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bulucene
그동안 답을 미뤄두었던 문제들이 어느 정도는 풀리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해왔던 것을 정리해 주는 책이다. 유익하고 흥미로웠다.
이 책은 심각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 직면한 우리(바로 지금, 지구는, 인간이든 아니든, 피난처 없는 난민으로 가득하다)가 이 긴급한 시대를 어떻게 사유하고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영화 <삼체>의 삼체인들의 문제 해결 방식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사태의 긴박성, 정해진 답이 없음, 끝없는 탐구......
지구의 위기는 화석연료를 태우는 인간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이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명을 낳았다. 인류세의 상징은 불타는 숲이고, 인류세(Anthropocene)는 aner(남자)+ ops(눈, 얼굴/소유격 opos)로 '어떤 남자의 얼굴을 한 그'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남성중심적 언어이다.
인류세 대신 '자본세'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녹고 있는 얼음과 뚫린 북서항로가 그것을 상징한다. 석탄- 석유 - 재생에너지로의 변화가 아니라 자본은 빙하가 녹은 북극의 천연가스와 석유를 이용하려는 제3탄소시대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노예농업으로 대표되는 플랜테이션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러웨이는 이 문제를 시스템으로 접근하기보다, 복수종(multispecies)이 맺고 있던 관계의 급격한 변화로 접근한다. 지구에 대한 시스템적 접근은 시스템 바깥에서 볼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데, 관계 속에 사는 우리는 그 관계를 문제시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이러한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 테라폴리스(terapolis)라는 메타포를 사용한다. 지구를 의미하는 테라와 정치체를 의미하는 폴리스를 함께 엮은 이 용어의 함의는 복수종 크리터들은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 그리고 관계의 창의적 변화가 다른 지구를 만든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해결책도 중요하지만, 인간예외주의와 개체주의에서 벗어나 당장 가능한 관계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긴급하게 두 가지 중요한 슬로건을 제시한다. "트러블과 함께하자(stay with the Troub!e)"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Make Kin Not Babies!)"
함께해야 할 많은 트러블들- 트러블은 '불러일으키다, 애매하게 하다, 방해하다'를 의미한다. 트러블은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애매한 사태들이고, 즉각적인 응답을 필요로 한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머뭇거리기만 했다.
함께 살아가야 할 많은 친척들- 특정 지역에서 개체군이 소멸하더라도 동종의 개체군이 다른 곳에서 살아남는다면 언젠가는 회복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이중적 죽음'의 시대이다. 친척을 만들자는 해러웨이의 제안은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돌봄을 요청하는 것이다.
손상된 땅을 회복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퇴비의 아이들이다. 친척이 된다는 것은 일상에서 상대의 관점을 얻는 일이다. 서로의 삶에 단단히 얽혀드는 자들이 언제나 혈연이거나 동종인 것은 아니다. 친척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문제가 되는 관계 속으로 진입하는 일, 다시 말해 트러블과 함께 하는 일이다.
'반려종(companion species)'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로 상대를 대상으로 삼고 이용한다. 그러므로 무상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관계가 아니다. 반려종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하지만 이 세속성이 이익 교환과 동의어는 아니다. 계산은 언제나 빗나가기 일쑤이고 실패가 다반사이다. 해러웨이는 반려종 관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친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친척은 생물학적으로 얽힌 관계를 의미하지만, 수직적으로 얽혀 있는 가족과는 달리 수평적으로, 심지어 생물학적 분류 체계를 횡단하면서 서로 단단히 얽힌 관계이다. 이는 생물의 진화에서 이종 간 융합이 수직적 분기에 우선한다는 린 마굴리스의 공생발생가설을 염두에 둔 것이다. 마굴리스에 따르며 모든 생명은 보질적인 의미에서 친척이다.
반려종의 세속성을 표현하는 개념은 共-産, sympoiesis이다. 이는 '함께 만들기(making-with)'라는 뜻이다. 반려종은 서로를 만드는 관계이며, 서로를 만든다는 것은 처음의 규정성이 와해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규정성을 부여한다는 의미이다. 캐런 배러드는 이런 관계성을 미리 규정된 것끼리의 작용인 '상호작용(interaction)'과 구분해 내부-작용(intra-action)이라고 했다. 공-산은 이런 내부-작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해러웨이는 상호작용과 내부-작용을 언제나 함께 쓴다. 독자들에게 상호작용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서이기도 하고, 보다 역동적으로 공-산을 표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작용했다면 반드시 작용을 받는다. 헤러웨이는 이런 주체와 대상의 역동성을 '실뜨기(string figures)'로 형상화한다.
인류세의 파괴적 사태에 긴급히 응답할 수 있도록 응답-능력을 키우려면 인간이 유일한 행위자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불가능한다(인간예외주의). 결국은 인간이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해결사나 구원자를 자처하는 것과 공-산의 관계성 속에서 복구에 힘을 쏟는 것은 그 방법도, 결과도 아주 다르다. 해러웨이는 인류세의 파괴적 사태를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쑬루세(chthulucene)'라는 새로운 시대명을 제안한다. '쑬루'는 땅속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연결망을 의미한다. 인류세가 천상 신의 위계적 지배를 함의한다면, 쑬루세는 그물망처럼 복잡한 땅속 존재들의 촉수적인 연결을 함의한다. 복잡함을 부각한다고 파괴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쏠루세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고 물러서거나 파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술책이 아니다. 쏠루세는 테라폴리스에 참여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촉수 사유> 촉수성은 공-지하적이고, 무서운 붙잡기와 싸움과 엮임으로 휘감기고, 살기와 죽기를 만드는 생성적 반복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해 릴레이를 한다.
수동과 능동, 분리와 부착 속에서 응답-능력 기르기이다. 또한 집합적인 알기와 하기, 실천의 생태학이다. 우리가 요청했든 하지 않았든, 그 패턴은 우리 손 안에 있다. 내민 손이 보내는 신뢰에 대한 대답. 생각하세요 think we must.
다른 관념들을 사유하기 위해 어떤 관념들을 가지고 사유하느냐가 중요하다.-스트래선
기능이 중요하고 임무가 중요할 뿐, 세계는 아이히만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평범한 사유의 결여에서 세계는 문제가 아니다. 도려낸 공간들은 모두 정보를 평가하기, 친구와 적을 결정하기, 바쁜 일을 하기로 채위진다. 이런 확실성을 도려내는 부정성은 찾아볼 수 없다. 놀라운 사유의 포기.
현재의 긴급성들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그들은 너무나 믿음이 깊고 견고한 나머지 다시 생각하고 다시 느끼는 것을 허용하지 못한다)자들은 정말 위험하다. 살기와 죽기의 어떤 방식은 옹호하면서 다른 방식은 옹호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똑같이 위험하다. 사실의 문제들, 관심의 문제들, 배려의 문제들은 실뜨기 속에서, SF 속에서 매듭지어진다.
저항하라! 생각하세요. 우리는 생각해야만 합니다. 진짜 생각을 하라, 아이히만처럼 생각 없이 하지 말고, 물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어떻게 저항하나? 단순히 중요한 문제로 만드는 게 아니라, 어떻게 중요한 문제로 만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