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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25. 12. 1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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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강신주/동녘/2024.12.5.

부제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시가 그려내는 구체적인 상황과 철학이라는 논리적 세계가 만나 경험을 일반화, 보편화하여 세계관을 구체화한다. 21명의 철학자들의 핵심적 주장이 21명의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구체화하고, 내용도 요점을 잘 드러내 이해하기 쉬웠다. 철학자들은 이름조차 생소한 이들도 있었지만 시인들은 고등학교 과정에서 많이 다루어져 친숙했다. 고등학생 자녀와 부모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다.

 

니체와 황동규를 함께 묶어 '망각의 지혜'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생각 못했던 부분이다.
12•3 내란을 겪었던 터라 '푸코와 김수영' 장도 좋았다. 4•19는 낭만주의 혁명으로 혁명의 주도세력들은 자신들이 이미 권력에 의해 훈육되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실패했다는 내용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아도르노와 최명란에서는 아우슈비츠 비극은 이성을 절대시해서 생긴 것이라는 아도르노의 분석이 충격적이었다.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에 관심과 사랑을 주자.
리오타르와 이상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시대 구분을 중심으로 이해했었는데 꾸준하게 모던(새로운)을 추구하는 것임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다소 모호했던 호모 사케르와 생명정치도 요점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지은이의 추천대로 한 명의 철학자를 잡았다. 들뢰즈. 그에 관한 책 <들뢰즈 커넥션>도 중고서점에서 샀다. 다 읽을 수 있기를.

삶을 낯설게 성찰할 수 있는 조망을 얻으려는 것은 삶을 관조하기 위해서 혹은 지적인 쾌감을 얻기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긴 여정의 하나일 뿐입니다.(7, 들어가는 말)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자신의 한계 인식으로부터 타자와의 관계 맺기
"일상적인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13)
철학은 삶을 낯설게 만드는 기술이다. - 고정관념 깨기(에고와 의식)
1) 시나 철학이 난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비트겐슈타인)이기 때문이다. - 진정한 이해나 변화는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고, 언어를 사용하고, 삶을 영위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데 달려 있다. 태도나 실천의 변화, 즉 의지의 영역이다.
2) 시: 함축적 언어, 철학: 추상적 언어 - 어려움
하늘에 연을 날릴 때 바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리듬을 시인의 그것에 맞추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이런 시도는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1.기쁨의 연대- 네그리와 박노해 : <인다라의 구슬>
* 다중(Multitude)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제시한 개념으로, 현대 지구를 지배하는 '제국'(Empire) 권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의미한다. = 인다라망의 각 구슬
네그리에게 '다중'은 오늘날의 세계 질서 속에서 새로운 삶과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창출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행위자들의 공동체이다. 
-스피노자, 코나투스conatus: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의지

2. 언어의 뼈 -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 <소리의 뼈>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다양한 규칙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철학이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논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후기 철학에서는 특히 일상 언어의 분석을 중시하여, 철학적 문제들이 종종 언어의 잘못된 사용이나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 의미는 사용: 낱말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에 있다고 주장. 즉, 단어는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과 규칙에 따라 파악된다.
-> 동일한 언어라도 사용되는 맥락이 천차만별이라는 것, 그래서 한 가지 의미만을 고집한다면 우리 삶에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54)
- 언어 게임(Language-Game): 언어 활동은 고유한 규칙과 환경(언어-놀이)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 철학적 탐구(56)

3. 사유의 의무 - 아렌트와 김남주 : <어느 관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이처럼 현실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74)
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것을 말하지요.(78)
-> 사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
유대인들도 조금만 부주의하면 언제든지 아이히만처럼 살육자가 될 수도 있다.(82)

4. 삶의 우발성 - 알튀세르와 강은교 : <물길의 소리>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기존의 헤겔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구조주의적 관점을 도입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인물. 특히 이데올로기와 주체 개념에 대한 새로운 분석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 사회 구성체 내의 한 층위(주로 경제)가 다른 층위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층위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 전체로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마주침 혹은 우발성의 철학

