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학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고유하고 다양한 아픈 몸들의 인류학"
-융합과학(문화어, 경계과학), 통섭(統攝 consilience)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외노의원)에서 보낸 3년간의 공중보건의 생활을 의학과 인류학의 지식을 통해 정리한 책이다.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된 다문화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경험을 토대로 풀어나가며 우리의 시야와 사고를 넓혀 준다.
자신을 다독이며 진단에 앞서 환자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가 돋보인다. 외국어, 인류학을 배우는 등 전향적(적극적, 진취적)인 태도도 본받을 만하다.
"철학자들의 거대담론과 평범한 개인의 서사를 같은 무게로 다룰 수 있을 때 철학은 비로소 일상으로 파고들어 도움을 줄 수 있다."-<현실주의자를 위한 철학, 오석종>
다소 거칠더라도 삶에서 걷어올린 글들이 마음을 끈다. 그런 글과 사라은 뿌리 깊은 나무 같은 느낌을 준다.
한 쪽에 쉽게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이 항상 그렇듯 이런 작업은 지난하고 외롭다. 그럼에도 나는 내게 주어진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모험을 하는 편이 관성적인 결론에 머무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도달했다.(16)
외노의원에 근무하는 3년간 나는, 의료적 의사소통이라는 비교적 절박한 소통의 영역에 있어 의료진의 '듣는 능력'이 환자치료 결과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변수임을 배웠다.(31)
의료인류학자 아서 클라인먼은 코드화된 분류 체계로서의 질병disease과 환자의 삶에서 이야기 형태로 구현될 수 있는 질환illnes을 구분한다. 후자는 전자와 다르게 환자의 아픈 몸에서 그 고유한 삶의 목소리를 거세하지 않는다. 그렇게 환자의 아픔을 둘러싼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질환 서사 illness narrative"라 부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 의료의 진단 및 치료 프레임에서 질환 서사가 차지하는 위상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현대 의학은 환자의 아픈 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따위가 아니라 몸을 효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42-3)
돌아올 수 없는 강은 한 번에 건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강의 과정 중 여러 번에 걸쳐 선택을 하게 만들고 결국 결과를 바꿔놓을 수 있는 저력은 오롯이 환자 자신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77)
인간은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 따라서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선택이란 사실상 허구다. 우리는 무엇인가 선행된 과정의 결과를 만나 장차 어떤 상황의 원인이 될 만한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를 둘러싼 환경과 사회•경제적 조건부터 그의 두뇌에 전해지는 자극의 종류와 그에 의해 새로이 형성되는 신경 회로 및 보상 기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일어난다.(82)
-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아 상담 경험.
낙인(stigma)이 치료에 미치는 영향- 사회적 고통.(보호받아야 할 대상을 짓밟음)
- 동정도 숭배도 없이 존엄하게. <오체불만족> 오토다케 히로타다
필수 불가결한 것들만 진행해도 시간과 여력이 모자란 생의학적 진료 현장에서 생사회적 관점이란 언제나 잉여의 논의가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방식은 언제나 사회적 특성들에 기반한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약이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약 이전에 그 약을 구입하기 위해 필요한 돈, 또 약을 먹어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내 생각에, 우리는 때로 더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지부터 질문해야 한다.(122 think we must)
헤테로토피아, 그들에게 쉼터는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였다.(장소와 비장소)
'헤테로토피아'는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다. "푸코는 도시의 경계에 위치한 공동묘지와 아이들에게 신비한 놀이터로 바뀌는 목요일 오후의 부부 침실, 마을 어귀의 난민 캠프와 다락방 사이에 세워진 인디언 텐트처럼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장소들을 모두 나란히 '헤테로토피아'로 조명한다. 푸코에 따르면 헤테로토피아는 하나의 평면 위에 분할, 배치될 수 없는 공간들이 존재함을 전제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복수의 공간과 배치를 하나의 실제 장소에 나란히 구현할 수 있"으며, "전통적인 시간과 완전한 단절 속에 있을 때 제대로 기능하"고, "그것을 고립시키는 동시에 침투할 수 있게 만드는 열림과 닫힘"이 나타나는 공간이다.(147-8)
내가 일했던 외노의원은 환자를 가려 받지 않았기에 미등록 이주민도 진료했다. 인권이 시민권에 우선한다는 아주 간명한 원칙 때문이었다.(164)--- 시민권<인권<생명권
스콧 펙은 "삶은 苦海다(Life is difficult)"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작가이자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그는 우리가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삶이 쉬울 수 있다(could be easy)거나 삶이 쉬워야 한다(should be easy)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오해를 벗어나 삶이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생각보다 많은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는 논지다.(168)- 트러블과 함께하기 조한다.
파편화된 질병의 단면이 아니라 다중적인 욕구와 고통을 지닌 환자 그 자체를 '돌보려고' 하는 의료만이 그러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진심으로 아이를 '돌보는'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것만을 고려하지 않는다. 아이가 당장 원하지 못하는 것과 앞으로 원해야 하는 것까지 고려한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돌봄의 의미다.(182)- 마을 주치의 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화와 언어는 그 내용이 학문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근대적 사유의 세례를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근대적 사유의 힘이 미치는 곳곳에 뿌리내린 가장 유력한 개념을 하나만 꼽아 보라면 나는 '이분법'이라고 말하겠다.(204)
실재하는 것만 고통을 느끼기에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이 허구가 아닌 실재에 봉사하도록 하려면 그 가치 판단의 근거로서 고통의 존재 양식을 중시해야 함을 환기하는 것이다.(208)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브뤼노 나투르는 어느 인터뷰에서 '미세 플라스틱'에 관한 이야기로 이원론의 맹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우리가 '자연(환경)'과 '사회(인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일에 익숙하다고 꼬집었다. 자연이나 환경을 우리와 결합되어 있거나 우리가 속한 것(즉 '우리')으로 생각하지 않고 대상화해서 우리 주위에 있거나 우리가 파괴 혹은 보호해야 할 그 무엇(즉 '그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파괴되는 자연을 '우리'로 인식하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다.(248-9)
진중하게 다루어야할 어떤 사안을 이분법적으로 단정 지어 성급히 결론 내는 순간 우리는 손쉬운, 그러나 무책임한 결말에 굴복하는 것이다.(256-7)
<인간이라는 직업>의 저자 알렉산드르 졸리앵은 "고대 철학자들은 (...) 스스로를 기꺼이 '전향적인 사람들'이라고 지칭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철학자의 일이 앞을 향해 걷는 것인 것처럼 인간의 불완전함과 불안을 잠식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한 걸음을 새로 지어나가는 것이라고 간명하게 지적한다.(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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