠들어서는 안 된다.”(307쪽) 하지만 길가메쉬는 7일 밤을 꼬박 잠으로 보낸다.
잠은 곧 죽음인 것이다. “잠 자는 자와 죽은 자는 얼마나 똑 같은가!(290쪽)
우트나피쉬팀에게서 생명의 식물, 불로초(늙은이가 젊은이로 되다)를 선물받지만 샘에서 목욕하는 사이 뱀이 갖고 달아난다.
결국 길가메쉬는 죽음을 맞이한다.
“오, 길가메쉬! 큰 산이며 신들의 아버지인 엔릴은 왕권을 네 운명으로 주었으나 영생은 주지 않았다. 길가메쉬, 이것이 바로 네 꿈의 의미였다. 그렇다 하여 슬퍼해서도, 절망해서도, 의기소침해서도 안 된다. 너는 이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고난의 길임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날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 인간의 가장 고독한 장소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멈추지 않는 밀물의 파도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그로 인한 작은 접전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 그러나 너는 분노로 얽힌 마음을 갖고 저승에 가서는 안 된다…….”(322쪽)
“인생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다.” 테레사(Teresa of Calcutta) 3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