5. 너무나 인간적인 에로티즘 - 바타이유와 박정대 : <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에로티즘, 금기와 위반-> 원시 생명성의 회복

6. 소비사회의 유혹 - 벤야민과 유하 : <오징어 - 여는 시>
- 집어등의 찬란한 빛-> 부유함과 허영을 과시, 도취감, 특정 시대 훈육의 결과

7. 무한으로서의 타자 - 레비나스와 원재훈 :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 그리운 102>
레비나스에 따르면 '전체'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내가 타자의 속내를 모두 알 수 있다는 오만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반대로 '무한'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타자의 속내를 끝내 알 수 없다는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전체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타인도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확신합니다.
결국 '전체'의 관점은 '唯我論solipsism'에 빠진 관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유아론자에게는 타자와 대면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150)
미래와의 관계, 즉 현재 속에서의 미래의 현존은 타자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황은 진정한 시간의 실현이다. 미래로 향한 현재의 침식은 홀로 있는 주체의 일이 아니라 상호 주관적인 관계이다. - <시간과 타자>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마주침만이 기억과 기대에 물들어 있는 현재가 아닌, 새로운 현재를 가능하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153)

8. 망각의 지혜 - 니체와 황동규 : <꿈, 견디기 힘든> 
왜 강탈을 일삼는 사자는 이제 어린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원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가 이야기한 망각이란 불행한 기억을 초월하려는 능동적인 힘, 어둡고 우울한 정서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168)
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 속에 있다는 점 - 단순한 인간적 해석 이외에 다른 해석들도 어디선가 가능하다는 것 ; 지금까지의 해석들은 우리가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생명, 즉 힘에의 의지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관점주의적 평가들이라는 점 ; 인간의 모든 향상은 편협한 해석들의 극복을 수반한다는 점 ; 힘의 강화나 증가는 새로운 관점들을 열어놓고, 새로운 지평들을 믿게 한다는 점. 이런 생각이 나의 저작들을 관통하고 있다. - <유고Nachgelassene Fragmente, 1885년 가을-1887년 가을>
관점주의(Perspectivism)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다양한 해석적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철학적 입장이다. 이는 개인의 경험, 가치관, 환경 등이 지식과 인식에 영향을 미치며, 세계는 다양한 관점들이 충돌하고 경쟁하는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이해된다. 니체가 제시한 개념이며, 이를 통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가능성'으로서의 해석을 강조한다.
니체는 관점주의를 통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치 평가를 수행하는 자"이자 해석자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보았다. 

9. 미시 정치학 - 푸코와 김수영 : <하...... 그림자가 없다> 
4•19혁명의 주도 세력들은 자신들이 이미 권력에 의해 훈육되어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4.19혁명을 낳았던 낭만주의적 열정이 시들해졌을 때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 교수들, 시민들은 마치 혁명을 완수했다는 착각을 한 채 일상으로 되돌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자마자 그들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 그리고 자기 주변의 다양한 곳에 새겨져 있던 권력의 논리와 다시 맞부뒷혀야 했지만 그들은 결국 이 기나긴 씨움에서 이기지 못했던 겁니다.(183)-니체, 심연.
결국 민주주의가 가능하려면, 우리는 지배의 논리를 몸속 깊이 각인시키려고 시도하는 권력과 매순간 싸워야만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지배와 피지배의 논리를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로부터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187)
우리는 주체 자체를 제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역사적 틀 안에서 주체를 분석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계보학이라고 부른 것이다. 계보학은 주체-사건들의 장과의 관계에서 초월론적이거나 비어 있는 형식으로 역사의 경로를 움직이는 주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지식, 담론들, 대상들의 영역 등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역사학의 한 형식이다. - <권력/지식 1972~1977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와 저술들에 대한 선집>
* 자발적 복종, 노예적 주체, 자유를 두려워하는 수동적 주체

