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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21. 11. 3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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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김사업/불광출판사/2018.02.14.

 

부제, 연기··유식·선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표지를 넘기니 '2018.7.31. 전등사'라는 글귀가 보인다. 완독 후 '진작 읽을 걸' 하고 아쉬워했다.

신은숙 님의 그림도 좋았다.

 

<여는 글>의 제목이 '머릿속에 갇힌 지식이 아니라 내게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이다.

삶과 자신에 초점을 맞춰 불교를 소개한 책이다.

 

일상생활의 일거일동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이거나 깨달음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해탈과 열반의 길은 남이 아닌 내가 변하는 데서 열리기 시작한다.

 

조고각하, 인강 신은숙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밑을 잘 살피라는 뜻으로 자신을 잘 살펴보아라.

회광반조(廻光返照), 빛을 돌이켜 스스로를 비춰 자신을 살펴본다.

()은 여시아문(如是我聞), ()은 여시아오(如是我悟). 선은 체험이지 기억이 아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住 立處皆眞, 임제선사)',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春有百花秋有月 봄에는 온갖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달이 뜨고

夏有凉風冬有雪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네.

若無閑事掛心頭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便是人間好時節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바로 좋은 시절이라네

-<好時節> 무문 혜개선사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에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여기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잔다."(대주 혜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가 때가 오면 눈 감으면 되지,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우주의 모든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존재한다(연기 因緣生起).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이 세계를 슬픔과 기쁨 등 갖가지 색깔로 물들여 놓고는, 세계는 애초부터 그런 색깔로 되어 있다고 착각한다.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은 동의어다.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 무엇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 정해진 그 자체가 없이 단지 조건에 의해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할 뿐이라는 것이 ''이다. 공은 모든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 즉 무자성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면서, 어떠한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 자성이고 아, 실체, 실재, 본질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부파불교(소승)'(, 자성)'는 존재하며,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고, 사라진 후에도 ''는 그대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본다.

 

불교에서 자성이 불성이나 진여(眞如), 진리, 본래의 모습을 뜻할 때도 있다.

너 자신의 자성을 찾아라는 너의 온 존재가 공이어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하다는 것을 간파하라는 뜻이다.

 

열반은 윤회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

극락과 지옥 둘 다 공이므로 극락이 곧 지옥이요, 지옥이 곧 극락이다. 이처럼 둘은 서로 별개가 아니므로 불이(不二).

 

공은 이론적으로 무자성을 의미하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무집착이다.

중도(中道)란 이것과 저것, 양자 모두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곳에 저절로 나타나는 사고방식이자 삶의 방식이다.

 

선의 화두는 있는 그대로를 보게 한다.

과거의 결론에 붙들리지 말고 진실만을 보라. 지금 본 진실을 결론으로 고정시키지 말고 다음의 진실을 보라. 말뚝에 매어둔 끈에 발이 묶인 새는 한없이 펼쳐진 창공을 자유롭게 날지 못한다. 결론의 끈에 발이 묶인 초라한 새가 되지 말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불변의 자기 자신이 있다고 믿고 이에 대해 일으키는 여러 집착을 불교에서는 아집(我執), 아상(我相)이라 한다. 사물과 현상에 불변의 자성이 있다고 보고 언제나 '고정불변의 그것'으로 집착하는 것을 법집(法執)이라고 한다.

일체의 잡생각과 욕심 없이 지금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하고 있는 상태를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왜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를 살지 못하는가? 용수에 의하면 그 근본원인은 희론(戱論)에 있다. 희론이란 말(언어)로 대상을 개념화하고 그에 대해 집착하는 것' 또는 '오류를 야기하는 말이나 개념 그 자체'를 가리킨다.

 

업과 번뇌는 분별에서 생겨나고, 분별은 희론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희론은 공에서 소멸한다.(중론 18'관법품' 5)

공은 무자성과 유작용의 양면을 갖는다.

 

인도의 전통 종교인 바라문교에서는 아뜨만()이라는 고정불변의 나(영혼)’가 있고, 이것이 윤회의 주체라고 본다.

불교는 아뜨만에 대해 부정적이다. 윤회는 갑에서 을로 불이 붙듯이 일어난다고 용수는 설명한다. 이전 생의 정신과 육체가 원인이 되어 다음 생의 새로운 정신과 육체가 생겨나는 것,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윤회인 것이다. 아뜨만은 없으며 두 생에 걸친 정신과 육체는 전혀 동일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아이면서 윤회는 있는 것이다.

 

소승이 이상으로 하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끊은 결과,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소멸하여 이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대승불교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이상으로 한다. 그것은 지혜에 의해 모든 번뇌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세계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러한 열반이다. 단적으로 말해, 윤회와 열반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열반이다.

 

유식사상(唯識思想)은 공사상과 함께 대승불교의 양대 핵심 교리이다.

행위가 남기는 영향력(종자種子)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불리는 마음에 보존된다. 아뢰야식은 무의식처럼 심층에서 미세하게 작용하는 마음이며(알라야 alaya), 8(·····의식, 말나식·아뢰야식) 중 가장 근본이 된다. 아뢰야식에는 자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자신의 행위가 일어나자마자 그 영향력이 종자로 심어진다. 아뢰야식은 단 1초도 쉬는 일이 없으니 종자의 누락은 있을 수가 없다.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다.

신체적 행동··생각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것과 선악의 성질이 동일한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어진다-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훈습된 종자는 선··무기(無記)의 성질을 바꾸지 않으면서 아뢰야식 내에서 찰나찰나 생멸을 반복하면서 상속되어 간다-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

종자는 여러 조건(衆緣)이 갖추어졌을 때만 자신과 선악의 성질이 동일한 신체적 행동·말·생각이나 과보로 나타난다-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종자에서 신체적 행동··생각이 생하는 순간 그것과 선악의 성질이 같은 새로운 종자가 하나 더 심어진다-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현행훈종자→②종자생종자→③종자생현행의 세트가 순환적으로 반복됨으로써 개개인의 세계가 형성되고 일체가 생겨난다는 것이 아뢰야식 연기설(식전변설 識轉變說)이다. 순간순간의 행위와 그것이 아뢰야식에 남기는 종자의 상호 작용에 의해 개개인의 세계가 형성되고 일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24시간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선천적으로 망상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말나식(末那識, 思量識, 무의식적인 자기 집착심, 我痴·我見·我慢·我愛)이다. 이 식에 의해 다른 식이 오염된다.

 

아나아. 내 나이 이제 여든 살, 늙고 노쇠하였다. 내 육신은 마치 헌 수레가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제 너희들은 자신을 등불로 삼고(自燈明) 자신에게 의지하라.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라. 법을 등불로 삼고(法燈明), 법에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아라.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내 가르침대로 행하는 사람은 나의 제일가는 제자가 될 것이다.(대열반경)”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란 가 없이 보는 것이요, ‘관찰자없이 관찰하는 것이다.-‘타성일편(打成一片)’, 주관과 객관이 녹아들어 완전히 하나로 된 경지.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드는 장치가 바로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자각이 긴요하다.

 

지혜와 복덕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필수품이다. 전식득지(轉識得智)와 무분별지(無分別智)가 필요하다.

 

어느 누구라도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가지 않고, 새로 태어날 때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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