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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마음닦기/독서

by 빛살 2025. 12. 2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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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에크하르트 톨레, 류시화/연금술사/2025.3.5.

책 표지를 만지면 매끄러우면서도 도톨도톨한 느낌이 좋았다. 종이가 가볍지만 각 장이 사진이 있는 종이를 접어 시작하기 때문에 쪽 수에 비해 두껍게 느껴진다. 2008년 출판했다가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2013년 재출판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편집에 공을 들인 것 같았다. 나에게는 지금까지 읽었던 영성 계발 도서의 결정판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책장은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 때로는 명상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모든 문제와 불행의 원인인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자유와 기쁨'에 이르는 단순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표지 뒷장에 소개되어 있다. 다 읽고 난 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위해 다음을 마음에 새겨두기로 했다.

그런가?(256쪽, 하쿠인 선사 일화, 무저항), 아마도(254쪽, 복권 당첨자 이야기-새옹지마, 무판단), 이 또한 지나가리라(284쪽, 고대 수피의 이야기 - 무상함, 무집착). 저항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 이 세가지는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의 세 가지 측면이다.(286)

가능한 한 자주, 기억날 때마다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십시오. 이것을 1년 동안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여기에 적힌 모든 과정에 참가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숨쉬기는 무료입니다......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시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308-9) - 무슨 일을 하든 불안, 망상에 한눈을 팔지 않고, 마음을 호흡과 발 밑에 집중하며, 온전히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라.(틱낫한)
의식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그렇게 해서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올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369)


가장 위대한 예술은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 /  放下着 / 단풍 드는 날-도종환
-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그냥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라. 밑에서 기어라.(장일순) -> 김민기의 '뒷것', 無爲而化

<나는 누구인가>
- Ātman : 산스크리트어로 '영혼', '자아', '본질적인 자아'를 뜻함. 고대 인도 철학 및 힌두교의 핵심 개념.  '호흡'이라는 어원에서 파생되었으며, 개별 생명체에 내재하는 영원불멸의 실체. - 타자와 분리, 차별로 이어짐(카스트제도)
- 불교는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無我, anatta)를 설파함. 제행무상(연기), 제법무아(무아)
- 시 '나는 누구인가 -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 이 외로운 물음이 나를 조롱한다. / 내가 누구이든, 신이 아시니, 나는 신의 것입니다."

 

<깨달음>
꽃- 식물의 깨달음, 깨달음은 발달의 단절,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로의 도약이여 물질성의 감소-천상적인(비물질적인) 특성-을 의미한다. 영적 깨어남.
깨어남이 핵심적인 부분은 깨어 있지 않은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다. 즉 자신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에고를 알아보는 일이다.
깨어남이 가능하려면 '깨어날 준비'가 필요하다. 즉, 수용하는 자세, 진리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필여하다. 내적으로 항복할 때, 저항하지 않을 때,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90, 忍辱)

자신에 대한 허구의 이미지가 '에고'이다. 모든 상황에서 '나'를 말하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존재. 끊임없이 생각(Thinking)과 감정(Emotion)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거짓 자아. 나라는 자아의식을 부여받아 반복해서 일어나는 생각 형태들과 조건 지어진 정신적 감정적 패턴들의 복합체이다.(85) -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가시나무, 조성모) <-> 순수 존재, 순수한 있음Being
자신 안에 에고를 관찰할 때 당신은 그 너머로 가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의식 상태가 당신의 삶과 행성의 미래를 결정한다.(인드라망)

<종교의 두 가지 공통점>
1. 인간의 '정상적인' 마음 상태에는 기능장애 또는 광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강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 힌두교: 마야 - 현실을 가리는 장막으로 환영(Illusion 가장 일반적인 의미) 또는 "착각"을 뜻함. ​마야는 우주의 창조와 현현을 가능하게 하는 브라만의 힘인 동시에, 개개인이 참된 실재를 보지 못하고 현상계에 묶여 있게 만드는 우주적이고 개인적인 환영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 불교 : Dukkha, '괴로움', '고통' 四聖諦 중 苦聖諦
두카는 염세적인 개념이 아니라,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인식해야 할 존재의 근본 속성이다. 고통은 에고가 스스로를 불태우는 불길이다.(150)
* 기독교 : 원죄
- '죄'는 화살 쏘는 이가 과녁을 빗맞히듯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죄는 핵심에서 벗어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더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하고 고상한 일처럼 들리지만,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노력이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 역시 똑같은 기능장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더 미묘하고 순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자기를 강화하는 형태이다. 그런 노력 역시도 자신이 관념 속에서 '나'라고 여기는 이미지를 더 크게, 더 강하게 만들려는 욕망과 아무 차이가 없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 좋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함으로써만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당신의 의식 상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38-39) - 공산주의 실패 원인