10. 대화의 재발견 - 가라타니 고진과 도종환 : <가구>
신 앞에 선 단독자(교환 불가능한 존재)(200)
가리타니 고진
'가르치고-배우는' 비대칭적 관계가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인 상태이다. 이런 관계는 결코 비규범적인 것이 아니다. 규범적인 경우, 즉 동일한 규칙을 갖는 대화 쪽이 오히려 예외적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런 대화가 자신과 동일한 타자와의 대화, 다시 말해 자기 대화(다이얼로그)를 규범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자기 대화 또는 자신과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화는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타자 역시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런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가르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바꿔 말해 타자 또는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하는 일이다. - <탐구擦究I>
-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좌절시키면서 우리 삶에 개입하는 존재를 타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 공동체: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닫혀져 있다.
  사회: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언어 게임이 마주치고 있는 공간
- 당연히 사랑의 감정은 공동체에서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타자, 즉 다른 공동체에 속한 혹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매력으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이란 감정은 삶의 규칙이 다르기에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타자에 대해 위험한 도약 혹은 비약을 감행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 우리는 타자를 알아서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타자를 알아간다.
* '접시꽃 당신'(사회적 층위)과 '가구'(공동체적 층위)의 사랑

11. 밝음의 존재론 - 하이데거와 김춘수 : <어둠>
분명히 인간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이런 존재자로서 그는 풀, 나무, 독수리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전체 안에 속해 있다. (.......) 그러나 인간의 탁월성은, 인간이 사유하는 본질존재로서 존재에게 개방된 채 존재 앞에 세워지고, 그리하여 존재와 관련된 채 머무르면서 존재에 응답한다는 점에 고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본래 이러한 응답의 연관으로 존재하며, 그는 오직 이러한 연관일 따름이다. - <동일성과 차이>
- Existence 실존. 바깥에 대해 열려 있는 채로 존재한다. 脫存.
존재는 '밝히면서 건너옴'으로 스스로를 내보인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자체는 '밝혀져 있음 속에서 다가와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간직하는 도래'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밝히면서 건너옴'이란 의미에서의 존재와 '스스로를 간직하는 도래' 라는 의미에서의 존재자 자체는 그렇게 구분된 것으로서 동일한 것으로부터 즉 '사이-나눔'에서 본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 ) '건너옴'과 '도래'의 사이-나눔으로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이 양자의 '밝히면서-간직하는 품어-줌이다. - <동일성과 차이>
그러나 우리는 촛불이 열어 놓은 밝은 공간을 금방 잊어버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것들에만 신경쓰기 쉽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 망각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면 존재자에게만 신경을 쓰느라고 사유하지 못했던 존재를 사유하게 되는 것, 그것을 하이데거는 진리, 즉 알레테이아라고 말합니다. '알레테이아'는 망각의 강인 'lethe'와 부정을 의미하는 'a'의 합성어로 망각을 거슬러 기억을 회복하는 정신의 운동을 의미합니다.
-  니체와 황동규: 망각 긍정적(변혁), 하이데거와 김춘수: 망각 부정적(관조)

12. 주름과 리좀 - 들뢰즈와 최두석 : <성에꽃>
누구에게나 고유한 주름은 있다!
아장스망(agencement)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 있
으며, 나이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multiplicite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 '인간' '-'동물'-'제작된 도구' 유형의 아장스망, 즉 인간-말-등자를 생각해 보자. 기술자들은 등자가 騎士에게  옆 방향으로 안정성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군대조직, 즉 기병을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 .......) 이 경우 인간과 동물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 것이고, 전자나 후자는 모두 변화한 것이다.- <대화Dialogues>
- 다중체 multi + pli(fold, 주름)-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흔적(다양체)
'리좀'은 출발하지도, 끝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친자 관계filiation를 이루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alliance를 이루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 리좀은 '... ...와et .....와et.......'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 <천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 리좀: 뿌리줄기, 리좀의 활동은 마주침과 그 흔적을 상징한다. 모든 것들은 다른 것과 마주침으로써 그 흔적들을 자신에게 아로새기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최두석 시인이 추운 새벽의 버스 창에서 보았던 성에꽃처럼 말입니다.
* 들뢰즈(Gilles Deleuze): '차이의 철학'과 '생성(Becoming)의 철학'을 통해 기존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개념들, 특히 동일성, 재현, 초월성 등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안했다.
*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로마 폴리니우스)
*시뮬라크르 : 시뮬라크르는 전통적인 철학에서 추방되었던 '가짜'가 아니라, 오히려 원본 없는 이미지를 통해 새로움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사건이다. -> 접속과 의미 생성, 생성은 '무엇으로 되어간다'는 뜻이다.
老子 王弼註 2, 有無相生 難易相成(있음과 없음이有無 서로 낳고相生, 어려움과 쉬움이難易 서로 이루어준다相成. 세상의 실상은 카오스이다.

