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제1부 <해바라기>
렘베르크의 야노프스카 집단수용소(현 우크라이나 소재)에서 겪은 중편 분량의 홀로코스트 체험 소설이다. 가해자인 나찌와 희생자인 유대인은 “과연 우리 인간들은 모두 똑같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일까?(23쪽)”라는 물음을 던진다. 제목인 <해바라기>는 독일군의 무덤가에 자라는 꽃으로 죽어서도 세상과 소통하는데, 유대인은 살아서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기억과 망각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시몬은 야전병원으로 노역을 나가 간호사의 인도로 임종실에 가게 된다. 죽음을 앞둔 SS대원 카를이 유대인을 불러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저는 마음 편히 죽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93쪽)" 유대인을 학살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아무 유대인에게나 용서를 받고자 부른 것이다. 카를의 고백을 들으면서 시몬은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곁에서 손도 잡아주고, 파리도 쫓아주고 한다. 시몬에게 유품을 주려고 하지만 거부하고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 이후 시몬은 그때 침묵이 정당했는지 시간날 때마다 되새김질을 한다.
전쟁이 끝나고 카를의 어머니를 방문하여 카를은 착한 아들이었다는 믿음을 깨지 않기 위해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집을 나온다.
내 인생에서 벌어진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도, 나와 입장을 바꾸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156쪽)”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던지면 소설은 끝난다.
제2부 심포지엄
1부의 질문에 대한 53인의 답변이 실려있다. 유대인이 가장 많고 그다음 기독교인, 소수의 전문가들의 글이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용서는 절대 안 된다는 주장을, 기독교인들은 용서를 주장한다. 종교에 따라 답이 다르다.(자료 첨부, 복수와 용서-유대신교)
“결코 용서하지 말자”는 두 번째의 확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딘가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된다(193쪽).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도 매우 제한적이다.-타자는 무한한 존재이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어렵지만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앞서야 할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인 동시에, 내가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오르테가, 352쪽).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는 결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355쪽).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지만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있어야 할 것 같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결국은 개인을 뛰어넘는 사회적 윤리, 신과 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시몬의 입장이 되었을 경우 어떻게 했을 것인가? 나라면-가능하다면-신실한 신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를 용서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권고할 것이다. 또한 그 기회를 통해 그의 영혼과, 또한 그의 비인간적인 행동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224쪽).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또한 특히 더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드러난 근본적인 인간성이다. 눈이 멀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억압자가 그의 희생자(가 될 뻔했던 상대방)에게 용서를 간청하자, 희생자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여 상대방에게 동정을 느낀다. 동정을 느낀다는 것은 비젠탈이 자신을 누군가 다른 고통받는 사람의 입장에, 심지어 자기에게 해악을 끼칠 수도 있는 상대방의 입장에 놓아 보기까지 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상대방의 손을 잡았고(이건 생각만 해도 피가 끓는다), 상대방을 성가시게 하는 파리를 쫓아 주었고, 또한 상대방의 병실에 남아 있었다. 그런 행동을 통해서 비젠탈은 그 SS대원을 인류라는 집단 속으로, 즉 진상이 밝혀지고 나면 결국은 영구히 배제될 수밖에 없는 집단 속으로 다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용납, 그러니까 용서나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상대방을 나와 같은 인류로 용납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공허하기만 한 용서의 말보다는 차라리 그런 인간적인 용납이야말로 그 SS 대원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345-6쪽).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 인간들은 모두 똑같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일까?” 모든 인간(생명)은 아름다운가? 이 책을 읽고 나면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다. 학살자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학살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인류라는 범주에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 하느님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218쪽).
용서하는 것과 용서받는 것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날을 위해 더욱 자유로운 인간이 되게 해 준다(360쪽). 용서는 과거에서 벗어날 기회도 주지만 신나찌주의처럼 새로운 악으로 태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용서는 철저한 진상 파악과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이 뒤따라야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용서는 면죄가 아니라, 희생자와 범죄자 모두에게 내적으로 변화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398쪽). 내적 변화가 없는 용서는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살인귀를 선한 증언자로 만든 ‘푸순의 기적’, 참조)
에르네스트 르낭은 국가의 존재가 다름 아닌 망각에 근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각 국가는 오랜 세월, 즉 수백 년간이나 서로 치명적인 고통과 괴로움을 주고받았던 여러 종족이 하나로 융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국가의 새로운 세대는 매번 끔찍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이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파괴하지는 않는다(419쪽).
인간들은 모두 똑같은 흙으로 빚어졌지만 매우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용서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 어렵지만 용납-한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부터 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현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항상 깨어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