2. 자신의 기능장애, 광기의 인식 -> 깨달음, 해탈(열반- 고통의 소멸), 구원, 깨어남.
자신은 누구인가? 자신은 생각하는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다. 생각 이전의 그 알아차림, 생각이 일어나는 공간이 바로 자신이다. 감정과 감각 지각이 일어나는 공간이.(48)

[인류의 현재 상태 - 에고]
에고는 형상과의 동일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 형상은 주로 생각의 형태이다. 만약 악이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다면, 사실 악이란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지만, 악에 대한 정의도 이렇게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형상을 자기 자신이라고 완전히 믿는 것'. 물질적인 형상, 생각 형태, 감정 형태와 동일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모든 '다른 사람'과 '생명의 원천'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연결성에 대한 기억상실, 그것이 원죄이고 고통이며 망상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이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밑바탕에서 지배할 때 나는 과연 어떤 종류의 세상을 창조하겠는가?(48)
​에고는 욕망에 의해 더 활성화된다.(결핍)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에고로 나를 인식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의식은 생각하고 있는 의식과 별개이다. - 사르트르

[마음이 만드는 드라마] 에고를 초월하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것들
에고는 동일화와 분리를 먹고 산다. -- 나와 다른 타자 인식이 비교와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동일화(성)- 이분법적 사고
당신이 에고라는 무의식을 그 개인의 문제로 분류하면 누군가는 적이 된다. 대응하지 않는 것은 허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대응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말이 용서이다.(96) -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

진리 -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윤리적 상대주의(인간 행동의 지침이 되는 절대적 진리 따위는 없다.)
진리는 자신들 쪽에만 존재한다는, 다시 말해 자신들만 옳다는 믿음은 행동과 행위를 광기 수준으로까지 전락시킨다.
진리는 당신이 믿어야만 하는 이야기, 즉 한 묶음의 생각이다.(105)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진리이다. 예수는 이것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로 전하려고 했다.
예수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에 있는 존재, 모든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신의 존재인 그 생명에 대해 말했다. 기독교 신비가들은 그것을 '내면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부른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진아)', 즉 내면에 거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 차원과 연결될 때 - 그 차원과 연결되는 것은 당신의 자연스러운 상태이지 특별히 기적적인 성취가 아니다. -  당신의 모든 행동과 관계들은 당신이 깊은 내면에서 감지하는 모든 생명과의 일체감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107)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 성 어거스틴

* 에고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이나 누군가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악을 뿌리 뽑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맞서 싸우고 있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이 바뀔 가능성 높기 때문이다. 무의식과 싸우는 것은당신 자신을 무의식 속으로 끌고 갈 것이다. 무의식, 즉 기능장애를 가진 에고의 행동은 그것을 공격하는 것에 의해서는 결코 물리칠 수 없다. 설령 상대를 물리칠지라도 무의식은 간단하게 당신 속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아니면 새로운 변장을 한 상대방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무엇과 싸우든 싸움은 그것을 강하게 만들며, 저항할수록 끈질기게 지속된다.(110-111)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 또한 네 속을 들여다볼 것이므로. -선악의 저편, 니체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뿐이다. 알아차림과 에고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현재의 순간 속에 숨겨져 있는 힘이다. 우리가 그것을 '현존'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것은 당신의 목적이기도 한데, "현존의 힘을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미래에 이루어져야 할 목표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 존재함'만이 당신을 에고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며, 당신이 어제도 내일도 아닌 현재의 '지금'에만 존재할 수 있다. '현존'만이 당신 안의 과거를 해체시키고 당신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킨다.(114-5)

사랑한다는것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자신을 알아보는것이다. 그때 그 다른 사람의 '다름'은 순전히 인간적인 영역, 형상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환상임이 밝혀진다. 모든 아이 안에 있는 사랑에 대한 갈망을 형상 차원뿐 아니라 존재 차원에서도 부모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148) - 시천주, 인내천
사랑은 이원성의 세계 속에 있는 일원성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이것이 형상의 세계 속으로의 신의 탄생이다. 사랑은 이 세상을 덜 세속적으로 만들며, 덜 단단하고 더 투명하게 만들어 신의 차원이, 의식의 빛이 비쳐 나오게 하는 것이다.(149)

