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루시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22. 1. 16. 17:42

본문

루시/저메이카 킨케이드 작, 정소영 역/문학동네/2021.11.05.

장편이라고 하기엔 조금 짧은 느낌을 주는 분량과 내용의 소설이다.

 

나는 서인도제도에 있는 영국 식민지 작은 섬(앤티가) 출신이다. 19살 때 섬을 떠나 1월 중순 미국(뉴욕)에 입주 보모(au pair)로 온다. 식민지 현실, 가부장적 사회(아빠에 대한 반감), 엄마에 대한 사랑과 증오, 이 모든 속박과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막막함)이 교차한다.  

 

생전 처음 수선화를 보면서 10살 때 식민지의 강요된 언어로 시 수선화를 낭송하며 느꼈던 감정을 떠올린다. 피정복자와 점령지, 야수들이 천사를 가장하고 천사들이 야수로 묘사되는 환경 말이다.(29쪽) 뒤에 나오는 오병이어와 관련된 질문을 통해서도 자기가 처한 현실과 어른들이 강요하는 지배논리 사이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나는 가부장적인 지배논리의 폭력과 모순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는 찬사가 주변에서 쏟아질 때마다 엄마가 자기 만족감에 푹 빠지는 모습에 난 소름이 끼쳤다. 나를 향한 엄마의 사랑이란 오롯이 나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33쪽)-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의 언어는 헛되고 또 헛되었지만 말쑥한 논리를 갖추어서 세상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하얼빈/김훈)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반항(너는 정말 화가 많은 애구나, 그렇지? 78쪽 폴 고갱을 생각하는 나의 표정을 보고 머라이어가 한 말)과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성장소설이다. 주인공은 검은 아스팔트 혹은 굳은 콘크리드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 같은 느낌이다.

 

루이스와 머라이어는 나를 가족처럼 대하려고 하지만 나는 ‘불쌍한 방문객’으로 타자화될 뿐이다.

말을 내뱉자마자 난 그녀의 사랑스러운 수선화를 그녀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런 환경에 집어던진 것을 후회했다. 피정복자와 점령지, 야수들이 천사를 가장하고 천사들이 야수로 묘사되는 환경 말이다.(29쪽)
나는 오대호로 가는 기차 객실 안에서 주인과 시종이라는 계급과 인종 차별을 느끼지만 머라이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머라이어가 자신에게 원주민의 피가 섞여 있다는 말을 들으며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거리를 생각하게 된다.

배운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자기 본심을 말하지 못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배워서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 정도의 자리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언제나 정확히 알고 만사가 그에 맞춰 돌아가기 때문이다.(96쪽)  

머라이어는 동화 같은 세계를 부정하고 나는그것을 인정한다.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에리히 프롬), 상투적 인간(다이나 49),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다이나와 머라이어 등은 습지 보호 운동을 펼치지만 그들은 파괴자이면서 보호자이다.(60쪽)

그냥 쇼였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쇼일 뿐,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41쪽)

그 장례식은 엄마와 아빠와 아이들이 꾸리는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허위-내가 이제 알아차리기 시작한-의 또 다른 예일 뿐이었다(.64쪽)

텃밭과 토끼(62쪽) 사건에서도 가부장적 요소가 드러난다. 이런 괴리 속에서도 나는 머라이어와 어느 정도 소통을 이어간다.

고향이 권위적 압제의 세상이라면 뉴욕은 위선적 삶이 영위되는 곳이다.

 

아빠를 사랑하는 여자들이 있었고, 아빠가 그 사랑을 모른 척하자 그들은 엄마를 죽이려고 했다. 정작 아빠는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았으면서 말이다.(42쪽)

엄마라면 나의 필요가 자신의 바람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53쪽)

난 엄마를 닮지 않았어. 엄마와 나는 달라.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지 말았어야 해. 아이를 낳지도 말았어야 해. 엄마의 지성을 그렇게 내버리지 말았어야 한다고. 내 지성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도 말았어야지. 너(모드 퀵) 같은 사람은 무시했어야 해. 난 엄마와는 전혀 달라.(99쪽)

나는 9살까지는 외동딸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하지만 남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소외된다. 아빠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상관없지만 같은 여자로서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 엄마를 ‘여자 유다’라고 하며 엄마와의 절연을 계획하기 시작했다.(104쪽).

-성장기 소녀의 주관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같은 여성으로서 엄마와 나는 공통점이 많을 것이다. 엄마도 가부장적 사회의 희생물이다.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오류(단순화, 흑백사고)이다. 이니드라는 이름(120쪽) 때문에 엄마가 화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자기 주관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청춘의 한 모습이겠지.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냉혹한 비판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리라.(44쪽)

"살면서 익숙해진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까? 나 자신도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내가 속했던 그 모든 것들로 관연 돌아가고 싶은 건지도 확실히 알 수 없을 만치 멀리 떠나는 거지" (55쪽, 다이나의 남동생 휴와 대화), 폴 고갱(77-8쪽)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성취였다.(129쪽)

 

20살 내기지만 남성 편력은 거침이 없다.

14살 때 태너, 별장에서 휴,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가인 폴, 롤런드(마르티니크 출신) 등 남성들과 아일랜드계 여성 페기 등과의 양성애적 요소, 커스버트 입냄새 등에서의 엽기. 이러한 것들은 남성에 대한 반항으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머나와 토머스의 관계를 알게 되고 머나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83-88쪽) 어떻든 섹스는 상대방의 신체와 욕구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현재가 형체를, 내 과거의 형체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내 과거는 엄마였다.(74쪽)

루시는 자기 인생의 반에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참사랑을 누렸고, 나머지 반은 그 사랑이 끝난 것을 애도하며 살았다. 

 

루시 조지핀 포터. 그렇게 써놓고 보니 오만 가지 생각이 밀려들었지만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그저 이것뿐이었다.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문장을 보자 수치스러움이 집채만한 파도처럼 나를 휩쓸어 난 하염없이 울었고, 공책에 떨어진 눈물로 잉크가 다 번져 글자들은 하나의 커다란 얼룩이 되었다.(130쪽)
루시는 루시퍼(악마)의 줄임말. 반항의 상징.

-자신으로 돌아와서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

'마음닦기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별하지 않는다  (0) 2022.03.31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0) 2022.03.07
식물학자의 노트  (0) 2022.01.10
소설 원효  (0) 2021.12.31
난주  (0) 2021.12.2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