13. 애무의 비밀 - 사르트르와 최영미 : <차와 同情>
사실 나의 사랑이 타자의 사랑을 강제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타자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절대적으로 선택해 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불가능한 소망 이면에는, 상대방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우리의 불길한 직감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 말입니다.

14. 작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 - 아도르노와 최명란 :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 아도르노
아도르노의 결론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는 광기나 비정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이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성' 혹은 '합리성'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파악되어야 할 것 가운데 개념의 동일성 앞에서 물러서는 것, 그것은 개념으로 하여금 사유산물의 공격할 수 없는 완전무결성 • 완결성 • 엄밀성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하는 과도한 작업을 강요한다. 위대한 철학에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하지 않고 자신 이외의 것을 온갖 이성의 간계를 통해 박해하는 편집광적 열성이 따랐다. 한편 이 박해 앞에서 그 이외의 것은 언제나 더욱더 뒤로 물러선다. - <부정변증법> 예) 조선 후기 성리학
동일성identity 사유는 어떤 것이 무엇에 속하며 그것은 또한 무엇을 대표하는 본보기인지를, 즉 그것 자체가 아닌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 전체주의의 기원
대안- 성좌에 입각한 사유: '동쪽에 있는 A라는 별'을 의미 있게 하는 다른 개념을 찾아야한다.
시인들은 시를 통해, 개별자를 보편자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자 또는 개념에 의해 억압된 개별자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해방시키려고 합니다. 상처받기 쉬운 작은 것들, 그러나 스스로를 표현할 수는 없는 것들, 이런 것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시이니까요.
-시(예술)는 숨겨져 있던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다.(미켈란젤로)
절망은 침묵할 때 진정한 절망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절망을 시로 혹은 철학으로 표현할 때 그것은 오히려 희망의 계기로 반전되는 법입니다. 마치 냉정한 진단만이 고질적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15. 해탈을 위한 해체론 - 데리다와 오규원 : <죽고 난 뒤의 팬티>
해체주의 : 종래의 로고스(logos) 중심주의적인 철학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철학 이론으로, 1960년대에 프랑스의 비평가 데리다(Derrida, J)가 제창한 비평 이론. 주어진 것으로서의 전체성, 즉 神이나 이성 등 질서의 기초에 있는 것을 비판하고, 사물과 언어, 존재와 表象, 중심과 주변 따위 이원론을 부정하며 多元論을 내세운다.
데리다가 현전(현재 계기)을 그렇게도 비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데리다의 비판은 '현전' 개념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는 서양철학이 강조했던 모든 개념들도 절대적인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기 때문이지요. 데리다의 사유를 해체주의라고 규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가 지적인 즐겨움을 위해 비판과 해체를 일삼고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명해서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데리다는 고질적인 편견을 깨뜨려 우리를 구체적인 삶의 세계 속으로 다시 되돌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데리다의 논리에는 불교의 전략과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空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 나가르주나라는 철학자를 들어보았나요? 그는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사실 '의존적으로 발생한다緣起'는 점을 논증합니다. 이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은 자기동일성自性이 없는 것(무자성),즉 공한 것으로 판명되지요. 그런데 공을 이해한 사람은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편견을 벗어나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새롭게 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착각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을 영위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비판은 나가르주나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16. 미래 정치철학의 화두 - 아감벤과 한하운 : <전라도길 - 小鹿島 가는 길에>
지렁이와 벌레처럼 죽여 버릴 수는 있어도 희생으로 쓸 수는 없는 존재들, 즉 Homo Sacer(아감벤)로 지목된 인간이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명체가 벌거벗었다는 이야기는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그든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는 이미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정치란 생명체와 로고스 사이의 접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계선이라는 점에서, 정치는 서양 형이상학의 진정 근본적인 구조처럼 보인다. 벌거벗은 생명의 '정치화'란 그것을 통해 생명을 지닌 인간의 인간다움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특히 형이상학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근대는 이 과제를 떠맡으며 그저 자신이 형이상학적 전통의 본질적인 구조에 충실하다는 점을 천명하고 있을 뿐이다.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zoe-비오스 bios',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 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그것과의 포함적 배제 관계를 유지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 <호모 사케르 Homo Sacer>
이 때문에 자신의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정치권력이 요구하는 주체 형태로 자신을 구성하는 일과도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생명정치Biopolitics, 평상시 정치권력은 개인들에게 벌거벗은 생명이 아닌 정치적 존재로 훈육되어야 할 필요를 각인시켜 왔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아감벤은 지배 자체는 변하지 않았고 지배의 양식만 변해 왔다는 벤야민의 통찰을 떠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 민주주의에서는 적대 관계가 공동체 외부의 '벌거벗은 생명(조에)'과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 존재(바오스)' 사이에 그어졌다면, 이제 근대 민주주의에서 그것이 한 개체 내부에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를 함께 각인시키는 식으로 이행했다는 겁니다.
근대 민주주의 체제는 개인들을 일종의 정치적 존재로 훈육하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결국 각 개인들은 벌거벗은 생명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매번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만들어졌지요. 만약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공포감이 이처럼 개인들에게 모두 각인되어 있다면, 이러한 공포감을 현실화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벌거벗은 생명으로 복귀하기 이전에 끊임없이 새로운 누군가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어 탄압하는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요. 이때 슈미트가 말한 것처럼 공동의 적을 두고 우리는 동지로 서로 뭉치게 될 겁니다.
-> 문둥이, 왕따 등 소수자에 대한 폭력