당신은 특별히 어떤 사람이 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완전하게 자기 자신일 때, 당신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효과적이다.(151)
만약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 완전히 편안할 수 있다면, 그때 남아 있는 것이 당신이다. '인간'의 뒤에 있는 '존재', 이미 규정된 무엇이 아니라 순수한 가능성의 장이다.(152)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햄릿)(154)

에고는 존재하기 위해 타인이 필요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타인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딜레마가 있다. 장 폴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에고의 절규이다.(164)
선에서는 "진리를 추구하지 말라. 다만 자신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멈추라."라고 한다.(166) - 마음과의 동일시를 멈출 때 참 나가 드러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경험한다.(166) - 사생대회 경험.

<불멸의 결정적 증거>
'나의 삶(생명)' 같은 것은 없으며, 내가 '삶(생명)'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삶(생명)' 그 자체이다. 나와 '삶(생명)'은 하나이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174)

<고통체 - 業障 : '업(Karma)' + '障, 가로막을 장)'. 과거와 현재에 지은 행위(업)의 결과로 인해 현재의 깨달음이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의미함.
- 최고의 예술은 과거를 내려놓는 것
-중생은 業(業生, 業力)으로 살지만 보살은 願(願生, 願力 - 깨달음, 중생구제, 이타심))으로 산다.
모든 생명 형태의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몸도 유기체로서 자체의 지성을 가지고 있다.(179) - 우주 지성, 신유물론(New Materialism)
'순수한 있음'의 상태는 사랑, 기쁨, 평화로서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발산되어 나온다. 그것들은 당신의 진정한 본성이다.(185)

<과거를 업고 다니기> 일본 선승 탄잔과 에키도 일화 - 에고와 지성(지혜, 순수한 있음), 정명도, 정이천의 일화.(187)

왜 고통스러운 그리스도가, 고뇌로 일그러진 얼굴과 수많은 상처로 피 흘리는 그의  육신이 인류의 집단의식 속에 그토록 중요한 이미지가 되었는가? 특히 중세 시대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깊이 연결된 것은 자신의 내면에 그 모습과 공명하는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자기 자신 안의 내적 현실, 즉 고통체의 표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자신 안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알아차릴 만큼 의식이 깨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고통체를 알아차리는 시작이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과 고통 초월의 가능성 둘 다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인간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193)

<오락과 언론과 고통체>
만약 당신이 우리의 현대 문명에 익숙하지 않다면, 만약 다른 시대나 다른 행성에서 이곳으로 왔다면, 가장 먼저 놀랄 일 중 하나가 수억 명의 사람들이 일부러 돈을 내고 인간이 서로를 죽이고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구경하며 기뻐하고 또 그것을 '오락'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202) -> 영화, 스포츠, 전쟁

<여성의 집단적 고통체>
에고는 여성 형태보다는 남성 형태 속에서 더 깊이 뿌리내리고 더 쉽게 성장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생각과 동일화되는 것이 덜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직감력이 생겨나는 생체 지성과 내면의 몸에 더 많이 연결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덜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기 때문에 다른 생명 형태들에 대해 더 많이 열려있고, 더 민감하며, 자연계에 더 많이 맞춰져 있다.(205) - 기독교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의한 억압

생각하는 마음은 말할 것이다. 당신이 무관심하고, 냉담하며, 자비심이 없고, 관계를 멀리한다고. 그러나 사실은 생각과 감정보다도 더 깊은 차원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차원이야말로 단지 관계를 맺는 것을 넘어서 진정으로 함께할, 진정으로 하나됨이 가능하다. '현존'의 고요 속에서 당신은 자신과 상대방의 형상을 초월한 본질을 하나로 감지한다. 자신과 상대방이 하나임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돌봄이며, 진정한 자비이다.(230-1) - 모모, 태교.

받아들임을 통해 당신은 넓고 광대한 본래의 자신이 된다. 전체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하나의 조각이 아니다. 에고는 스스로를 하나의 조각으로 인식한다. 이제는 당신의 진정한 본질이 나타나며, 그것은 신의 본질과 하나이다.
예수는 이것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전체이듯이 너희도 전체이어라." 신약성서에는 "완벽하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전체'라는 의미의 본래의 희랍어를 오역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은 전체가 될 필요가 없으며, 이미 전체인 자신이어야 한다. 고통체가 있든 없든.(238)

풍요는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불공평하게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풍요도 결핍도 내면의 상태이며, 그것은 당신의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예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48)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얻으리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마태복음 16:24 -26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276) - 무대응과 인욕, 사랑으로

<공간의식- 眞空妙有, 텅빈 충만>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안에) 있다.”(루카 17,20-21) (295)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해지는 데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충분한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 가장 미미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한 줄기 미풍, 찰나의 느낌, 순간의 눈빛........, 이 작은 것들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준다. 고요하라."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297), 정채봉 '기도'(Largo 혹은 Adagio) 무아의 경지, 공간에 녹아듦.