17. 육화된 마음 - 메를로 퐁티와 정현종 : <섬>

나와 타인의 소통 수단, 나는 직접 타인의 마음을 열 수 없고 타인이 마음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가 섬으로 오는 것이다.
지각된 광경은 순수 존재를 갖지 않는다. 내가 보는 그대로 정확하게 지각되는 광경은 개인적인 나의 역사의 한 계기이다. 또한 감각은 재구성이기 때문에 나에게 사전에 구성된 것들의 침전을 전제하고, 감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자연적인 능력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정말 놀랄 일이다. 따라서 나는 헤겔의 말처럼 '존재 속의 구멍'
이 아니라, 만들어졌지만 파괴될 수도 있는 함몰이자 주름이다. - <지각의 현상학>
- 존재의 구멍 :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 혹은 순수한 자유
- 함몰이나 주름 : 만들어졌지만 파괴될 수 있는 것. 오래 입어 꾸겨진 옷
-> 자연적 능력의 차이와 역사적 주름의 고유성 때문에 우리는 서로 고립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이지요.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고독에 빠지는 겁니다. 내 마음을 그 혹은 그녀에게 주었는데도 그가 이것을 거부할 때
나는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은 고독을 느낌니다. 결국 고독이란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의 사랑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지요.

18. 포스트모던의 모던함 - 리오타르와 이상 :  <AU MAGASIN DE NOUVEAUTES> 오 마가쟁 드 누보테 - 새로운 것들로 가득차 있는 가게에서(미쓰코시三越 백화점)
- 이상, 모던 보이, 끊임없이 새로움 추구
모던 : 근대 혹은 현대. moderna(라틴어) - 새로운, via modera 새로운 길. via antiqua 낡은 길
모던이라는 말은 특정 시대만을 가리키는 특수한 용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과거보다 새로울 때 언제든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어느 시대에 등장하든 간에, 모더니티는 기존의 믿음을 산산이 부수지 않고서는 그리고 "실재의 결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모더니티는 다른 실재들을 발명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은 바로 모던의 핵심, 즉 무한히 새로움을 반복해야 할 강박증적 운동이라고 주장합니다.
* 리오타르  이성의 해체, 사고의 탈권력화 : 탈주체, 탈형이상학(메타 설화)-거대 설화의 종언-작은 서사(뭔가를 찾고 있는 자아), 이성의 복잡성, 지식의 파편성, 사회의 비합리성이 사회를 지배한다.

19. 사랑의 존재론적 숙명 - 바디우와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사랑은 진리의 생산이다. 무엇에 대한 진리일까? 상황 속에서 단지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 작용한다는 것에 대한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 <조건들>
사랑은 기존에 속한 일반적 관계에서 벗어나 오직 '둘만 서로 마주보도록 하는 강력한 사건이니까 말이지요. 이처럼 사랑에 빠질 때 '둘'은 '둘'의 마주봄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며 '둘'만의 경험을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라는 바디우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지요.
결국 '당신이 곁에 있어도 당신이 항상 그리운 것'이 사랑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20. 인정에 목마른 인간 - 호네트와 박찬일 : <팔당대교 이야기>
* 타자에게 인정받으려는 인간의 욕망
악셀 호네트 : 사랑, 인정, 혹은 관심을 받으려는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다.
•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정신현상학, 헤겔)
헤겔의 논리에도 노예와 인정투쟁에 빠져 있는 주인은 진정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예에게 자유를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노예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사람, 즉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대한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호네트가 상호인정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와 타자가 모두 주인이 되어 만났을 때만 비로소 상호 인정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물화의 세계를 넘어 인정의 세계로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루카치는 물화를 인간적 관계가 사물적인 관계로 대체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호네트는 물화를 인정이 망각되는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인정 망각) - 하이데거 '존재 망각'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을 구매하듯이 인간을 구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돈을 가진 자가 주인의 지위를, 그렇지 못한 자는 노예의 지위를 가질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의의 관계는 사실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 사이의 관계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 속에서 인간 상호 간의 자유로운 인정이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오직 돈이 있어야 인정받고, 그렇지 않다면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니까 말입니다.

21. 한국 사유의 논리 - 박동환과 김준태 : <길 - 밭에 가서 다시 일어서기 1>
* <항상, 이미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넘어서 있던 한국적 사유> 박동환이 제안했던 제3의 논리는 얼핏 들으면 생태학적ecological 사유의 일종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생태학적 사유가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나 혹은 하나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박동환의 사유는 생태학적 사유와 구별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유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혹은 두려운 세계와 직면해서 그것과 관계할 수밖에 없다는 생명의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철학자 박동환의 주장에 따름으로써 우리는 다른 주도적 문명권에 대해  모방과 수입만을 일삼은 독창성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기존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도시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매우 협소하게 보였던 한국인의 무의식적 삶과 사유 논리 가운데 일시적 패권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생명의 논리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에필로그>
피에르 클라스트르(1934~1977)라는 정치인류학자가 국가가 없는 사회를 지향했던 인디언 사회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이런 자유 정신이었습니다.  자신의 자유가 침해되는 순간 인디언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잔혹하게 죽일 수는 있어도 누구도 그들을 복종시킬 수는 없었던 겁니다. 또한 내면 깊은 곳에서 타자의 자유를 부정하려는 욕망이 꿈틀거릴 때, 인디언들은 그 욕망을 단호하게 거부할 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 기쁨과 자유, 이것이야말로 철학과 시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의 궁극적인 꿈이자 인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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