많은 점에 있어서 육체는 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이다.(315)
- 우리는 육체를 하나의 형상으로 지각하고 형상으로 생각하지만, 그중 99.99퍼센트가 실제로 텅빈 공간이다.
- 인간의 뇌는 약 천억 개의 신경세포(뉴런)이 있다. 은하계의 별의 숫자와 같다.
- 양자 얽힘 : 두 개 이상의 양자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상호 의존성이 유지되어 한 입자의 상태가 결정되면 다른 입자의 상태도 즉시 결정되는 현상. 

형상 차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덜 강조하는 것은 의식을 생겨나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중단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당신을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지 발견할 수 있다.(321)

당신 내면의 목적은 깨어나는 것이다.(325)
- 알아차림, 현존, 우주 지성과의 의식적인 연결, 사념 없는 의식.
생각과 알아차림의 분리, 그것이 당신의 주된 목적의 핵심이며, 그것은 시간의 무효화를 통해 일어납니다. - 심리적 시간(334)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을 삶의 주된 목적으로 바라볼 때, 당신은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나큰 힘을 불어넣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시간을 무효화시킬 때,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이, 존재와 행위가 연결됩니다. - 톨스토이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지금 함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위해 좋은 일 하기' 이다. -> 삶의 목적

삶을 움직이는 것이 에고가 아니게 되면서 외부적인 안정에 대한 심리적 욕구도 줄어듭니다. 외부적인 안정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당신은 그 불확실성과 함께 살 수 있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성과 편안해지면 삶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립니다.(344-5)
가장 위험한 것은 안정을 희구하는 욕망이다. 순탄한 삶은 좀 더 신랄한 유혹으로 인간 정신을 시험하는 법이다. 불행은 그저 견뎌내는 것인 반면 행운은 타락하게 하기 때문이다. 안정성에 대한 욕구는 모든 위대하고 고귀한 대업에 장애가 된다. - 타키투스(로마 역사가)

자연은 전체와의 무의식적인 하나됨 속에서 살아갑니다. 전체와 의식적으로 하나가 되고, 우주의 지성과 의식적인 일치를 이룸으로써 이 세상 속으로 새로운 차원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인간의 목적이자 운명입니다.(349)

<깨어남과 회귀 운동>
광기에 봉사하는 지성(363) - 원자폭탄, 전쟁.
에고가 강할수록 사람들이 각각 별개의 존재라는 의식도 강해진다. 반발력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행위는 모두의 선을 목표로 한 것들이다. 그런 행동은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분리시키지 않고 합친다. '나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나의'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 존재 속 의식의 등장을 위해, '나의' 종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자연 전체를 위한 것이다.(364)

의식이 당신이 하는 일 속으로 흘러들어 올 수 있는, 그렇게 해서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올수 있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369)
당신은  여전히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다. 당신을  통해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그것이 특별한 것이다. 그 본질을 당신은 모든 존재들과 공유하고 있다.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이며 수피의 스승인 하피즈는 이 진리를 이렇게 아를답게 표현했다. "나는 신의 숨이 통과해 흐르는 피리의 한 구멍이다. 그대여, 이 음악을 들으라."(375)

스트레스와 달리 열정은 에너지 진동 주파수가 높기 때문에 우주의 창조적 힘과 공명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고대 희랍어의 '안'을 뜻하는 '엔en'과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내재하는 신a God within, 즉 '내 안에 신을 둔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단어 엔토우시아제exitousiazein(신적 영감 상태)은 '신에 사로잡힌'의 의미이다. 열정에 불타고 있을 때는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만 할 필요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열정은 창조적 에너지의 물결을 불러들이기 때문에 당신은 다만 그 '물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377) - 릴케의 시작 활동
열정은 마음속 청사진을 물질 차원으로 옮기는 힘이다.(380)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381) 마가복음 11장 24절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 너희 안에 있다."(루카 복음 17장 21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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